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가 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고 (행2:1-47)
본문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오순절에 성령님이 임하시고, 그 성령님의 역사로 영혼 구원, 방언, 이적과 기사가 일어나고, 초대 교회 운동이 시작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 초대 교회는 모든 문제가 해결 되어지는 놀라운 교회의 본래의 모습을 보여 준다. 영혼이 구원을 얻고, 유무상통(有無相通)의 삶이 이루어지고, 서로 교제하고, 마음을 같이하고,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와 찬송이 있고, 기쁨과 즐거움이 있고, 남들의 칭찬이 있었다. 오늘날의 교회도 이런 모습인가 형제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고, 형제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고 있는가 형제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형제의 즐거움이 나의 즐거움이 되고 있는가 우리는 가끔 주일이 더 “고되다”는 불평의 소리를 듣게 된다. 안식해야 할 날에 안식하지 못하고 더 바쁘고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억지가 되고 모이기가 시들해 진다고 한다.
마음의 평화와 안식, 기쁨과 즐거움은 고사하고, 더욱 마음에 무거운 짐만 안고 돌아가게 된다고 한다. 분명 교회의 본래의 모습은 아니다. 어떤 어려운 문제를 안고 찾아온 사람도 그 문제의 해결을 받고 돌아가는 교회, 무거운 발걸음으로 찾아 나왔지만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교회, 괴로운 마음으로 찾아왔다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교회…. 이것이 아마도 교회 본래의 모습일텐데. 이것이 초대 교회의 모습인데.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초대 교회의 모습을 묵상하며, 우리의 부족한 점들을 찾아 고치고 채움으로 교회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져 하는 마음의 다짐을 하자. 오늘 본문의 초대 교회는 오순절에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오순절은 무교절에 그 해에 농사한 보리의 첫 단을 요제로 드린 날부터 50일, 오순(五旬)에 지키는 절기이다. 무교절이 유월절을 포함하고 있었기에 대개는 유월절 후 50일이 되기도 한다. 이 유월절 후 50일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에 도착한 날이다. 하나님의 말씀, 곧 십계명과 율법과 규례를 받은 날이다. 이 날에 또 성령님을 주신 것이다.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한 마리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유월절에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신 예수님, 그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가야 함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그 오순절 날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에게 성령님이 임하시니 저희가 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다.
1.약속대로 받은 성령님이다.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주신다는 약속을 하셨다. 성령님이 어느 날 갑자기 임한 그런 것이 아니다.
⑴.살아 계실 때의 약속 요한복음 14:16-17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했다. 요한복음 14:26절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했다. 요한복음 16:7절에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은 나는 너희와 함께 있지 못하지만 성령님은 영원히 너희 속에 함께 거하신다고 하신다. 그는 진리의 영으로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신다. 내가 가야 그를 보낼 터이므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하셨다.
⑵.승천하시기 전 약속대로 사도행전 1:4절에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했다. 사도행전 1:8절에 “오직 성령님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다. 성령님의 강림은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다. 그 약속대로 예루살렘에 임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이다.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났다. 부활의 주님이 다시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모으셨다. 승천 후에 또 떠나버릴 그들을 염려하심이리라. 다짐에 다짐을 두시는 모습이다.
⑶.선지자의 예언대로 본문16-17절에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했다. 하나님이 요엘 선지자에게 주셨던 말씀대로 성령님을 부어 주셨다. 성경을 응하게 하신 것이다. 그 성령님의 역사로 예언도, 환상도, 꿈도, 이적과 기사도 일어났다.
