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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제자 (눅24:1-12)

본문

오늘은 부활 주일이다. 예수님이 갈보리산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이다. 부활절을 정하는 날짜 계산법은 춘분이 지나고, 만월(보름달)이 지난 다음 주일이다. 예수 부활 사건은 지중해 연안의 조그마한 나라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갈보리산 골고다에 있는 작은 동산에서(요19:41) 장사한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신 사건이다. 부활이 없다 하거나(행24:15), 믿지 못할 일로(본문11절, 막16:11) 여기는 자들이 많고, 더욱이 부활의 소식을 알리지 못하도록 돈과 권력으로(마28:11-15) 막았으나 오늘에 와서는 전 세계적인 절기가 되었다. 유대인의 3대 절기는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이다. 그러나 지금은 부활절, 추수 감사절, 성탄절을 3대 절기라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미국을 중심한 서방 세계에서는 부활절을 가장 큰 절기로 지키고 있다는 소식이다. 보통 우리의 생각에는 크리스마스 곧 성탄절이 가장 큰 절기로 인식이 되어 있다. 성탄절도 귀중하지만 부활은 우리 모든 성도의 소망이 그 속에 담겨져 있다. 성탄절이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부활절은 인간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 11절/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부활 신앙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 열 두 제자로 특별히 선택받은 제자들이다. 3년간 함께 하며 가르침을 받았고, 함께 먹고 마시며 동거하는 삶을 살았던 제자들이다. 그러한 그들에게도 예수 부활의 소식을 처음 접하는 순간 “허탄한 말”로 들렸고, 믿지 못할 일로 여겨졌다. 제자들의 신앙에도 문제가 있지만 그만큼 예수 부활 사건은 놀라운 것이라는 의미로도 생각할 수 있다.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제자 그래서 이 제자들이 취한 행동이다. 바로 내 눈으로 확인하자는 것이다. 확인하고 믿는 것도 믿음에 속하기는 하나 복되지 못한 믿음이라고 했다(요20:29). 사실상 믿음이 아니라 내가 인정하는 것이 되고 만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주님이 부활하신 그날에 주님의 제자들이 취한 행동을 통해,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제자를 바라보며 우리 자신들의 부활 신앙을 점검해 보자.
1.예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이다. 본문 11절/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마가복음 16:11절/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 지 아니하니라/ 예수 부활의 소식을 접한 제자들의 첫 반응이다. 우리 인간의 신앙은 우리의 생각과 같이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주님과의 3년간 함께 하였던 생활, 주님의 이적과 기사, 주님의 말씀…. 지금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들이 참으로 어리석고, 불신앙의 사람들인 것 같다. 그러나 그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 나의 모습일 수도 있다. 과연 다시 오실 주님을 믿고 있는가. 영접할 준비는 되어 있는가 우리 스스로를 생각해 보면, 그들을 향해 자신 있게 돌을 던질 수 없는 자신임을 생각하게 된다.
1.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본문 5절/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여인들에게 들려준 말이요,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전한 예수 부활의 소식이다.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마28:1)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등, 여인들이 향품을 준비하여 예수의 무덤을 찾았다. 무덤의 돌이 굴려져 있었고, 예수의 시체는 없어져 두려워하고 있을 때 천사의 음성이 들려 온 것이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인들이 십자가에 못박힌 나사렛 예수를 찾는 줄 알고 있었다(막16:6). 잘못 찾아 왔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주님은 이미 전에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 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계시지 아니하신다는 것이다.
2.제 3일에 살아나리라 본문 7절/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 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천사가 여인들에게 들려주었고, 여인들이 전한 예수 부활의 소식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지낸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일러 주셨던 주님의 말씀을 회상시켜 준 것이다. 마태복음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 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17:23/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20: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주님은 일찍이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이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일러 주셨다. 제자들은 이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명심해야 했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믿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요20:9). 그래서 그들은 달리고 있다.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제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달려야 할 곳은 빈 무덤이 아닌 갈릴리라는 사실을 저들은 아직도 알지도, 믿지도 못하고 있다.
