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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는 아침 (마27:62-28:10)

본문

오늘은 부활절이다. 예수님이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려 갈보리산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지낸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날이다.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날이다. 부활은 죽음을 전재로 한다. 죽음이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다. 부활의 새 생명은 지금까지의 삶을 죽음으로 정리하고, 새로운 삶의 생명 역사를 펼쳐 나가는 새 생명 운동이다. 마치 봄날에 돋아나는 새싹과 같이…. 부활절이 만물이 생동하고 소생하는, 새 생명 역사가 일어나는 봄철에 있다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죽음과도 같은 긴 겨울의 잠을 깨고, 또한 해의 새로운 삶을 위해 새 생명 운동을 시작한다. 단단한 대지를 뚫고, 딱딱한 껍질을 벗고, 노오란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생명”은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부활절의 정확한 날자는 모른다. 춘분이 지나고 만월(보름달)이 지난 다음 주일로 정하고 있다. 아마도 어떤 특별한 날을 귀중히 여기는 잘못을 범치 않도록(갈4:10-11) 정확한 날짜가 전해지지 않는 것 같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의 영웅적 지도자로 추앙을 받고 있는 모세, 그의 무덤을 알 수도, 찾을 수도 없었다(신34:6) 모세의 묘를 알지 못하게 하심은 하나님의 뜻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무덤을 신성시하고, 우상을 섬기듯 음란히 섬길(신31:16) 것을 막으신 것이다. 부활절! 참으로 우리 성도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뿌듯하게 하고, 소망이 넘치게 하는 명절이다. 우리 교회의 최대의 명절이 되어야 한다. 우리 신앙 생활의 최후 영광은 바로 부활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진리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신앙의 길을 걷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인간의 머리로 하나님을 해부하려는 자들이다. 하나님도 마치 개구리 해부하듯 하나 하나 파해치면 다 알 수 있다는 생각이다. 유한한 인간의 표준으로 어떻게 무한한 하나님을 다 알 수 있겠는가 자연적인 존재가 어찌 초자연적인 존재를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현상도 다 알지 못하는 인간이 아닌가 우리 인간이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이 스스로 알려주신 부분만큼 알 수 있다. 이를 우리 성경은 계시(啓示)라고 한다. 곧 “베일(veil)에 싸인 부분을 벗겨 보여준다”는 말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했다(마22:23, 행23:8) 초대 교회 때는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었는데, 이들은 부활은 “이미 지나갔다”고 했다. 또 고린도 교회에서도 일부 신자들이 부활을 믿지 못했다(고전15:12) 오늘 날에도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데,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 갔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유대인들이 파수꾼을 세우고 힘대로 지켰다고 했다. 또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로 보는 견해가 있다. 만일
그렇다면 오고 오는 교회사를 통해, 교회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일관되게, 통일되게 주장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사단의 역사로 이단 사상이 침투하여 교회가 분열되는데, 부활에 대한 증거가 일관되게 동일 할 수가 없는 일이다. 또 육체적인 부활이 아니라 제자들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계승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간 친히 “자신의 부활”을 친히 증거 하셨고, 제자들에게,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다고 했다(고전15:6) 그 예수의 부활을 친히 본 500여 형제 중에 태반이나 살아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고전15:4) 그리고 부활의 주님을 목도한 제자들이 담대히 예수의 부활을 증거한 일이다(행4:20) 또 내 속에 있는 성령님이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친히 증거하고(롬8:16) 나를 주의 진리 가운데로 인도한다(요14:26) 그래서 우리 성도는 “예수 부활하셨네. 예수 부활하셨네. 예수 부활 내 부활”을 찬양할 수 있게 된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 주님이 부활하시던 그 날, 그 아침,부활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는 아침을 살펴 보고져 한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주님처럼, 주님을 사랑하며 주의 곁을 떠나지 않고, 주의 십자가 곁에까지(요19:25) 주의 무덤까지 찾아가는 막달라 마리아처럼, 부활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는 아침을 맞이하자. 부활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는 아침! 그 아침은 과연 어떤 아침인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자.
