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 (롬11:13-24)
본문
4월은 만물이 소생하여 우리의 산과 대지가 푸르르게 그 옷을 갈아입는 계절이다. 소생하는 계절, 그래서 식목일을 정하여 나무 심기를 한다. 어제가 바로 4월 5일 식목일이다. 우리도 한 그루의 나무를 심어 소중하게 가꾸는 마음으로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고전15:58) 식목의 계절인 4월을 맞아 산과 들 그리고 정원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으면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앞으로 10년 후, 20년 후, 30년 후, 이 나무의 모습은 어떠할까 아마도 우리 모두들 한 번 즘은 생각해 본 일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일, 구덩이를 깊게, 또 넓게 파고 돌이나 불순물을 잘 골라내고, 물을 주어 가며 뿌리가 잘 활착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아무렇게나 한다. 일일이 그것도 제대로 잘 할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힘도 든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대충대충 하고 만다. 손에 쥐어진 나무를 빨리 없애기에 급급하다. 60170년대의 사방사업에 동원된 사람들이 나무를 심는 모습이 떠오른다. 삽으로 한 삽 파고 나무를 넣고 다시 그 흙으로 묻는…. 구덩이를 고르거나 뿌리를 펴 주는 것은 오히려 사치스러울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고서도 10년 후 혹은 20년 후의 나무의 모습을 상상한다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가. 그러한 모습들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과연 살기나 할까. 그러지 말라면 “충성은 혼자 다 하는 양 나서지 말라”한다. 잘난 체 하지 말란다. 이들이 나무의 뿌리에 대해서 좀 더 잘 살펴보고, 좀 더 생각해 보고, 좀 더 잘 알았다면 그렇게 아무렇게나 대충대충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식목의 계절을 맞아 나무의 뿌리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의 버려짐과 이방의 구원을 “감람나무의 접붙임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선택과 버려짐에서 이방의 구원이라는 축복과 은혜가 주어진다. 오늘 우리는 그 주된 내용보다 “감람나무의 접붙임 비유”에서 보여 주는 “뿌리”에 대해 생각해 보고져 한다. 그 뿌리가 몸체인 나무를 위해 하는 일을 살펴보며, 주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 어떻게 봉사하며, 어떻게 충성하며, 어떤 마음 자세로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져 한다.
1.주의 몸된 제단의 뿌리 되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하자 본문 20절에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고 했다. 욥기 14:8절에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라고 했다. “뿌리”하면 흙속, 또 수염처럼 많은 잔털, 물기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높은 마음을 품지 않고 일평생을 흙속에서 살다가 죽어 간다고 일러준다. 그렇다. 뿌리는 일평생 한 번도 밝은 태양 빛을 보지 못하고, 그렇게 살다가 죽어 간다. 정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땅 위의 나무를 위해 살다가 죽어 간다. 우리 성도가 이런 충성을 주님 앞에 바쳐야 한다.
1.땅속에서 뿌리는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뿌리의 삶의 터전은 땅속이다. 그래서 땅속에서 늙고 죽는다고 했다. 뿌리의 일평생이 땅속에서 이루어진다. 땅속에서 나고, 땅속에서 자라고, 땅속에서 늙어지고, 땅속에서 주는다고 했다. 땅속 거기가 어디인가 어두운 곳이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요, 소외된 곳이요,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곳이다. 바로 뿌리의 이러한 삶처럼 주님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주어진 일에 참으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사명 감당해야 한다. 나 자신 그렇게 살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 보자.
