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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 (엡4:17-24)

본문

오늘 본문 말씀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 중에서 “벗어 버려야 할 옛 사람”의 삶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벗어 버려야 할 옛 사람”의 삶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것이다. 에베소 2:12-13절에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는 7중으로 중간에 막힌 담이 있다고 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허물어뜨릴 수 없는 두꺼운 담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여시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로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셨다. 이것이 복음이요 구원의 길이다. 이 복음을 외면하고, 이 구원의 길을 외면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지 않으며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가 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의 삶의 모습을 살펴 보고져 한다.
1.마음이 허망해진다. 본문 17절에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고 했다. 벗어 버려야 할 옛 사람 곧 이방인의 삶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인생무상을 노래하는 허무주의이다. 여기의 허망하다는 말은 “꽃은 피어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 “순간적 쾌락은 있어도 영원한 만족은 없다”는 말이다.
1.소망이 없음 허무주의는 모든 것이 무(無)로 끝난다. 인생무상을 노래하며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 ”라고 부르짖는다(사22:13, 고전15:32) 내일의 삶이 없고 “내일 죽으리니” 다시말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소망 없는 자이다.
2.한번 죽는 인생 히브리서 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다. 사람이 한번 태어나 살다가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다.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당연한 말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고” 하는…. 수많은 반복 속에 세대(世代)가 바뀌고, 그 속에서 역사가 흐르고 있다. 우리의 이전 세대가 역사의 시공(時空) 속으로 흘러가고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짐 같이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고 했다(전1:11) 그래서 해 아래는 새 것이 없고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고 했다(전1:9) 그러니 허망하다는 것이다.
3.삶에 대한 심판 히브리서 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는 사람이 태어나 한번 죽는 게 정한 것이라는데만 관심이 있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는 말씀에는 외면한다. 삶에 대한 심판이 있다는 것은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곧 사후(死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말이다. 심판은 진리에 의해 되어진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인간이 아무리 부정해도 진리 그 자체는 여전히 그대로 존재한다. 아무리 왜곡시키려 해도 진리 그 자체는 여전히 그대로 변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간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길은 아니다. 그 길이 생명의 길이 아니라면 비록 나 혼자일지라도 생명의 길을 가야 한다(마7:13-14) 본문 20절에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다. 예수 안에 있는 진리의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의 삶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말씀이다(본문21-24)
2.마음이 어두워진다. 본문 18절에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했다. 총명이란 말은 마음의 한 가운데로 이해력, 사고력, 판단력을 말한다. 어두워진다는 것은 창조 이전의 상태로(창1:2)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이 없는 상태이다(요1:4)
1.무질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곧 마음이 어두움 속에 헤매이는 자는 혼돈과 공허 바로 무질서의 삶이 되고 만다(창1:2)
2.무지. 로마서 1:19-20절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모든 사람에게 있고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창조하신 만물에 분명히 알 수 있다고 했다. 실상은 하나님을 알지만 그 생각이 허망하여 마음이 어두워져서 우준(愚蠢)하게 되었다고 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3.마음이 굳어짐 도덕적, 신앙적 양심이 무디어져서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지는 상태이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믿음에서 떠나간다. 딤전 4:1-2절에 성령님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쫓으리라고 했다. 성령님이 밝히 말씀하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양심에 화인 맞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의 소리에 성도의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되겠다.
3.마음에 감각이 없어진다. 본문 19절에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라고 했다. 우리 몸에 군살이 붙으면 감각이 무디어지고 없어진다. 양심이 화인 맞고 군살이 붙어 그 마음이 굳어진 사람은 마음에 감각이 없다. 죄에 대해서도 무감각하고, 불의에 대해서도 부도덕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진다. 사고력과 판단력은 마비되고 다만 감정에 치우쳐 깊은 욕망의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
1.방탕한 생활 본문 19절에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라고 했다. 허랑방탕한 생활 하면 바로 누가 15장의 탕자가 떠오른다. 탕자의 잘못된 삶의 출발은 바로 아버지의 곁을 떠남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방탕한 생활의 끝은 아버지께 물려받은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가산의 탕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도 술, 도박, 춤 등으로 폐인이 된 이들을 볼 수 있다.
2.더러운 욕심 본문 19절에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라고 했다. 방탕한 생활에 빠진 자의 특성이 바로 감정에 치우쳐 더러운 욕심에 얽매이는 것이다. 감정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자는 더 큰 욕망의 노예가 될 뿐 만족은 없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한다고 했다(전1:8)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는 양심적으로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그 마음에 감각이 없다. 이유는 그 심령 속에 생명이 없고 빛이 없기 때문이다. 그 심령이 어둠 속에 빠져 있고 잠자고 있기 때문이다. 내일이 없고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산 소망이 넘치는 기쁨과 즐거움은 없고 삶이 허망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는 것은 이처럼 엄청난 불행임을 우리 성도는 알아야 한다. 성령님이 밝히 하시는 말씀을 기억하자.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딤전4:1) 나는 지금 하나님 아버지의 곁을 떠나고 있지 않는지. 생명의 빛 되신 주님을 멀리하고 있지나 않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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