1.고난의 긴 밤을 통과한 자만이 맞이하는 아침이다 본문 28:1절에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라고 했다. 우리 주님은 날 위하여 갈보리산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바로 금요일이다. 갈보리산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시간대 별로 살펴 보면, 제3시(오전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막15:23) 제6시(정오)에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9시(오후3시)까지 계속 되었다. 제9시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신 후(마27:45-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고 하신 후 운명하셨다(눅23:46) 그리고 안식일이 시작되는 저녁 무렵 아리마대 요셉이 장사지냈다(요19:31)
1.무덤 속의 밤 본문 28:1절에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라고 했다. 무덤 속의 긴 밤, 사망권세가 잠시 이긴 것 같은 그 밤, 실로 고난의 긴 밤이었다. “부활의 영광”은 죽음을 전재로 한다. 죽음이 없는 곳에 부활은 있을 수 없다. 죽음 그것은 인간이 통과하는 최대의 고난의 긴 밤이다. 그래서 모두들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 고난의 긴 터널(tunnel)을 통과하지 않고는 부활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는 아침을 맞이할 수 없다.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없다.
2.갈보리산 골고다로 향하는 길 마태 27:32-33절에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라고 했다. 그때 당시에는 죄수들이 자기가 못 박힐 통나무 십자가를 자신이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래서 주님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감당치 못했다. 무거운 통나무 십자가 지치신 주님, 넘어지고 자빠져서 팔굽이 상하고, 정강이가 찢어져 피를 흘리시는 주님 이를 지켜보며 따르던 여인들이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다고 했다(누23:27) 우리는 그날의 그 모습을 떠올리며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 외롭고 무거웠던 길, 골고다의 거친 언덕길 지치신 주님의 모습”을 노래하며 눈물짓는다. 바로 내가 겪어야 할 고통인데 잔혹한 로마 병정들도 그 모습을 참아 볼 수 없었는지 아니면 일이 되지를 않겠다 판단해서인지 구레네 시몬을 잡아 억지로 대신 십자가를 지워 골고다 언덕을 오르게 했다(마27:26) 이처럼 주님이 걸어가신 골고다 언덕길은 고난의 긴 터널이요, 고난의 긴 밤이었다. 그러나 골고다 언덕을 넘지 않고는 부활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는 아침을 맞이할 수 없다.
3.성육신의 한 평생 요한복음 1: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다. 빌립보 2:6-8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이라면 우리는 으레껏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를 생각한다. 물론 예수님의 고난의 최절정(climax)은 십자가이다. 그러나 우리의 표준에서 쉽게 잊어버리지만 주님의 성육신 자체가 고난의 길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셨다”고 했다. 우리는 이를 가리켜 “주님의 비하(卑下)”라고 한다. 우리 스스로의 비하에 대해서는 자존심 상하는 굴욕감으로 참을 수 없는 울분과 고통을 느끼면서도 주님의 비하에 대해서는 자신의 일처럼 심각하게 생각지 못하고 있다. 비유컨대, 하늘 보좌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모양으로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우리 인간이 돼지 우리 속에 들어가 돼지와 함께 먹고 뒹굴며 사는 것에 비교가 되겠는가 성육신 곧 주님의 비하 자체가 고난의 길이요, 성육신 하신 주님의 33년 간의 삶 자체가 고난의 긴 터널이다. 고난의 긴 밤이다. 그러나 이 고난의 긴 터널을 통과하지 않고는 부활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는 아침을 맞이할 수 없다.
2.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아침 본문 28:6절에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했다. 고린도전서 15: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 했다. 예수님이 부자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 무덤에 장사지내질 때 사망의 권세가, 사탄이 승리의 개가를 불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주님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다.
1.사망의 권세 고린도저서 15:56절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했다. 사망의 권세는 바로 죄이다. 이는 죄의 값은 사망인데(롬6:23)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 있기(롬3:9, 23) 때문에 사망이 인류 위에 왕 노릇 할 수 있게 되었다. 사망을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히9:27)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 곧 인류의 조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 함으로 죄를 짇게 되고 징벌을 받아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다. “흙에서 취했으니 흙으로 돌아가라”(창3:19) 곧 죽음의 저주이다. 아담 하와의 후손은 “저주받은 자의 자식”으로 곧 죄인으로 이 땅에 태어나게 된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내가 죄를 지음으로 죄인이 된게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난다. 그래서 죄인으로 살아간다. 곧 죄를 지으며 살아간다. 그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를 가리는 표준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고 고백한다(롬7:9) 그것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드릴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죄 없으신 분으로(히4:15)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으로(고후5:21)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요19:30) 흠도 없고 점도 없는 한 마리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대속의 제물이 되시어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
2.여인의 후손의 승리 창세기 3:15절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했다. 사망의 권세가, 사탄의 세력이 십자가 위에서 예수를 죽이고, 무덤에 장사지내고 승리의 개가를 불렀다. 그러나 잠시뿐 우리 주님은 사망을 이기고 부활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는 아침을 맞이하셨다. 사탄은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뿐 그 발꿈치에 짓밟혀 머리가 박살나게 되어 있다. 이미 그렇게 결정되어져 있는 하나님의 뜻이다. 승리, 그 최후 승리는 부활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는 아침에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3.우리에게도 이김을 고린도전서 15:56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했다. 주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고, 우리 성도들은 그 뒤를 잇는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 했다(고전15:5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는 승리이요, 예수 안에서 누리는 부활의 영광이다.