2.밖으로 나오면 뿌리가 땅속에서의 삶을 마다하고 밖으로 나오면 어떻게 될까 어두운 땅속에서 살 수 없노라고, 나도 남들의 눈에 잘 띄는 밝은 세상에서 살고싶노라고 외치며 뛰쳐나오면 어떻게 될까. 뿌리는 밖으로 나오면 죽게 된다. 말라죽게 된다. 아니면 주인의 도끼에 잘려 불타 죽는다(마3:10) 자기만 죽느냐 아니다. 나무 전체가 말라죽게 된다. 결국 모두 함께 죽음의 길을 걷게 되고, 자신이 삶의 자리를 지키지 않음으로 남까지 죽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성도들이 주님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뛰쳐 날뛸 때, 나도 죽고 그로인해 주의 몸된 제단도 파탄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이런 일을 현실적으로 많이 보고 있다. “장로”가 무엇이기에 피택되지 않아서 난리 굿인가 말이다. “집사”가 무엇이기에 제직 임명에 빠지면 그토록 미꾸라지 짓인가 말이다. 온 도랑물을 흙탕물로 만들어 버리고, 간다 온다 말도 없이 훌쩍 떠나 버린단 말인가. 어디 그 뿐인가 목회자의 세계는 그보다 더 했으면 했지 결코 뒤지지 않는다. 총회장 감투 하나 쓰기 위해 몇 천만원은 옛 말이고, 억대를 가지고도 모자란다는 숙덕궁이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우리 모두가 식목의 계절, 이 4월에 내가 심는 한 그루 나무의 뿌리를 바라보며 깊이 자성해야 한다. 회개해야 한다. 내 잘난 맛에 소리치고 뛰쳐나오면 말라죽든(주님이 치심) 아니면 잘려 죽든(책벌) 결국 죽게 된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참으로 우리의 찬송이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 고백이어야 한다.
3.왕성한 정복력 여러분, 나무 뿌리가 뻗어 가는 모습을 살펴본 적이 있는가 정말 우리를 감탄하게 만든다. 큰 바위도 뚫고 들어가 결국 바위를 갈라놓는다. 벼랑 위 바위틈에도 한 그루 나무가 자라고, 이름 모를 한 송이 꽃이 예쁘게 피어 있는 모습을 우리는 가끔 보게 된다. 아카시아나 대나무처럼 무섭게 옆으로 뻗어 나가 주위를 삽시간에 점령해 버리기도 한다. 참으로 왕성한 정복력이다. 우리 나라의 산들이 아카시아로 뒤덮여 말이 아니다. 살기 어려웠던 시절, 그 왕성한 번식력, 정복력으로 땔감 문제를 해결하려 아카시아 나무로 사방사업을 했기 때문이다. 왕성한 정복력, 왕성한 번식력, 바로 우리 성도들이 주님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 충성해야 할 삶의 모습이다.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충성하자. 어두운 곳, 그늘진 곳, 소외된 곳,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말없이 소리 없이 우리 그렇게 충성하자.
2.주의 몸된 제단의 뿌리 되어― 보전하는 기둥이 되자 본문 18절에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고 했다. 가지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 아니라 뿌리가 가지를 보전한다는 것이다. 곧 뿌리가 몸된 나무를 보전한다는 말이다. 뿌리 없는 나무가 어찌 홀로 서 있을 수 있겠는가.
1.뿌리가 튼튼해야 나무가 잘 자라고 제대로 서 있으려면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 뿌리가 튼튼해야 비바람이 불어도 거센 폭풍이 몰아쳐도 끄떡없다. 나무가 뿌리가 튼튼하다는 것은 더없이 큰 복이다. 그렇다. 주님의 몸된 제단도 튼튼한 뿌리를 가져야 한다. 어느 교회든 튼튼한 뿌리를 가진다면 이는 큰 축복이요 은혜이다. 아니 우리 성도들은 생각을 한 차원 높여, 바로 내가 주님의 몸된 제단에 튼튼한 뿌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주의 몸된 제단을 굳게 세우는 기둥이 되어야 한다. 잠언 12:3절에 “사람이 악으로 굳게 서지 못하나니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고 했다. 우리 인생은 악으로 서지 못한다고 했다. 곧 성공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않고 굳게 선다고 했다. 곧 의로 성공한다는 것이다. 결국 인생의 성공은 의의 뿌리가 튼튼할 때 성공한다는 말씀이다. 더구나 우리 신앙인 곧 성도들의 성공은 주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 충성할 때 이루어진다. 주님의 몸된 제단에 튼튼한 뿌리가 되자. 주님의 몸된 제단이 흔들리지 않고 잘 자라도록 튼튼한 뿌리가 되어 기둥감으로 충성을 다하자.