2.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기 시작했다 본문 4절에 “저희가 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님 역사의 첫 모습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령님의 “충만”은 “차고 넘친다”는 뜻이다. 컵에 물이 가득찬 상태가 아니라 “흘러 넘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 충만”은 온통 성령님으로 뒤덮인 상태를 말한다. 에스겔 47장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에서 보듯, 발목, 무릎, 허리,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창일한 강물이 되었다. 곧 온전히 잠겨 버렸다는 것이다. 사람으로서는 능히 어쩔 수 없는 강물의 뒤덮임이다. 바로 “충만한 상태”이다. 내 육신의 자아가 온전히 죽어질 때를 말한다. 아브라함을 두고 보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을 때(롬4:19), 그때가 바로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시는 때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요소가 완전히 사라질 때, 능히 아무것도 더 할 수 없을 때, 그때가 바로 성령님 충만한 때이다. “성령님 충만”과 내재(內在)는 다르다. 발목이 잠긴 상태도, 무릎이 잠긴 상태도, 허리가 잠긴 상태도 분명 성령님 받은 상태이다. 그러나 “성령님 충만”의 상태는 아니다. 이렇게 자신의 인간적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어질 때, 곧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⑴.하나님의 큰 일 본문 11절에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라고 했다. 저희가 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기를 시작했을 때 저들은 기탄없이 막힘이 없이 외쳤다(행4:13). 본래부터 학문이 없는 자임을 듣는 자들이 더 잘 알고 있다.
더군다나 사람을 두려워하여 문을 걸어 잠그고 방속에 숨어 있었던 저들이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 뵙고도 의심하던 저들이다(마28:17). 주님께서도 승천하시고 나면 또 떠날 것 같아 못 믿어워 하시던 저들이다(행1:4) 그러나 저들도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니,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기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약속하신 성령님을 아버지께 받아 부어 주신 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부르짖는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는 기탄없는 외침이다. 죽음도 불사하는 외침이다.
⑵.다른 방언으로 본문 4절에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했다.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오순절을 지키려 예루살렘에 와 있었다. 이들이 각기 자기가 태어나 살고 있는 곳의 말로 하나님의 큰 일을 듣게 하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어디 그뿐인가, 이적과 기사가 나타났다. 성전 미문 앞의 앉은뱅이가 일어나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고(행3:8),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였다(행4:31). 병든 자, 더러운 귀신 들린 자가 고침을 받았고,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는 소망으로 나음을 얻었다(행5:15).
⑶.큰 소동 본문 6절에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라고 했다. 오순절 절기를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큰 무리들, 저들 앞에 난생 처음의 크고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저희가 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적어도 15개국 이상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한 증거를 들었다. 저들이 아는 대로 이 제자들은 다 갈릴리 사람들이다. 본래 학문이 없는 보통 사람들이다. 이 놀라운 일에 주역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오히려 자기들 보다 더 촌놈이요, 어부들이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저들은 깜짝 놀라 큰 소동을 벌인다,
1.기이히 여긴다→ 이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2.경탄한다→ 우리가 우리 각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다니.
3.의혹한다→ 서로를 쳐다보며 이 어찐 일이냐
4.조롱한다→ 새 술에 취하였다. 5.어찌할꼬→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2:37) 저희가 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베드로가 준 대답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했다(행2:38-39). 이 패역한 세대에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전하진 복음을 듣고,
3,000명, 5,000명의 영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 놀라운 역사이다. 놀랍고 놀라운 예루살렘 교회를 향하신 축복이다. 성령님 충만한 초대 교회의 모습이다. 이럴 두고 “성령님 폭발”이라고 한다. 우리는 가끔 부흥 집회의 포스터에서 낯설지 않는 “성령님 폭발”이란 단어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성령님 충만”, “능력 충만”을 외친다. “불의 사자”, “신유의 사자”, “말씀의 사자”를 만나게 된다. 너무나 많은 사자들이 줄을 서 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성령님 역사가 마치 “성령님 폭발”로만 비쳐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령님의 역사는 “폭발”로만 나타난 게 아니다.
성령님 역사에는 성공만 있고, 다이너마이트 같은 어마어마한 폭발력만 있는 게 아니다.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그들은 말하였고, 성령님의 역사는 듣는 이의 심령을 찔러 쪼개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 회개의 역사는
3,000명, 5,000명의 영혼 구원의 결실을 가져왔다. 참으로 놀랍고 놀라운 “성령님 폭발”의 역사이다. “성령님 폭발”을 외치는 사람들은 여기까지 만을 본다. 그 성령님 역사 그대로라면 아마도 세계는 복음화가 이미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성도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하늘 나라”가 와버렸을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숫자가 많아지고 단체가 커지니 인간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위선(행5:1-2), 히브리파 사람들을 향한 헬라파 유대인들의 원망(행6:1), 성령님 충만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이다. 결코 “성령님 폭발”적인 성령님 역사의 모습은 아니다. 성령님 충만한(행7:55) 스데반의 설교!