3.안식 후 첫날 아침 본문28:1절에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라고 했다.
1.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주가 부활하신 부활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는 아침은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 아침이었다. 고난의 긴 밤이 끝나는 아침이었다. 무덤 속에 묻힌 긴 밤이었다. 안식일 바로 율법의 상징이다. 율법의 대표인 하나님의 십계명은 두 부분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로 나누어지고, 또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구분된다.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인데 그 중 하나님께 대해 해야 할 일이 바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다(출20:8) 그렇게 함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곧 율법은 몽학선생으로 인류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갈3:24)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친히 찾아오시니 몽학선생이 필요 없다. 그래서 율법과 선지자는 셰례 요한의 때까지 라고 했다(눅16:16)
2.부활의 새 생명이 시작되는 날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 주님이 부활하셨다. 죽음을 이기고, 무덤을 깨치고 부활하셨다. 그리하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부활의 새 생명이 시작된 것이다.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부활의 새 생명 운동은 믿음을 통하여 믿는 이의 가슴속으로 전해지고 주께서 강림하시는 그날, 그에게 붙어 있는 다시 말해서 그의 안에 있는 자들은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게 된다(고전15:23)
3.산 자의 땅에 본문 28:6-7절에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고 했다. 막달라 마리아와 그 일행이 예수의 무덤을 찾았으나, 그 무덤의 주인은 간 곳이 없고 하늘로서 내려온 천사가 있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고,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다”는 소식이다. “거기서 너희가 주를 뵈오리라”고 한다. 우리 주님은 무덤의 주인으로 무덤에 누워 있을 시체가 아니다.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산 자이다.
그러므로 산 자는 죽음의 땅 무덤에 묻혀 있을 수 없다. 약속의 땅(마26:32) 갈릴리로 가셨다.
4.우리에게도 약속하신 축복의 아침 고린도전서 15:52-53절에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 했다. 부활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는 아침은 주님 한 분만의 것이 아니다. 그에게 붙어 있는 모든 자에게 약속하신 축복이다.
1부활의 첫 열매 고린도전서 15:20절에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했다. 주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부활의 새 생명은 시작되었고, 부활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는 아침은 밝아 왔다. 그 찬란한 빛이 어두움을 몰아내었다. 사망의 그늘이 사라졌다.
2.마지막 나팔 소리에 고린도전서 15:51-52절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했다. 우리 성도들의 최대의 소망인 부활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는 아침을 맞이하는 축복을 약속하셨다. “마지막 나팔 순간”이라고 했다. 곧 주님이 강림하시는 때를 말한다. 그때 주께 붙어 있는 자들 곧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다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게 된다.
3부활의 산 소망 베드로전서 1:3절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고 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부활의 소망은 “산 소망”이라고 했다. 보통 사람이 말하는 희망과는 다르다. 소망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소망이 살아 있다 함은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노력하는 것 아니요, 소망 스스로가 살아 역사하여 소망을 이룬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이 가진 부활의 산 소망은, 그 소망을 가진 자에게 부활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는 아침을 맞이하게 한다. 부활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는 아침이다. 그 찬란한 영광 빛에 어두움은 사라진다. 사망의 그늘이 사라진다. 슬픔 걱정 근심의 짙은 구름이 사라진다. 질병과 고통의 무거운 짐도 사라진다. 불신과 증오와 미움의 마음도 사라진다. 부활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는 아침! 그 찬란한 영광 빛에 나의 마음에 수심 구름이 걷히고, 기쁨과 즐거움이 돋아난다. 시기와 질투가 사라지고 화목과 평화가 깃든다.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지고 평안과 안식이 깃든다. 부활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는 아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오늘 부활절에 이런 영광스런 아침, 찬란한 아침을 맞이하자. 주가 약속하신 축복을 받아 누리자. 그리하여 오늘의 이 부활절이 참으로 나에게 의미 있는 주일이 되게 하자. 부활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는 아침! 우리 모두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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