3.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본문 8절/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마태복음 27:63/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 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예수님이 일러주신 부활에 대한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본문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도, 심지어 예수를 잡아죽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믿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갈릴리에서 만나자시던(마26:32) 주님을 뵈오려 갈릴리로 찾아간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마태복음 28: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 우셨던 곳을 보라/ 예수님은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 말씀을 지키고 따라 순종하며 살아갈 때, “기억한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이 된다.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제자 그들이 비록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가 되어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갈릴리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러 가지 못한다면 그 기억된 말씀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 성도들이 성경 요절 말씀을 많이 기억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 말씀이 정말 값진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기억하는 것으로 끝나는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을 지키고 따라 순종하며 살아갈 때 진정 값진 말씀이 된다.
2.예수 부활을 확인하려는 자이다 본문 11-12절/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 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 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여인들이 전하는 예수 부활의 소식을 듣고 제자들이 보인 두 번째 반응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는 것이다. 우리들은 자신의 눈을 대단히 신뢰한다. 그러나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다. 현미경을 통하지 않고는 자세히 볼 수가 없고, 현미경을 통해 보는 것도 실상은 아닌 것이다. 더욱이 진리에 대해서는 감겨져 있는 우리의 눈이다. 우리의 눈은 부활의 주님을 확인할 수 있는 눈이 아니다. 동산지기로 잘못 알아보는 마리아(요20:15), 엠마오로 가는 길에 동행하시던 주님을 몰라본 두 제자를 보라. 그들이 부활의 예수를 확인할 수 없었다.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제자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를 원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부활을 확인하기 위해 빈 무덤을 향해 힘껏 달렸다. 그러나 그곳에 부활의 주님은 없었다. 다만 빈 무덤뿐이었다. 요한복음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곧 예수 부활의 첫날 저녁이다. 제자들이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방문을 꼭꼭 닫아 잠근 방에 부활의 예수님이 찾아 오셨다(요20:19). 친히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시고, 성령님을 주시고, 사명을 주셨다. 내가 그 손 못자국을 만져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했던 도마의 말이다. 눈으로 확인하는 것 가지고는 안되겠다. 손으로 만져 보고 확인하겠노라고 한다. 제자들의 모습이 소위 말하는 점점 더 가관이다. 아마도 보관할 장소가 없어서(요21:25) 이 정도로 기록을 끝내어서 그렇지 좀더 상세히 기록했다면 목소리를 들어보자(창27:22), 체취를 맡아보자(창27:27), 5병2어의 기적으로 보리떡을 먹어 보자(요6:13) 등등의 확인 방법을 총동원했을 것이다.
바로 오늘의 우리의 모습이다. 지금 흘러가는 한 줄기의 신앙은 예수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입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육체적 부활이 아니라 정신적 계승이요, 환상을 본 것이요, 새로운 삶의 변화를 가져다 주는 힘이라고 한다. 유대인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근 제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를 증거할 수 있는 변화를 가져다 주는 힘이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그 힘을 받은 자 속에 예수가 부활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 부활의 힘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등 어디에서든지 새로운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 부활의 참된 의미는 육체적 부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의 변화와 개혁에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제자 그 빈 무덤이 예수의 부활을 증명하는 것이 결코 될 수 없다고 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우리 성도는 그 빈 무덤만을 보는 자들이 아니다. 그 빈 무덤 속에 있던 천사를 보고, 또 천사의 증거를 듣는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들은 그 빈 무덤에서 사라진 예수를 무덤 밖에서 바라본다.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신 예수님, 도마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던 예수님,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던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3.미련한 자이다. 누가복음 24: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예수 부활의 소식을 들은 제자들의 세 번째 반응은 미련해지는 것이었다. 성경이 말하는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고(잠1:7), 지각이 없고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다(렘4:22).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준비하지 아니하고(마25:3), 그 미련함으로 인하여 혼미하게 되고(잠5:23), 지식이 없으므로 죽게 된다(잠10:21). 고전 3:19절/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성경이 말하는 미련한 자, 곧 하나님께 미련한 자란 바로 이 세상 지혜에 속한 자이다. 이 미련한 자들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자기 궤휼에 빠지게 된다고 했다. 마태복음 11:25-26절/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 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 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 곧 하나님께 미련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알 수 없다. 그들의 눈에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순진한 어린 아이에게 나타내신다.
