왜? 동족이 분열되는 아픔을 (왕상11:1-40)
본문
오늘은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6.25 45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 겨레가 둘로 나뉘어진 것만도 가슴 아픈 일인데 한 형제가 총부리를 맞대고 서로를 죽여야 했던 슬픈 역사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왜 동족이 분열되는 아픔을겪어야 했는가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분열되어 남과 북으로 두 나라로 갈라지는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갈라진 남과 북이 서로 물고 뜯는 동족상잔의 결과 모두가 다 주위의 강대국에게 패망하고 만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을….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왜 동족이 분열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는지를 알아보자.
1.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림. 본문 11절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나의 언약과 내가 네게 명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고 했다. 솔로몬, 그는 참으로 하나님께 은총 입은 사람이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측량 못할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그의 지혜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지혜이다. 그 지혜로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루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솔로몬의 그 전무후무한 지혜가 어떻게 주어졌는가 자신의 학문적 정진으로 얻어진 게 아니다. 결코 자신의 힘으로 노력해서 얻은 지혜가 아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기도해서 하나님께 받은 지혜이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왕상3:9) 솔로몬이 자신이 기도하든 바 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주의 백성으로 알고 주신 지혜로 재판하고 다스렸을 때 태평성대를 이루며 연부년 부흥되는 축복을 누렸다.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태평성대를 이루며 성공적인 삶을 만방에 자랑했다. 자랑과 칭찬 속에 교만이 싹트고,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이방 혼인을 절대 금지하고 있는(신7:3) 율법을 저버리고 이방 여인들을 맞아 들였다. 후비가 700이요 빈장이 300이라 했다(본문 3절)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자의 삶은 육신의 쾌락을 쫓게 된다. 그래서 솔로몬도 수많은 여인들을 두게 되고 그들을 연애하였다고 했다(2절) 곧 이방 여인들에게 깊이 빠졌다는 말이다. 끝내 그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말았다. 솔로몬의 전무후무한 지혜는 어디로 갔을까 큰 은혜를 받는 것도 귀하지만, 그 받은 은혜를 잘 간수하며 그 은혜를 계속 누리며 사는 일은 더욱 복된 삶이다.
2.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함 본문 4-8절에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이족 후비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저희가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고 했다. 본문 33절에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고 했다.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기도의 응답으로 전무후무한 지혜를 받은 솔로몬이 어떻게 하나님을 버릴 수 있었을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봉헌할 수 있었던 엄청난 축복을 누렸는데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 예루살렘 성전 건축은 하나님의 인정받는 다읫 왕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축복이 아니던가 그밖에도 솔로몬이 받은 은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이 많은데 어떻게 하나님을 버릴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 성도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그토록 사모하는 은혜가 내 믿음을 지켜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은혜, 불같은 은혜 체험이 내 믿음을 지켜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받은 은혜를 잘 간수해야 한다. 요셉을 바라보자. 그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며 하나님께 범죄치 않으려 했다. 그의 삶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삶이었다. 요셉의 육신의 몸이야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의 손길이 펼쳐지는 안방에 있던, 바로 왕 앞에 있던, 아니면 양식을 구하려 내려온 형제들 앞에 있던 요셉의 심령은 하나님 앞에 항상 깨어 있었다. 솔로몬은 그렇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이방 여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육신의 소욕을 쫓아 마음이 돌아서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우상을 섬기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타락의 길을 걷고 있다. 육신의 소욕에 깊이 빠지면 심령이 어두워진다. 눈도 멀고 귀도 멀어진다.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번이나 저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하사 다른 신을 좇지 말라 하셨으나 저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고 했다.
3.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생각으로 함 본문 26-40절의 말씀에서 여로보암은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뜻을 알았다.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일러주신 하나님의 계획은 여로보암에게 주신 큰 은혜였다. 다윗 집 보다도 5배나 큰 10지파를 다스리는 축복이었다. 여로보암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큰 은혜에 감격했다. 놀라운 축복에 감격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감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너무 좋아서 날뛰다가 자신의 위치를 잊어버렸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은 사람의 생각으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이룩하신다. 사람은 단지 도구로 사용되어질 뿐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도구로 헌신해야 한다. 결코 내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나님의 계획을 앞질러 가서는 안된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함을 입고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기다렸다. 사울의 신하로서 충성을 다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있었으나 자신의 손을 대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곧바로 반란을 일으켰다. 자신을 감독으로 세워 준 솔로몬 왕을 배신하였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방법으로 이루려 했다. 여로보암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큰 은혜는 여로보암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윗 집의 책망을 위함이다. 솔로몬의 죄악을 징치하기 위함이다.
