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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사랑 한 번 경험하면 (벧전2:1-25)

본문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도 베드로가 주시는 간곡한 권고의 말씀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거듭난 자는(벧전1:23), 다시 말해서 주의 사랑을 한 번 경험하면성도의 삶은 바뀌어야 한다고 권고한다. 아니 바뀌게 된다고 한다. 본문 1-2절에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주의 사랑을 경험하기 이전의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이제는 어린아이처럼 순전한 마음으로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한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로서(본문10절)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고 했다(본문5절)
본문 3절에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다”는 것은 곧 주의 사랑을 체험한다는 말이다. 어린아이가 젖을 한 번 먹으면, 그 젖 맛을 알게 되고 젖을 찾기에 사력을 다한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도 말씀에 한 번 맛들이고 나면, 그 하나님의 말씀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주의 사랑을 한 번 경험하면 지금까지의 피상적인 사랑, 막연한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 절실한 사랑을 하게 된다. 주를 사랑하는 일로 인하여 어떠한 시련과 고통이 온다 해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그 사랑을 지킨다. 로마서 8: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고 했다. 그렇다. 주의 사랑을 한 번 경험하면 결코 주님을 떠날 수 없다. 세상 마귀의 권세가 제아무리 날뛰어도 사랑하는 주님을 배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와 함께 죽을지언정 갈라 설 수는 없다. 아니 갈라 세울 그 어떤 세력도 없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주의 사랑을 한 번 경험하면 어떻게 그의 삶이 변화되는지를 살펴 보고져 한다.
1.주를 사랑하게 된다. 본문 2절에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거듭난 새 생명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한다. 마치 어린 애기가 젖을 찾는 것밖에 할 줄 모르듯, 신령한 젖을 사모한다. 여기서 “신령한 젖”이라 함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뜻한다. “신령한”이란 말의 원어인 “λογικ”의 어근이 “λγο”(말씀)이다. “신령한 젖”이란 바로 “말씀의 젖”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신령한 젖이다. 곧 생명의 양식이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Incarnation)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주님이 바로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양식”이라고 했다(요6:55)
1.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본문 2절에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 되는 영혼 구원만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믿음이 자라 가고, 또 부활과 변화로 우리의 육신까지 완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말씀의 등불이 인도한다.
2.주의 인자하심을 맛보게 된다 본문 3절에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했다. 주의 인자 곧 은혜와 긍휼과 사랑이다. 우리 성도들은 이런 주의 인자하심을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되고, 알게 되고, 맛보게 된다. 말씀을 떠나서는 인자하심을 맛볼 수 없다. 우리 주님은 말씀 그 자체로서 말씀 안에 계신 분이요, 말씀밖에 거하시지 않는다.
3.신령한 집으로 세워져 가고 본문 5절에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고 했다. 신령한 젖을 사모하고 주를 사랑하는 가운데 우리 성도들은 주의 거하실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 간다. 주 안에서 성도들이 연합하여 주의 몸된 제단을 이룬다. 곧 신령한 집이다. 산 돌(Living Stone)이신 예수께 나아와 산 돌들(Living Stones)이 되어 “모퉁이의 머릿돌”이신 예수 위에 놓이고, 쌓여서 성전을 이루어 간다. 온 우주적인 교회요, 하나밖에 없는 보이지 않는 신령한 교회이다.
