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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과부의 두 렙돈 헌금 (막12:41-42)

본문

헌금은 내가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그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나의 정성된 마음을 주 앞에 드리는 것이다. 그 마음 표시할 길이 없어서 물질로 표하는 것이다. 나의 가진 모든 것이 실상은 하나님의 것이다. 나의 생명도, 나의 몸도, 내가 가진 재물도, 모두다 따지고 보면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 많은 것 내게 주셨으니, 10의 1조가 아니라 모두다 드린 데도 실상은 손해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달라시는 게 아니라 그 중의 얼마를 바치라 하시는 것이다. 헌금에 대한 생각이 내 것 가지고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하니 아까움이 생기고 욕심이 생기고 결국 감사가 없어지고 만다. 10의 1조, 그것은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말씀을 순종하느냐를 알아보시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하나님이 가진 것이 부족해서 바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일부의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헌금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업이 중단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치 자기가 그 사업을 하는 냥 생각하기도 하고, 자기가 아니면 그 사업이 이루어질 수 없는 냥 여긴다.
헌금을 드리지 못하는 사람도 문제요, 이렇게 자신이 다 하는 냥 자신을 나타내고져 하는 사람도 문제이다. 더더욱 문제는 하나님의 사업을 주관한다는 일부의 교회들이 이들의 주장에 동조한다는 사실이다. 교회를 지도하는 지도자도, 일반 평신도들도 세상의 사업처럼 하나님의 사업을 하면서 소위 물주에게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돈 없는 사람은 교회에서조차 사람 대접을 못 받는다”는 말이 정설처럼 나돌고 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왜 이렇게 되어 가는가 성도들의 눈에는 물론 불신자의 눈에 “있는 자의 교회”로 비쳐지고 있는가 엄격한 의미에서 교회는 부자가 아닌 “가난한 자의 교회”이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를 보면 첫 가르침의 시작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이다. 심령이 부한 자를 찾지 않으셨다. 내가 헌금을 제일 많이 하니 이 교회에서는 내가 최고다는 자부심도, 자랑도, 긍지도 없는 자를 찾으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 그들은 항상 부족을 느끼며 사는 자들이다. 10의 1조를 드리고도 10의 2조를 드리지 못해 부족을 느끼고, 10의 1 조도 드리지 못해 부족을 느끼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서 주를 위해 좀더 충성하지 못해 부족을 느끼는 가난한 자, 그리고 충성하노라고 하는데 충성다 운 충성을 못해 늘 부족을 느끼며 주 앞에서 오늘 “충성하라 죽도록, 충성하라 끝까지!”를 부르짖는 사람이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연보궤 앞에서 사람들의 연보하는 모습을 보시고 여러 부자의 많이 넣는 것에 감동하시지 않고, 한 과부의 두 렙돈 헌금에 감동하시고, 제자들을 불러 들려주신 교훈이다. 주님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주는, 지금은 사라져 가는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을 살펴 보고져 한다.
1.주님이 지켜보시는 가운데 드려진 헌금 본문 41절에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라고 했다. 여기서 “연보”라 함은 물품과 돈으로 드린다는 뜻이다. “헌금”은 돈을 드린다는 뜻이다. 곧 헌물까지를 포함하는 것이 연보이다. 농촌의 농산물로 드리는 것이나 교회의 비품으로 드리는 일은 헌금에 속하지 않는다. 구약적인 의미의 “연보”가 신약으로 넘어 오면서 “헌금”으로 바뀌어져 가고, 더욱이 현대 교회로 넘어 오면서 “헌금”으로 정착하게 된다. 예수님 당시만 해도 연보궤에는 13개의 투입구가 있었는데 그 중에 일부는 제물 대금을 드리는 투입구로 사용되어졌다. 다시 말해서 제물 대신 돈으로 가져와 물품이 아닌 돈으로 드렸다고 한다. 마치 오늘의 “의자 헌금”, “피아노 헌금” 등으로 드리는 것이다. 돈이 중심이 되자 “헌금”으로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 연보궤를 향하여 앉으시고 무리의 연보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다. 우리 성도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주님이 지켜보고 계신다. 그 주님 앞에서 나의 감사의 예물을 드린다는 사실이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그 주님이 바로 연보궤에 헌금하는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나의 가진 모든 것이 실상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멸망길에 빠진 이 몸 구원해 내신 이도 주님이신데, 어찌 아니 감사하랴 주신 은혜 생각하니 너무도 고마우셔라. 