2.깊이 박혀야 시편 80:9절에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땅에 편만하며”라고 했다. 뿌리가 튼튼하려면 깊이 박혀야 한다. 뿌리가 땅속에 깊이 묻히지 않고 얕게 심겨지면 작은 바람에도 곧 잘 넘어진다. 그 몸된 나무를 보전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뿌리의 사명을 다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뿌리는 땅속 깊이 박혀야 한다. 그 깊은 곳에 생명의 양식인 물도 풍부하게 있다. 우리도 주님의 몸된 제단의 깊은 뿌리가 되어야 한다. 자신이 속해 있는 교회가 시험에 들지 않게, 시련에 휩싸이지 않게 굳게굳게 세우는 깊은 뿌리가 되어야 한다. 주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 충성을 다하자. 욥기 1:9절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했다. 내 교회라고 시험에 빠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사탄이 하나님을 충돌질 하여 당대의 의인 욥,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욥1:8) 하나님께 인정받은 욥을 무서운 시험으로 고통과 시련의 회오리바람으로 몰아치지 않았는가. 이런 시험과 시련의 물결이 덮쳐 올 때 나는 과연 우리 교회를 흔들림 없이 굳게 지킬 수 있는 깊은 뿌리가 될 수 있을까. 주의 몸된 제단을 보전하는 기둥감이 될 수 있을까.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자.
3.넓게 퍼져야 시편 80:9절에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땅에 편만하며”라고 했다. 튼튼한 뿌리가 되어 나무를 제대로 굳게 세우려면 깊이 박히기도 해야 하지만 넓게 퍼져야 한다. 곧 땅속에 편만하게 퍼져 있으야 한다. 우리는 가끔 길가의 가로수가 그렇게 큰 태풍도 아닌데 넘어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는 가로수를 옮겨 심을 때 운반하기 좋게 뿌리를 짤라버리고 심었기 때문이다. 뿌리가 제대로 활착을 하여 넓게 퍼져 있었다면 능히 나무를 넘어지지 않게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땅에 편만하다”는 말은 넓게 퍼져 있다는 뜻도 있지만 많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렇다. 주의 몸된 제단을 굳게 세우려면 성도들이 많아야 한다. 많은 성도들이 힘을 합칠 때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에베소 2:21절에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라 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교회 운동은 연합 운동”이라는 사실이다. 예수 안에서 각 개체가 서로 연합하여 성전을 이룬다. 성도가 많아도 서로 연합하지 못하면 차라리 연합된 적은 성도로 이룩된 교회 보다 못하게 된다. 많은 숫자가 능사가 아니다. “교회 운동은 연합 운동”이다. 각 개체가 서로 연합할 때 많은 숫자의 위력이 나타나지 그렇지 못하면,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한다(갈5:15) 우리 성도는 주 안에서 하나가 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한다(롬8:28)
3.주의 몸된 제단의 뿌리 되어―진액을 공급하는 통로(route)가 되자 본문 17절에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이라고 했다. 나무는 뿌리가 공급해 주는 진액을 먹고 자란다. 그 진액을 먹고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뿌리는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는 통로이요, 생명 줄이다.
1.자신이 먼저 취하여 나무의 뿌리는 땅속 어두운 곳, 남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 남이 알아주지도 않는 곳, 그늘지고 소외된 곳에서 일평생을 살아가며 온갖 자양분을 취한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땅 위의 나무 곧 남을 위하여 한 평생을 바쳐 자양분을 취한다. 그리고 아낌없이 내어놓는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자양분을 공급하는 공급책으로, 아니 자양분을 공급하는 통로라고 말씀한다. 썩은 냄새가 등천(登天)을 하는 시궁창 밑이라도 마다 않고 찾아가서 자양분을 취하여 남을 위해 공급하는 통로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도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우리 주님께 돌리기 위해 “멸시 천대 십자가”를 져야 한다. 정말 주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해야 한다. 말없이 소리 없이 충성해야 한다. 그게 바로 주를 위한 진짜 충성이다. 내가 먼저 취하여 내 것이라 하지 않고 몸된 나무를 위하여 조금도 아까움 없이 다 내어놓는 뿌리의 삶을 생각하며 과연 나는 주의 몸된 제단을 위하여 그렇게 하고 있는가. 아니 그렇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자.