본문 39절에 “내가 이로 인하여 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할 터이나 영원히 하지는 아니하리라”하신 말씀은 다시금 하나의 나라로 회복할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하나님을 버리고 죄악된 길의 표본이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걸어갔다. 그것도자기 혼자만이 아닌 열 지파를 이끌고 감으로 영원한 민족의 분열자로 오명을 남기게 된다. 왜 동족이 분열되는 아픔을이스라엘 민족이 겪어야 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육신의 소욕에 눈이 멀어 이방 여인들에게 빠져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한 죄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생각으로, 인간의 방법으로 이룩하려 하고, 자신의 왕권을 위해 하나님을 말씀을 버렸기 때문이다.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우상을 섬기게 하였다. 하나님께 예배하려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는 백성들의 발길을 끊음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분열은 합쳐지지 못하고 남과 북 두 나라 모두 멸망하고 말았다. 우리 조국의 분단도, 우리 민족의 분단도 우리 성도들의 시각으로 본다면 우리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고 분열 된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아무리 일제치하라 하지만 신사참배를 가결한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일본 태양신을 숭배하는 엄청난 죄악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바로 여로보암이 걸어간 길이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우리 교회는 하나 되지 못하였다. 잘못을 회개할 줄 모르는 목이 굳은 자들이었다.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고 넓은 가슴으로 감싸 안을 수 있는 아량이 없는 속좁은 독선적인 자들이었다. 같은 주님, 한 주의 이름을 부르며 남남으로 돌아서고만 우리 교회의 분열이 갖으다준 아픔이다. 왜 동족이 분열되는 아픔을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느냐는 질문 앞에서 우리 성도는 우리 한국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해서 당하는 아픔임을 인식해야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우리 교회가 사분오열 점점 더 갈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면서, 주를 위하여라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찢고 있는 현실 앞에서 우리 성도들은 각성해야 한다. 이러다간 6.25 보다 더 큰 시련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게 아닌지. 우리 성도의 심령이 하나님 앞에 더욱 깨어 있어야 할 때가 아닐까요
1.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림. 본문 11절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나의 언약과 내가 네게 명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고 했다. 솔로몬, 그는 참으로 하나님께 은총 입은 사람이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측량 못할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그의 지혜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지혜이다. 그 지혜로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루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솔로몬의 그 전무후무한 지혜가 어떻게 주어졌는가 자신의 학문적 정진으로 얻어진 게 아니다. 결코 자신의 힘으로 노력해서 얻은 지혜가 아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기도해서 하나님께 받은 지혜이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왕상3:9) 솔로몬이 자신이 기도하든 바 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주의 백성으로 알고 주신 지혜로 재판하고 다스렸을 때 태평성대를 이루며 연부년 부흥되는 축복을 누렸다.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태평성대를 이루며 성공적인 삶을 만방에 자랑했다. 자랑과 칭찬 속에 교만이 싹트고,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이방 혼인을 절대 금지하고 있는(신7:3) 율법을 저버리고 이방 여인들을 맞아 들였다. 후비가 700이요 빈장이 300이라 했다(본문 3절)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자의 삶은 육신의 쾌락을 쫓게 된다. 그래서 솔로몬도 수많은 여인들을 두게 되고 그들을 연애하였다고 했다(2절) 곧 이방 여인들에게 깊이 빠졌다는 말이다. 끝내 그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말았다. 솔로몬의 전무후무한 지혜는 어디로 갔을까 큰 은혜를 받는 것도 귀하지만, 그 받은 은혜를 잘 간수하며 그 은혜를 계속 누리며 사는 일은 더욱 복된 삶이다.