4.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 본문 5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고 했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 우리의 드리는 예배가 이러한가를 먼저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는 어떤 예배인가 신령한 예배라고 했다(요4:23-24) 바로 어린 애기가 젖을 사모함 같이 전심으로 주를 찾는 예배이다(렘29:13) 주를 사모하는 예배이다. 여러분 갓난아기가 젖을 찾을 때 무엇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마도 그 무엇도 젖보다 더 귀한 것은 없을 것이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부귀영화도 그 아기에게는 소용없는 것들이요, 부질없는 것들이다. 돈을 쥐어 주어 보라. 맛난 음식을 주어 보라. 다 소용없다. 바로 우리 성도가 이런 마음으로 주를 사모할 때, 주를 찾을 때, 신령한 예배를 드릴 수가 있게 된다. 힘써도 안된다. 애써도 안된다. 신령한 예배는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주의 사랑 한 번 경험하면 주를 사랑하게 되고, 주의 인자를 맛보게 되고, 우리의 믿음이 자라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 가고, 신령한 예배도 드리게 된다. 내 노력으로가 아닌 주의 사랑과 은총에 힘입어 신령한 예배를 드리게 된다.
2.주를 믿게 된다. 본문 7-8절에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고 했다. 주의 사랑 한 번 경험하면 주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주를 알게 되고, 주를 믿게 된다. 주를 의지하게 된다. 내가 사랑을 느낀 사람, 그 사람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1.버림받은 돌 본문 7절에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라 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되신 주님이시다. 건축자 곧 유대교의 지도자들이다. 제사장, 서기관, 바리세인들이 버린 예수를 하나님이 취하셔서 머릿돌이 되게 하셨다(행4:10-11) 이사야 53:3절에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고 했다. 멸시와 천대의 조롱 앞에 얼굴을 가리운 자 같았고, 배척을 받아 싫어 버린 바 되었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못했노라고 했다. 자기 땅에 오매 영접치 아니 했다고 한다(요1:11)2.산 돌 본문 4절에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라고 했다. 예수님을 산 돌(Living Stone)이라 했다. 사람들은 그를 버렸지만 하나님은 택하셔서 산 돌이 되게 하셨다. “산 돌”이란 살아 있는 돌이란 말이다. 생명이 있는 돌이다. 아니 생명을 주시는 돌이다.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라 했다(본문4-5절) 산 돌이신 주께 나아오는 자는 그 또한 산 돌이 된다고 한다. 이런 산 돌들이 모여 신령한 집을 세운다. 예수님을 가리켜 돌이라는 표현이 많다. 모퉁이 돌(엡2:20), 머릿돌(마21:42), 신령한 반석(고전10:4), 부딪히는 돌(본문8절)이라 했다. 다니엘 2:34절의 뜨인 돌도 예수님을 가리킨다. 이렇게 예수님을 가리킬 때는 단수로 표현되나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와 돌이 되는 “너희도 산 돌 같이”의 돌은 λθοι로 복수이다. 곧 주님 앞에 찾아 나아온 한 사람, 한 사람이 산 돌이 되어 “산 돌들”을 이루고, 이 돌들이 모여 신령한 집 곧 주의 거하실 성전을 이룬다.
3.보배로운 돌 본문 4절에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라고 했다. 보배가 될 수 있는 여건은 희귀성이다. 곧 “보배롭다”는 것은 “귀하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많지 않다는 뜻이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단 하나뿐인 것이다. “산 돌”이신 예수가 가장 보배로운 돌이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인 구주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4:12절에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다.
4.모퉁이 돌 본문 6절에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고 했다. “모퉁이 돌”이란 바로 건축시에 네 모퉁이에 놓는 기초석으로 그 중에서도 주님은 머릿돌이라 했다. 이는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주를 찾아 나아와 “산돌들”이 된 우리 성도들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 가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주의 몸된 제단을 이루어 간다는 말이다. 모퉁이의 머릿돌(본문7절)이신 예수 위에 “산 돌들”인 성도들이 첩놓임으로 성전을 이룬다.