1.더디 믿는다. 누가복음 24:25절/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미련한 자의 특색이 더디 믿는다는 것이다. 지각이 없음으로 이해하고 판단을 못하는 것이다. 더욱이 진리 문제에 있어서는 이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눈을 열어 보여 주기 전에는,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해 주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2.구속자로 바람 누가복음 24:21절/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주님의 제자가 되어 3년간 함께 먹고 마시며 보고 듣고 배웠건만 저들은 예수님을 바로 알지도, 믿지도 못하고 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신앙고백을 하였었지만, 능하신 선지자로(눅24:19), 이스라엘의 구속자로 바라고 있을 뿐이다. 저들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확인해야 하는 차원의 신앙고백이다. 그러니 당연히 저들의 구속자는 육적이고, 로마의 속국에서 민족의 해방을 가져다 줄 왕이었다. 그래서 저들은 그 메시아 왕국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했다. 야고보와 요한은 어머니를 동원하여 주님의 좌우 편에 앉기를 바랐고(막10:37), 서로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눅9:46, 22:24).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는 영적인 구속자이셨고, 참 이스라엘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구속자이셨다. 그러니 십자가의 죽으심은 저들에게 이스라엘의 구속자로 바라는 소망이 무너지는 낭패와 절망이었다.
3.눈을 열어 보게 하심 누가복음 24:31절/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찾아 오셔서 함께 동행하시며, 말씀을 서로 나누나 저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부활의 소식이 들려 왔으나 믿지 못하였고, 부활의 주님이 친히 찾아 오셨으나 알지 못했다. 자신들이 바라는 이스라엘의 구속자가 십자가에 죽은지 사흘. 자신들과 함께한 여인들이 자기들을 놀라게 하였고, 자신들과 함께 한 두어 사람도 여인들의 말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가 살으셨다. 여인들이 전하는 예수 부활의 소식은 자신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예수 부활의 기쁨으로 인한 놀라움이 아니다. 정신 나간 소리, 허탄한 소리를 하는데 대한 놀라움이다. 미련하고 더디 믿는 자들이여 부활하신 예수님의 꾸중이요, 탄식이다. 엠마오에 도착하기까지 차근차근 일러주시는 말씀들. 마음이 뜨거워지는 진한 감동이 왔으나 저들은 깨닫지 못하고, 보지 못하였다. 부활의 예수님을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더니 저희와 함께 식사 자리에 앉아 축사하심으로 저들의 눈을 열어 주시니, 두 제자의 눈이 열렸고, 부활의 주님이 보였다.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제자 그들은 예수 부활의 소식을 듣고서도 믿지 못하였다. 믿을 수 없었기에 자신들의 눈으로, 자신들의 손가락으로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저들의 굳은 마음, 닫힌 눈으로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했다(마4:12) 참으로 미련한 자들이다. 이 세상에 지혜자가 하나님께 미련한 자임을 저들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신들의 지혜로 확인하려 든다. 입증하려 든다. 이 세상의 지혜롭고 슬기로운 것으로 확인하려 들면 들수록 점점 더 감추어진다는 사실을 이 미련한 자들은 알지 못한다. 예수 부활의 역사적 사실의 입증.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을 우리 인간이 갖기 전에는, 예수 부활의 증거를 위한 시도는 생사람 잡는 일만 계속할 뿐이다. 예수 부활의 증거는 인간의 방법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은 생명의 주인이신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처럼 감겨진 눈이 열리고, 굳은 마음이 깨어질 때 부활의 주님이 보이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제자가 누구인가요 바로 나 자신은 아닌가요 예수 부활을 못 믿고, 내 눈으로 내 손으로 확인하러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가지나 않는지요 보기는 보았어도, 듣기는 들었어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기억이 부활의 예수를 보게 해 주지를 못합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갈릴리로 향하게 해 주지를 못합니다.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질 때. 그때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갈릴리로 향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마28:17). 참으로 미련한 사람들 이 자리에서까지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고 합니다.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막16: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꾸짖음을 듣지 않는 자들이 다들 되시기를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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