2.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함 본문 4-8절에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이족 후비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저희가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고 했다. 본문 33절에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고 했다.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기도의 응답으로 전무후무한 지혜를 받은 솔로몬이 어떻게 하나님을 버릴 수 있었을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봉헌할 수 있었던 엄청난 축복을 누렸는데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 예루살렘 성전 건축은 하나님의 인정받는 다읫 왕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축복이 아니던가 그밖에도 솔로몬이 받은 은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이 많은데 어떻게 하나님을 버릴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 성도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그토록 사모하는 은혜가 내 믿음을 지켜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은혜, 불같은 은혜 체험이 내 믿음을 지켜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받은 은혜를 잘 간수해야 한다. 요셉을 바라보자. 그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며 하나님께 범죄치 않으려 했다. 그의 삶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삶이었다. 요셉의 육신의 몸이야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의 손길이 펼쳐지는 안방에 있던, 바로 왕 앞에 있던, 아니면 양식을 구하려 내려온 형제들 앞에 있던 요셉의 심령은 하나님 앞에 항상 깨어 있었다. 솔로몬은 그렇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이방 여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육신의 소욕을 쫓아 마음이 돌아서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우상을 섬기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타락의 길을 걷고 있다. 육신의 소욕에 깊이 빠지면 심령이 어두워진다. 눈도 멀고 귀도 멀어진다.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번이나 저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하사 다른 신을 좇지 말라 하셨으나 저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고 했다.
3.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생각으로 함 본문 26-40절의 말씀에서 여로보암은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뜻을 알았다.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일러주신 하나님의 계획은 여로보암에게 주신 큰 은혜였다. 다윗 집 보다도 5배나 큰 10지파를 다스리는 축복이었다. 여로보암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큰 은혜에 감격했다. 놀라운 축복에 감격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감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너무 좋아서 날뛰다가 자신의 위치를 잊어버렸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은 사람의 생각으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이룩하신다. 사람은 단지 도구로 사용되어질 뿐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도구로 헌신해야 한다. 결코 내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나님의 계획을 앞질러 가서는 안된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함을 입고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기다렸다. 사울의 신하로서 충성을 다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있었으나 자신의 손을 대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곧바로 반란을 일으켰다. 자신을 감독으로 세워 준 솔로몬 왕을 배신하였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방법으로 이루려 했다. 여로보암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큰 은혜는 여로보암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윗 집의 책망을 위함이다. 솔로몬의 죄악을 징치하기 위함이다.
본문 39절에 “내가 이로 인하여 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할 터이나 영원히 하지는 아니하리라”하신 말씀은 다시금 하나의 나라로 회복할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하나님을 버리고 죄악된 길의 표본이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걸어갔다. 그것도자기 혼자만이 아닌 열 지파를 이끌고 감으로 영원한 민족의 분열자로 오명을 남기게 된다. 왜 동족이 분열되는 아픔을이스라엘 민족이 겪어야 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육신의 소욕에 눈이 멀어 이방 여인들에게 빠져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한 죄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생각으로, 인간의 방법으로 이룩하려 하고, 자신의 왕권을 위해 하나님을 말씀을 버렸기 때문이다.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우상을 섬기게 하였다. 하나님께 예배하려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는 백성들의 발길을 끊음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분열은 합쳐지지 못하고 남과 북 두 나라 모두 멸망하고 말았다. 우리 조국의 분단도, 우리 민족의 분단도 우리 성도들의 시각으로 본다면 우리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고 분열 된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아무리 일제치하라 하지만 신사참배를 가결한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일본 태양신을 숭배하는 엄청난 죄악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바로 여로보암이 걸어간 길이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우리 교회는 하나 되지 못하였다. 잘못을 회개할 줄 모르는 목이 굳은 자들이었다.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고 넓은 가슴으로 감싸 안을 수 있는 아량이 없는 속좁은 독선적인 자들이었다. 같은 주님, 한 주의 이름을 부르며 남남으로 돌아서고만 우리 교회의 분열이 갖으다준 아픔이다. 왜 동족이 분열되는 아픔을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느냐는 질문 앞에서 우리 성도는 우리 한국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해서 당하는 아픔임을 인식해야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우리 교회가 사분오열 점점 더 갈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면서, 주를 위하여라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찢고 있는 현실 앞에서 우리 성도들은 각성해야 한다. 이러다간 6.25 보다 더 큰 시련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게 아닌지. 우리 성도의 심령이 하나님 앞에 더욱 깨어 있어야 할 때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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