“성령님 폭발”의 역사는 어디로 가고 돌 세례를 받아 돌무더기가 되어야 했던가 단 한 명의 “영혼 구원”도 없었다.
그렇다면 스데반의 설교는 완전 실패작인가 사도행전 2:37절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 했다. 사도행전 7:54절에 “저희가 이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이라고 했다. 다같은 성령님의 충만한 설교인데, 그 반응은 정반대로 일어난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듣는 이의 마음을 찔러 쪼갠 역사는 같은데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정반대의 현상이다. 이것이 성경이 전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성령님 운동”이요, “성령님 역사”이다. 그 예루살렘 교회의 “성령님 역사” 속에는 시련이 있었고, 고통이 있었고, 고난도 있었다. 스데반과 야고보와 같은 순교도 있었다. 네 것, 내 것이 없는 유무상통의 사랑 속에서도 소외 계층이 있었고, 이로인한 원망도 있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서도 명예를 쫓고, 체면을 차려야 하고, 또 실속도 챙겨야 하는 위선도 있었다. 모두가 다 인간의 집단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인간의 냄새요, 죄악으로 부패한 썩은 냄새이다. 결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는 할 수 없다(고후2:15). 이 모습이 어찌 “성령님 폭발”의 모습인가 “성령님 충만”, “성령님 폭발”은 쉽게 이루어질 수도, 또 사용되어질 수도 있는 말이 아니다. 발목도 아니요, 무릎도 아니요, 허리도 아니요, 전신이 잠기워진 자만이 “성령님 충만”을 말할 수 있다. 소외 계층이 생기고, 원망이 있고, 명예욕이 있고, 체면치레의 외식이 있고, 실속을 챙기는 위선이 있는 곳에 “성령님 충만”은 이루어질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요소가 남아 있는 한 “성령님 폭발”은 없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령님 충만”도 인간 냄새가 섞이면서 희석이 되고, 충만의 역사가 그치게 된다. 된서리를 맞게 된다. 숫자가 늘어가고, 조직이 비대해지면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닌 인간 냄새를 풍기는 예루살렘 교회를 흩으신다.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과 박해, 순교로 내리치시니 산산 조각이 난다. 그 조각이 흩어져 “디아스포라” 곧 “흩어진 나그네” 운동으로 변한다(벧전1:1).
이것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로 향하는 성령님 운동이요, 교회 운동이다. 오늘의 교계의 흐름은 교회가 교회다운 일을 하려면 대형화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수 천, 수 만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수 십만을 부르짖는다. 머지 않아 수 백만의 목표도 나오리라. 그래서 대형화를 이룬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요, 능력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이 축복한 사람이 된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요, 무능한 사람이 된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인가 의구심도 받게 된다. “목회자는 그 열매로 말을 한다” 이것이 같은 목회자인 동역자의 세계에서도, 평신도의 세계에서도, 일반 사회인의 세계에서도 한 사람의 목회자를 평가하는 잣대가 되고 있다. 어느 목사님의 은퇴식 예배에 참석하여, 스스로를 “실패한 자”로 말씀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하나님, 이 잣대가 당신의 잣대입니까”하는 물음을 되뇌이곤 했다. “성령님 충만”, 그것은 무릎이 잠긴 자가 발목 잠긴 자를, 허리까지 잠긴 자가 무릎 잠긴 자를 업신여기고 조롱할 수 있는 특권이 아니다. 똑 같은 인간적 요소가 남아 있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닌 인간 냄새를 풍기는 교회이다. “성령님 충만”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성령님 충만”, 그것은 온전히 인간적인 요소가 사라질 때를 말한다. “베드로의 성령님 충만”만이 성령님 충만이 아니다.