2.생명수를 찾아야 욥기 14:8-9절에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발하여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라고 했다. 욥기 29:9절에 “내 뿌리는 물로 뻗어 나가고 내 가지는 밤이 맞도록 이슬에 젖으며”라고 했다. 뿌리의 주된 사명은 자양분을 섭취하는 일이다. 그래서 자양분이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뻗어 나간다. 그 자양분이 물에 녹고, 또 물에 녹아 있기에 물을 찾아 뻗어 나간다고 했다. 그래서 물가에 심기운 나무는 사시청청 푸르고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는다(시1:3) 주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 충성을 다하기 위해 우리 성도들은 생명수 샘물을 찾아야 한다. 말씀의 깊은 샘을 파서 영혼의 양식을 얻고, 찬송의 깊은 샘을 파서 감사의 눈물을 얻고, 기도의 깊은 샘을 파서 회개의 눈물을 얻자. 이것들이 모여 “은혜 체험”을 이루고, 한없이 농축된 자양분이 된다.
3.멀리까지 퍼져야 뿌리는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까지 간다. 뿌리가 멀리까지 뻗어 나가는 나무일수록 큰 나무가 된다. 지상의 가지가 뻗은 것 이상으로 뿌리가 뻗어 있다. 나무를 캐어 보고, 풀뿌리를 캐어 보면 참으로 왕성한 생명력, 왕성한 정복력에 놀라게 된다. 물기를 따라 멀리 멀리 뻗어 나간 뿌리를 보며 새삼 놀라게 된다. 이를 지켜보며 우리 성도들은 주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 내 집 근처에만이 아닌 더 먼 곳에도 주의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만이 아닌, 유대만이 아닌, 사마리아만이 아닌,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다(행1:8) 주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 땅끝까지 이르러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자양분을 취하자. 자신이 먼저 취하여 주의 몸된 제단을 위하여 아낌없이 드리자. 참으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충성하자. 존귀 영광 모든 권세는 주님 앞에 내어놓자. 주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 내가 아닌 몸된 제단을 위해 살아가자. 자신을 생각하고, 자신을 위해 살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소리치며 뛰쳐나오면 교회의 연합 운동은 깨어진다. 곧 몸된 교회는 파탄에 빠지게 된다. 뿌리가 땅 밖으로 튀쳐 나오면 말라죽든, 주인의 도끼에 잘려 죽든 죽고 만다. 이는 자신만의 죽음이 아니라 나무 곧 전체의 죽음이 된다. 뿌리의 왕성한 삶은 나무의 왕성한 삶에 의해 이루어진다. 땅 위의 나무가 죽고 나면 땅속의 뿌리도 또한 절로 죽게 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점을 잊지 말자. 땅 위의 나무의 잘 됨이 땅속의 뿌리의 잘 됨이요, 땅 위의 나무의 잘못 됨이 땅속의 뿌리의 잘못 됨이다. 나무 없는 뿌리나, 뿌리 없는 나무가 있을 수 없다. 곧 하나 됨이다. 주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 충성하자. 몸된 제단의 영광이 나의 영광이요, 몸된 제단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참으로 나를 버릴 줄 아는 성도가 되자. 저 세례 요한처럼 말이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29-30)
1.주의 몸된 제단의 뿌리 되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하자 본문 20절에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고 했다. 욥기 14:8절에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라고 했다. “뿌리”하면 흙속, 또 수염처럼 많은 잔털, 물기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높은 마음을 품지 않고 일평생을 흙속에서 살다가 죽어 간다고 일러준다. 그렇다. 뿌리는 일평생 한 번도 밝은 태양 빛을 보지 못하고, 그렇게 살다가 죽어 간다. 정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땅 위의 나무를 위해 살다가 죽어 간다. 우리 성도가 이런 충성을 주님 앞에 바쳐야 한다.
1.땅속에서 뿌리는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뿌리의 삶의 터전은 땅속이다. 그래서 땅속에서 늙고 죽는다고 했다. 뿌리의 일평생이 땅속에서 이루어진다. 땅속에서 나고, 땅속에서 자라고, 땅속에서 늙어지고, 땅속에서 주는다고 했다. 땅속 거기가 어디인가 어두운 곳이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요, 소외된 곳이요,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곳이다. 바로 뿌리의 이러한 삶처럼 주님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주어진 일에 참으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사명 감당해야 한다. 나 자신 그렇게 살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 보자.