그러므로 머릿돌이 없으면 건물이 무너진다. 그래서 보배롭고 요긴한 돌이라고 했다. 5.심판의 돌 본문 6-8절에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고 했다. 하나님이 시온에 둔 그 돌이 믿는 자에겐 구원의 반석이 되는 보배이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거치는 반석이 되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리라고 한다. 다니엘 2:34-35절에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고 했다. 심판주 되신(요5:22) 주님의 모습이다.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한 뜨인 돌이 우상의 신상을 부숴뜨린다. 금, 은, 동, 철, 목, 석 우상이 부숴져 타작 마당의 겨같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다. 주의 사랑 한 번 경험하면 주를 믿게 된다. 남들이 버린 돌이지만 알고 보면 그는 실로 “산 돌”이다.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의 머릿돌이요, 심판의 돌이다. 믿는 자에게는 보배로운 구원의 반석이나 믿지 않는 자에게는 거치는 반석이 되어 걸려 넘어지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주의 사랑 한 번 경험하면 남들이 버린 돌이라도 그 돌이 “산 돌”이요, 보배임을 깨닫게 된다.
3.주를 전하게 된다. 본문 9절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주의 사랑 한 번 경험하면 그 사랑으로 인해, 그 구원의 은총으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이 넘친다. 가슴 속에서 솟아오르는 기쁨은 내 가슴 속에, 내 입 속에 머물러 있지를 못하고 흘러 넘친다. 다시 말해서 남에게 말하게 되고, 자랑하게 되고, 결국은 선전하게 곧 주를 증거하게 된다. 주의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그 기쁨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지난날 남들을 보고 욕했던 자신이 똑같은 말을 오늘 하고 있노라고 한다.
1.어두운데서 불러 내심 본문 9절에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에베소 5:8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다. 어두운데가 어디인가 전에 있던 곳이다. 곧 주를 믿기 전에 거하던 곳이다. 그 곳은 무지와 우상숭배, 부도덕과 무질서의 생활이요, 인간의 욕망이 소용돌이치는 곳이요, 참 생명은 없는 곳이다.
2.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본문 9절에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참으로 기이한 빛이다. 세상의 빛이 아니다. 세상이 주는 빛이 아니다. 세상의 빛은 내 육신의 눈에 빛을 주지만, 내 영혼 깊숙한 곳에는 빛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내 영혼이 어둠 속에 방황했다. 에베소 5:8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다. 주의 사랑 한 번 경험하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된다. 아니 빛 되신 주님을 내 마음 속에 영접함으로 기이한 빛이 내 심령 속에 임한다. 순간 어두움은 사라지고 밝은 빛에 거하게 된다. 진리의 빛이요, 영광의 빛이요, 생명의 빛이다. 참으로 기이한 빛이다. 이 빛이 임하고 나니 전에는 어두움의 자식이더니 이제는 빛의 자녀요,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이다. 이 놀라운 사실을 어찌 가슴에 묻어 두고 숨길 수 있겠는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고, 남에게 자랑할 수밖에 없고, 남에게 전할 수밖에 없다. 곧 주의 놀라운 은총을 간증할 수밖에 없다.
3.아름다운 덕 본문 9절에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덕은 나의 덕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덕이다. 나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 곧 하나님의 덕이다. 다시 말해서 나를 죄악에서 구속하여 구원해 주신 아름다운 덕이다.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은 바로 생명이요 사랑이다. 아름다운 꽃 한 송이. 그것이 아름다움은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이 없어 시들고, 말라 죽으면 꽃의 아름다움도 찾아볼 수 없다. 어머니의 품속에서 젖을 먹는 애기, 어머니의 품속에서 새근새근 잠자는 아이.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거기에 어머니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풍성한 식탁은 아니더라도 아침과 저녁에 온 가족이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시면 여기가 바로 인간의 낙원이라 하지 않는가. 왜 거기에 한 가족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생명과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 이 아름다운 생명과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다.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 지신 사랑이요, 60-70 살다가 죽을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이 감격! 이 감사! 어찌 가슴속에 나 혼자만의 것으로 묻어 둘 수 있겠는가 밖으로 튀어나올 수밖에. 그래서 남에게 말하게 되고, 남에게 자랑하게 되고, 선전하게 된다. 곧 주의 아름다운 덕을 전하게 된다.