3,000명, 5,000멍의 구원 역사만이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다. 거기에만 기쁨이 있는 게 아니다. “스데반의 성령님 충만”도 분명 성령님 충만이다. 단 한 명의 영혼 구원은 고사하고 돌 세례를 받아 돌무더기가 되는 것도 성령님 역사이다. 인간적인 모든 요소가 사라진 스데반,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외치는 소리,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여기에도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소망이 있고, 찬양이 있다. 그뿐인가, 용서도 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분명 실패자의 외침이 아니다. 오히려 승리의 개가(凱歌)이리라. 저희가 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삶을 살아가자. 인간적인 모든 요소를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자. 그 주님만이 나를 받아 주실 분이시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스데반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시던 주님, 그 주님만을 나의 마지막을 부탁할 분으로 바라보며 살아가자.
마음의 평화와 안식, 기쁨과 즐거움은 고사하고, 더욱 마음에 무거운 짐만 안고 돌아가게 된다고 한다. 분명 교회의 본래의 모습은 아니다. 어떤 어려운 문제를 안고 찾아온 사람도 그 문제의 해결을 받고 돌아가는 교회, 무거운 발걸음으로 찾아 나왔지만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교회, 괴로운 마음으로 찾아왔다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교회…. 이것이 아마도 교회 본래의 모습일텐데. 이것이 초대 교회의 모습인데.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초대 교회의 모습을 묵상하며, 우리의 부족한 점들을 찾아 고치고 채움으로 교회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져 하는 마음의 다짐을 하자. 오늘 본문의 초대 교회는 오순절에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오순절은 무교절에 그 해에 농사한 보리의 첫 단을 요제로 드린 날부터 50일, 오순(五旬)에 지키는 절기이다. 무교절이 유월절을 포함하고 있었기에 대개는 유월절 후 50일이 되기도 한다. 이 유월절 후 50일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에 도착한 날이다. 하나님의 말씀, 곧 십계명과 율법과 규례를 받은 날이다. 이 날에 또 성령님을 주신 것이다.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한 마리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유월절에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신 예수님, 그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가야 함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그 오순절 날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에게 성령님이 임하시니 저희가 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다.
1.약속대로 받은 성령님이다.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주신다는 약속을 하셨다. 성령님이 어느 날 갑자기 임한 그런 것이 아니다.
⑴.살아 계실 때의 약속 요한복음 14:16-17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했다. 요한복음 14:26절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했다. 요한복음 16:7절에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은 나는 너희와 함께 있지 못하지만 성령님은 영원히 너희 속에 함께 거하신다고 하신다. 그는 진리의 영으로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신다. 내가 가야 그를 보낼 터이므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하셨다.
⑵.승천하시기 전 약속대로 사도행전 1:4절에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했다. 사도행전 1:8절에 “오직 성령님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다. 성령님의 강림은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다. 그 약속대로 예루살렘에 임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이다.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났다. 부활의 주님이 다시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모으셨다. 승천 후에 또 떠나버릴 그들을 염려하심이리라. 다짐에 다짐을 두시는 모습이다.
⑶.선지자의 예언대로 본문16-17절에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했다. 하나님이 요엘 선지자에게 주셨던 말씀대로 성령님을 부어 주셨다. 성경을 응하게 하신 것이다. 그 성령님의 역사로 예언도, 환상도, 꿈도, 이적과 기사도 일어났다.
2.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기 시작했다 본문 4절에 “저희가 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님 역사의 첫 모습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령님의 “충만”은 “차고 넘친다”는 뜻이다. 컵에 물이 가득찬 상태가 아니라 “흘러 넘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 충만”은 온통 성령님으로 뒤덮인 상태를 말한다. 에스겔 47장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에서 보듯, 발목, 무릎, 허리,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창일한 강물이 되었다. 곧 온전히 잠겨 버렸다는 것이다. 사람으로서는 능히 어쩔 수 없는 강물의 뒤덮임이다. 바로 “충만한 상태”이다. 내 육신의 자아가 온전히 죽어질 때를 말한다. 아브라함을 두고 보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을 때(롬4:19), 그때가 바로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시는 때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요소가 완전히 사라질 때, 능히 아무것도 더 할 수 없을 때, 그때가 바로 성령님 충만한 때이다. “성령님 충만”과 내재(內在)는 다르다. 발목이 잠긴 상태도, 무릎이 잠긴 상태도, 허리가 잠긴 상태도 분명 성령님 받은 상태이다. 그러나 “성령님 충만”의 상태는 아니다. 이렇게 자신의 인간적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어질 때, 곧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⑴.하나님의 큰 일 본문 11절에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라고 했다. 저희가 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기를 시작했을 때 저들은 기탄없이 막힘이 없이 외쳤다(행4:13). 본래부터 학문이 없는 자임을 듣는 자들이 더 잘 알고 있다.