2.밖으로 나오면 뿌리가 땅속에서의 삶을 마다하고 밖으로 나오면 어떻게 될까 어두운 땅속에서 살 수 없노라고, 나도 남들의 눈에 잘 띄는 밝은 세상에서 살고싶노라고 외치며 뛰쳐나오면 어떻게 될까. 뿌리는 밖으로 나오면 죽게 된다. 말라죽게 된다. 아니면 주인의 도끼에 잘려 불타 죽는다(마3:10) 자기만 죽느냐 아니다. 나무 전체가 말라죽게 된다. 결국 모두 함께 죽음의 길을 걷게 되고, 자신이 삶의 자리를 지키지 않음으로 남까지 죽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성도들이 주님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뛰쳐 날뛸 때, 나도 죽고 그로인해 주의 몸된 제단도 파탄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이런 일을 현실적으로 많이 보고 있다. “장로”가 무엇이기에 피택되지 않아서 난리 굿인가 말이다. “집사”가 무엇이기에 제직 임명에 빠지면 그토록 미꾸라지 짓인가 말이다. 온 도랑물을 흙탕물로 만들어 버리고, 간다 온다 말도 없이 훌쩍 떠나 버린단 말인가. 어디 그 뿐인가 목회자의 세계는 그보다 더 했으면 했지 결코 뒤지지 않는다. 총회장 감투 하나 쓰기 위해 몇 천만원은 옛 말이고, 억대를 가지고도 모자란다는 숙덕궁이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우리 모두가 식목의 계절, 이 4월에 내가 심는 한 그루 나무의 뿌리를 바라보며 깊이 자성해야 한다. 회개해야 한다. 내 잘난 맛에 소리치고 뛰쳐나오면 말라죽든(주님이 치심) 아니면 잘려 죽든(책벌) 결국 죽게 된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참으로 우리의 찬송이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 고백이어야 한다.
3.왕성한 정복력 여러분, 나무 뿌리가 뻗어 가는 모습을 살펴본 적이 있는가 정말 우리를 감탄하게 만든다. 큰 바위도 뚫고 들어가 결국 바위를 갈라놓는다. 벼랑 위 바위틈에도 한 그루 나무가 자라고, 이름 모를 한 송이 꽃이 예쁘게 피어 있는 모습을 우리는 가끔 보게 된다. 아카시아나 대나무처럼 무섭게 옆으로 뻗어 나가 주위를 삽시간에 점령해 버리기도 한다. 참으로 왕성한 정복력이다. 우리 나라의 산들이 아카시아로 뒤덮여 말이 아니다. 살기 어려웠던 시절, 그 왕성한 번식력, 정복력으로 땔감 문제를 해결하려 아카시아 나무로 사방사업을 했기 때문이다. 왕성한 정복력, 왕성한 번식력, 바로 우리 성도들이 주님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 충성해야 할 삶의 모습이다.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충성하자. 어두운 곳, 그늘진 곳, 소외된 곳,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말없이 소리 없이 우리 그렇게 충성하자.
2.주의 몸된 제단의 뿌리 되어― 보전하는 기둥이 되자 본문 18절에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고 했다. 가지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 아니라 뿌리가 가지를 보전한다는 것이다. 곧 뿌리가 몸된 나무를 보전한다는 말이다. 뿌리 없는 나무가 어찌 홀로 서 있을 수 있겠는가.