4.삶의 변화가 온다 주의 사랑 한 번 경험하면 경험하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현저하게 달라진다. 삶의 목적이 달라지고, 삶의 목표가 달라진다. 자기 중심의 삶에서 주님 중심의 삶이 된다. 자기를 위해 살던 삶이 남을 더 생각하는 삶이 된다.
1.육체의 정욕을 제어 본문 1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했다. 육체의 정욕은 영혼을 거스린다. 곧 육체의 소욕은 성령님을 거스리고, 성령님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린다(갈5:17) 우리의 육체는 하나님께 징벌 받은 육체요, 저주받은 육체이기에(창3:19) 영혼을 거스려 싸우고, 성령님을 거스려 싸운다.
그러므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 육신에 속해 있는 자들은 육체의 소욕을 제어할 수 없다. 그러나 주의 사랑 한 번 경험하면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게 된다. 거룩함으로 지음 받은 새 사람이 되어, 새 사람으로 살아갈 때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 성도가 이방인 중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지만 행실을 선하게 가지게 된다. 예수 믿는다고 온갖 욕설로 비난과 비방을 하던 저 이방인들로 너희의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의 삶의 목표요, 변화된 삶이다.
2.얻은 자유로 악을 가리우지 말라 본문 16절에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했다. 주의 사랑 한 번 경험하면 지금까지의 삶을 청산하고 주께 속한 자 되어 새 사람이 된다. 곧 죄의 종노릇 하던데서 해방이 되어 참 자유를 얻었다(요8:34-36) 그러나 이 자유로 죄악을 가리우지 말라고 한다(갈5:13) 자유의 남용은 곧 방종이 된다. 자유와 방종은 엄연히 다르다. 방종은 한 마디로 무질서이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다(고전14:33) 곧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했다(본문16절) 곧 질서의 하나님, 그 하나님의 종이 되라고 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했다(갈5:13)3.고난도 참음 보문 20절에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했다. 그렇다. 나의 죄로 인해 매를 맞는다면 무슨 칭찬이 있겠는가. 오히려 욕이 돌아오겠지.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주를 위해 고난을 받고 참으면 칭찬이 있고, 하나님의 상급이 있다. 주의 사랑 한 번 경험하면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고, 주를 위해 이겨낸다. 주께서 친히 본을 보이신 발자취를 따라 고난을 참고 이겨낸다. 우리 성도가 주의 발자취를 따라 고난을 참고, 슬픔을 참고 이겨내려 할 때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주께서 도우신다. 주님은 자기를 사랑하며 그 발자취 따르는 이를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 외면치 않으신다. 저 스데반을 보라.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외치지 않는가. 당신의 발자취 따르는 이를 도우시는 주님,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실 수 없어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다”고 했다. 나를 지키시고 도우시는 주님은 바로 이런 사랑의 주님이시다.
4.결코 방황치 않는다 본문 25절에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고 했다. 주의 사랑 한 번 경험하면 다시는 길 잃은 양이 되지 않는다. 내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 되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주의 사랑을 모르고 내 마음대로 고집하며 살던 지난 날에는 각기 제 길로 가는 양과 같이(사53:6) 길을 잃고 헤매었다. 그러나 이제는 결코 방황치 않는다. 내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 되신 주님이 늘 나와 함께 동행하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의 사랑 한 번 경험하면 우리의 삶이 변화된다. 나를 버리고 주를 위해 살며,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성령님의 소욕을 따라 살게 된다. 죄에서 해방된 자유로 악을 가리우지 않고, 오히려 그 자유로 인해 찾아오는 핍박과 고난을 참고 이겨낸다. 그 고난이 아무리 견디기 힘들어도, 무고하고 애매해도 도우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결코 방황치 않는다. 부활의 산 소망을 주셨기에 최후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결코 질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다. 잊지 말라! 최후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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