더군다나 사람을 두려워하여 문을 걸어 잠그고 방속에 숨어 있었던 저들이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 뵙고도 의심하던 저들이다(마28:17). 주님께서도 승천하시고 나면 또 떠날 것 같아 못 믿어워 하시던 저들이다(행1:4) 그러나 저들도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니,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기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약속하신 성령님을 아버지께 받아 부어 주신 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부르짖는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는 기탄없는 외침이다. 죽음도 불사하는 외침이다.
⑵.다른 방언으로 본문 4절에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했다.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오순절을 지키려 예루살렘에 와 있었다. 이들이 각기 자기가 태어나 살고 있는 곳의 말로 하나님의 큰 일을 듣게 하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어디 그뿐인가, 이적과 기사가 나타났다. 성전 미문 앞의 앉은뱅이가 일어나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고(행3:8),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였다(행4:31). 병든 자, 더러운 귀신 들린 자가 고침을 받았고,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는 소망으로 나음을 얻었다(행5:15).
⑶.큰 소동 본문 6절에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라고 했다. 오순절 절기를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큰 무리들, 저들 앞에 난생 처음의 크고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저희가 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적어도 15개국 이상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한 증거를 들었다. 저들이 아는 대로 이 제자들은 다 갈릴리 사람들이다. 본래 학문이 없는 보통 사람들이다. 이 놀라운 일에 주역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오히려 자기들 보다 더 촌놈이요, 어부들이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저들은 깜짝 놀라 큰 소동을 벌인다,
1.기이히 여긴다→ 이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2.경탄한다→ 우리가 우리 각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다니.
3.의혹한다→ 서로를 쳐다보며 이 어찐 일이냐
4.조롱한다→ 새 술에 취하였다. 5.어찌할꼬→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2:37) 저희가 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베드로가 준 대답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했다(행2:38-39). 이 패역한 세대에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전하진 복음을 듣고,
3,000명, 5,000명의 영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 놀라운 역사이다. 놀랍고 놀라운 예루살렘 교회를 향하신 축복이다. 성령님 충만한 초대 교회의 모습이다. 이럴 두고 “성령님 폭발”이라고 한다. 우리는 가끔 부흥 집회의 포스터에서 낯설지 않는 “성령님 폭발”이란 단어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성령님 충만”, “능력 충만”을 외친다. “불의 사자”, “신유의 사자”, “말씀의 사자”를 만나게 된다. 너무나 많은 사자들이 줄을 서 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성령님 역사가 마치 “성령님 폭발”로만 비쳐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령님의 역사는 “폭발”로만 나타난 게 아니다.
성령님 역사에는 성공만 있고, 다이너마이트 같은 어마어마한 폭발력만 있는 게 아니다.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그들은 말하였고, 성령님의 역사는 듣는 이의 심령을 찔러 쪼개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 회개의 역사는
3,000명, 5,000명의 영혼 구원의 결실을 가져왔다. 참으로 놀랍고 놀라운 “성령님 폭발”의 역사이다. “성령님 폭발”을 외치는 사람들은 여기까지 만을 본다. 그 성령님 역사 그대로라면 아마도 세계는 복음화가 이미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성도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하늘 나라”가 와버렸을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숫자가 많아지고 단체가 커지니 인간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위선(행5:1-2), 히브리파 사람들을 향한 헬라파 유대인들의 원망(행6:1), 성령님 충만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이다. 결코 “성령님 폭발”적인 성령님 역사의 모습은 아니다. 성령님 충만한(행7:55) 스데반의 설교!
“성령님 폭발”의 역사는 어디로 가고 돌 세례를 받아 돌무더기가 되어야 했던가 단 한 명의 “영혼 구원”도 없었다.