1.뿌리가 튼튼해야 나무가 잘 자라고 제대로 서 있으려면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 뿌리가 튼튼해야 비바람이 불어도 거센 폭풍이 몰아쳐도 끄떡없다. 나무가 뿌리가 튼튼하다는 것은 더없이 큰 복이다. 그렇다. 주님의 몸된 제단도 튼튼한 뿌리를 가져야 한다. 어느 교회든 튼튼한 뿌리를 가진다면 이는 큰 축복이요 은혜이다. 아니 우리 성도들은 생각을 한 차원 높여, 바로 내가 주님의 몸된 제단에 튼튼한 뿌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주의 몸된 제단을 굳게 세우는 기둥이 되어야 한다. 잠언 12:3절에 “사람이 악으로 굳게 서지 못하나니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고 했다. 우리 인생은 악으로 서지 못한다고 했다. 곧 성공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않고 굳게 선다고 했다. 곧 의로 성공한다는 것이다. 결국 인생의 성공은 의의 뿌리가 튼튼할 때 성공한다는 말씀이다. 더구나 우리 신앙인 곧 성도들의 성공은 주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 충성할 때 이루어진다. 주님의 몸된 제단에 튼튼한 뿌리가 되자. 주님의 몸된 제단이 흔들리지 않고 잘 자라도록 튼튼한 뿌리가 되어 기둥감으로 충성을 다하자.
2.깊이 박혀야 시편 80:9절에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땅에 편만하며”라고 했다. 뿌리가 튼튼하려면 깊이 박혀야 한다. 뿌리가 땅속에 깊이 묻히지 않고 얕게 심겨지면 작은 바람에도 곧 잘 넘어진다. 그 몸된 나무를 보전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뿌리의 사명을 다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뿌리는 땅속 깊이 박혀야 한다. 그 깊은 곳에 생명의 양식인 물도 풍부하게 있다. 우리도 주님의 몸된 제단의 깊은 뿌리가 되어야 한다. 자신이 속해 있는 교회가 시험에 들지 않게, 시련에 휩싸이지 않게 굳게굳게 세우는 깊은 뿌리가 되어야 한다. 주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 충성을 다하자. 욥기 1:9절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했다. 내 교회라고 시험에 빠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사탄이 하나님을 충돌질 하여 당대의 의인 욥,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욥1:8) 하나님께 인정받은 욥을 무서운 시험으로 고통과 시련의 회오리바람으로 몰아치지 않았는가. 이런 시험과 시련의 물결이 덮쳐 올 때 나는 과연 우리 교회를 흔들림 없이 굳게 지킬 수 있는 깊은 뿌리가 될 수 있을까. 주의 몸된 제단을 보전하는 기둥감이 될 수 있을까.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자.
3.넓게 퍼져야 시편 80:9절에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땅에 편만하며”라고 했다. 튼튼한 뿌리가 되어 나무를 제대로 굳게 세우려면 깊이 박히기도 해야 하지만 넓게 퍼져야 한다. 곧 땅속에 편만하게 퍼져 있으야 한다. 우리는 가끔 길가의 가로수가 그렇게 큰 태풍도 아닌데 넘어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는 가로수를 옮겨 심을 때 운반하기 좋게 뿌리를 짤라버리고 심었기 때문이다. 뿌리가 제대로 활착을 하여 넓게 퍼져 있었다면 능히 나무를 넘어지지 않게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땅에 편만하다”는 말은 넓게 퍼져 있다는 뜻도 있지만 많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렇다. 주의 몸된 제단을 굳게 세우려면 성도들이 많아야 한다. 많은 성도들이 힘을 합칠 때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에베소 2:21절에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라 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교회 운동은 연합 운동”이라는 사실이다. 예수 안에서 각 개체가 서로 연합하여 성전을 이룬다. 성도가 많아도 서로 연합하지 못하면 차라리 연합된 적은 성도로 이룩된 교회 보다 못하게 된다. 많은 숫자가 능사가 아니다. “교회 운동은 연합 운동”이다. 각 개체가 서로 연합할 때 많은 숫자의 위력이 나타나지 그렇지 못하면,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한다(갈5:15) 우리 성도는 주 안에서 하나가 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한다(롬8:28)
3.주의 몸된 제단의 뿌리 되어―진액을 공급하는 통로(route)가 되자 본문 17절에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이라고 했다. 나무는 뿌리가 공급해 주는 진액을 먹고 자란다. 그 진액을 먹고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뿌리는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는 통로이요, 생명 줄이다.