그렇다면 스데반의 설교는 완전 실패작인가 사도행전 2:37절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 했다. 사도행전 7:54절에 “저희가 이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이라고 했다. 다같은 성령님의 충만한 설교인데, 그 반응은 정반대로 일어난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듣는 이의 마음을 찔러 쪼갠 역사는 같은데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정반대의 현상이다. 이것이 성경이 전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성령님 운동”이요, “성령님 역사”이다. 그 예루살렘 교회의 “성령님 역사” 속에는 시련이 있었고, 고통이 있었고, 고난도 있었다. 스데반과 야고보와 같은 순교도 있었다. 네 것, 내 것이 없는 유무상통의 사랑 속에서도 소외 계층이 있었고, 이로인한 원망도 있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서도 명예를 쫓고, 체면을 차려야 하고, 또 실속도 챙겨야 하는 위선도 있었다. 모두가 다 인간의 집단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인간의 냄새요, 죄악으로 부패한 썩은 냄새이다. 결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는 할 수 없다(고후2:15). 이 모습이 어찌 “성령님 폭발”의 모습인가 “성령님 충만”, “성령님 폭발”은 쉽게 이루어질 수도, 또 사용되어질 수도 있는 말이 아니다. 발목도 아니요, 무릎도 아니요, 허리도 아니요, 전신이 잠기워진 자만이 “성령님 충만”을 말할 수 있다. 소외 계층이 생기고, 원망이 있고, 명예욕이 있고, 체면치레의 외식이 있고, 실속을 챙기는 위선이 있는 곳에 “성령님 충만”은 이루어질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요소가 남아 있는 한 “성령님 폭발”은 없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령님 충만”도 인간 냄새가 섞이면서 희석이 되고, 충만의 역사가 그치게 된다. 된서리를 맞게 된다. 숫자가 늘어가고, 조직이 비대해지면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닌 인간 냄새를 풍기는 예루살렘 교회를 흩으신다.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과 박해, 순교로 내리치시니 산산 조각이 난다. 그 조각이 흩어져 “디아스포라” 곧 “흩어진 나그네” 운동으로 변한다(벧전1:1).
이것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로 향하는 성령님 운동이요, 교회 운동이다. 오늘의 교계의 흐름은 교회가 교회다운 일을 하려면 대형화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수 천, 수 만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수 십만을 부르짖는다. 머지 않아 수 백만의 목표도 나오리라. 그래서 대형화를 이룬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요, 능력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이 축복한 사람이 된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요, 무능한 사람이 된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인가 의구심도 받게 된다. “목회자는 그 열매로 말을 한다” 이것이 같은 목회자인 동역자의 세계에서도, 평신도의 세계에서도, 일반 사회인의 세계에서도 한 사람의 목회자를 평가하는 잣대가 되고 있다. 어느 목사님의 은퇴식 예배에 참석하여, 스스로를 “실패한 자”로 말씀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하나님, 이 잣대가 당신의 잣대입니까”하는 물음을 되뇌이곤 했다. “성령님 충만”, 그것은 무릎이 잠긴 자가 발목 잠긴 자를, 허리까지 잠긴 자가 무릎 잠긴 자를 업신여기고 조롱할 수 있는 특권이 아니다. 똑 같은 인간적 요소가 남아 있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닌 인간 냄새를 풍기는 교회이다. “성령님 충만”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성령님 충만”, 그것은 온전히 인간적인 요소가 사라질 때를 말한다. “베드로의 성령님 충만”만이 성령님 충만이 아니다.
3,000명, 5,000멍의 구원 역사만이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다. 거기에만 기쁨이 있는 게 아니다. “스데반의 성령님 충만”도 분명 성령님 충만이다. 단 한 명의 영혼 구원은 고사하고 돌 세례를 받아 돌무더기가 되는 것도 성령님 역사이다. 인간적인 모든 요소가 사라진 스데반,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외치는 소리,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여기에도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소망이 있고, 찬양이 있다. 그뿐인가, 용서도 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분명 실패자의 외침이 아니다. 오히려 승리의 개가(凱歌)이리라. 저희가 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삶을 살아가자. 인간적인 모든 요소를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자. 그 주님만이 나를 받아 주실 분이시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스데반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시던 주님, 그 주님만을 나의 마지막을 부탁할 분으로 바라보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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