1.자신이 먼저 취하여 나무의 뿌리는 땅속 어두운 곳, 남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 남이 알아주지도 않는 곳, 그늘지고 소외된 곳에서 일평생을 살아가며 온갖 자양분을 취한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땅 위의 나무 곧 남을 위하여 한 평생을 바쳐 자양분을 취한다. 그리고 아낌없이 내어놓는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자양분을 공급하는 공급책으로, 아니 자양분을 공급하는 통로라고 말씀한다. 썩은 냄새가 등천(登天)을 하는 시궁창 밑이라도 마다 않고 찾아가서 자양분을 취하여 남을 위해 공급하는 통로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도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우리 주님께 돌리기 위해 “멸시 천대 십자가”를 져야 한다. 정말 주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해야 한다. 말없이 소리 없이 충성해야 한다. 그게 바로 주를 위한 진짜 충성이다. 내가 먼저 취하여 내 것이라 하지 않고 몸된 나무를 위하여 조금도 아까움 없이 다 내어놓는 뿌리의 삶을 생각하며 과연 나는 주의 몸된 제단을 위하여 그렇게 하고 있는가. 아니 그렇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자.
2.생명수를 찾아야 욥기 14:8-9절에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발하여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라고 했다. 욥기 29:9절에 “내 뿌리는 물로 뻗어 나가고 내 가지는 밤이 맞도록 이슬에 젖으며”라고 했다. 뿌리의 주된 사명은 자양분을 섭취하는 일이다. 그래서 자양분이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뻗어 나간다. 그 자양분이 물에 녹고, 또 물에 녹아 있기에 물을 찾아 뻗어 나간다고 했다. 그래서 물가에 심기운 나무는 사시청청 푸르고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는다(시1:3) 주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 충성을 다하기 위해 우리 성도들은 생명수 샘물을 찾아야 한다. 말씀의 깊은 샘을 파서 영혼의 양식을 얻고, 찬송의 깊은 샘을 파서 감사의 눈물을 얻고, 기도의 깊은 샘을 파서 회개의 눈물을 얻자. 이것들이 모여 “은혜 체험”을 이루고, 한없이 농축된 자양분이 된다.
3.멀리까지 퍼져야 뿌리는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까지 간다. 뿌리가 멀리까지 뻗어 나가는 나무일수록 큰 나무가 된다. 지상의 가지가 뻗은 것 이상으로 뿌리가 뻗어 있다. 나무를 캐어 보고, 풀뿌리를 캐어 보면 참으로 왕성한 생명력, 왕성한 정복력에 놀라게 된다. 물기를 따라 멀리 멀리 뻗어 나간 뿌리를 보며 새삼 놀라게 된다. 이를 지켜보며 우리 성도들은 주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 내 집 근처에만이 아닌 더 먼 곳에도 주의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만이 아닌, 유대만이 아닌, 사마리아만이 아닌,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다(행1:8) 주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 땅끝까지 이르러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자양분을 취하자. 자신이 먼저 취하여 주의 몸된 제단을 위하여 아낌없이 드리자. 참으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충성하자. 존귀 영광 모든 권세는 주님 앞에 내어놓자. 주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 내가 아닌 몸된 제단을 위해 살아가자. 자신을 생각하고, 자신을 위해 살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소리치며 뛰쳐나오면 교회의 연합 운동은 깨어진다. 곧 몸된 교회는 파탄에 빠지게 된다. 뿌리가 땅 밖으로 튀쳐 나오면 말라죽든, 주인의 도끼에 잘려 죽든 죽고 만다. 이는 자신만의 죽음이 아니라 나무 곧 전체의 죽음이 된다. 뿌리의 왕성한 삶은 나무의 왕성한 삶에 의해 이루어진다. 땅 위의 나무가 죽고 나면 땅속의 뿌리도 또한 절로 죽게 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점을 잊지 말자. 땅 위의 나무의 잘 됨이 땅속의 뿌리의 잘 됨이요, 땅 위의 나무의 잘못 됨이 땅속의 뿌리의 잘못 됨이다. 나무 없는 뿌리나, 뿌리 없는 나무가 있을 수 없다. 곧 하나 됨이다. 주의 몸된 제단의 뿌리가 되어 충성하자. 몸된 제단의 영광이 나의 영광이요, 몸된 제단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참으로 나를 버릴 줄 아는 성도가 되자. 저 세례 요한처럼 말이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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