받은 은혜 생각하니 너무도 크셔라. 드리고 또 드린들 갚음이 될 수 있으랴 마는 나의 작은 정성이나마 그저 감사해서 드릴뿐이다. 드릴 때마다 숙여지는 고개, 주여 나의 이 작은 손길 용서하소서. 이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연보궤에 헌금을 드리며 지켜보시는 주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목소리이다. 자신의 부족을 매질하는 회개의 목소리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마음으로 헌금을 드리자. 오늘도 살아 계셔서 연보궤에 헌금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고 계시는 주님 앞에서 헌금을 드리자. 그 주님만을 바라보자. 옆에 있는 남의 손길을 바라보지 말자. 성전에서 기도하던 바리세인, 그가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은 뒤로한 체 옆에 있는 세리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그 모습, 자신의 잘남과 자랑뿐이다. 세리의 못남을 비웃고 조롱하고 업수히 여기다가 정작 자신의 기도는 그만 잊어버리고, 잃어버린다. 그 바리세인의 감사가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감사인가 그 바리세인의 감사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그리고 생각해 보세요. 그 감사는 상대적 감사이다. 결코 절대자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절대적 감사가 아니다. 누가복음 18:11절에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절대자 하나님 앞에 드리는 진정한 감사가 아니다. 세리와 비교하는 자신의 자랑이다.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잘남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자신의 잘남으로 남의 못남을 짓밟는 조롱이요 멸시요 업수히 여김이다. 결국 그 바리세인은 정작 자신의 기도는 잊어버렸고, 잃어버렸다. 자신의 잘남을 자랑하고 드러내고 찬양하다가, 남의 못남을 업수히 여기고 조롱하고 짓밟다가 정작 자신의 기도는 없는, 기도 없는 기도 를 드린 셈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지켜보시는 가운데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우리의 심령이 바리세인의 심령이 되면 안된다. 그게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닌 “심령이 부한 자”의 심령이다. 연보궤에 남의 손길을 바라보지도, 생각지도 말자.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주님만을 바라보자. 남의 손길을 바라보며 “너보다는 많다!” 자부심을 갖지 말자. 남의 손길을 바라보며 “그것도 헌금이냐” 업수히 여기지도 비웃지도 말자. 그런 마음은 바로 저 바리세인의 상대적 감사의 마음이다. 다시 한번 생각하자. 다짐하자. 그리고 온유한 주님의 음성, 내 귀에 속삭이는 음성을 듣자.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2.연보궤에 드린 헌금 본문 41절에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라고 했다. 성경의 전통적인 연보는 연보궤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나 1년에 3차 유대인의 3대 명절에는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야 했고(출23:14-17), 하나님의 성전을 찾을 때에 빈 손으로 찾아 나오지 못하게 했다(출34:20, 신16:16).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찾을 때는 반드시 감사의 예물을 준비하게 하셨고, 그 예물을 성전에 있는 연보궤에 하게 하셨다. 곡식과 포도주, 기름 등은 그릇을 두는 골방에 두게 하셨다(느10:39). 연보궤는 성전 안 여자의 뜰의 벽을 향해 있었다 한다. 놋쇠로된 13개의 투입구를 가진 나팔형의 궤로서 9개는 성전세와 제물 대금(제물 대신에 바치는 헌금), 4개는 성전 수선과 장식을 위한 헌금을 넣는 곳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연보궤가 아닌 헌금대를 사용한다. 지금은 자루(손잡이)가 짧아지거나 없어져서 헌금“대”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한 때는 기다란 자루가 있었다. 그래서 비난하는 사람들이 교회는 “잠자리채”로 돈 거두는 곳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저 자신은 “헌금대”의 사용은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아직까지 한번도 “헌금대”로 헌금을 수금해 본 일이 없다. 언제나 지금 우리 교회처럼 “연보궤”를 사용하였다. 우리 한국 교회가 성경적이 아니라고 하면서 왜 “헌금대”를 버리지 못할까 참으로 우습게도 그 이유가 “헌금 액수”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결국은 연보궤를 지켜보고 계시는 주님 앞에서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앞에서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진정한 헌금이 될 수 있는가 더더욱 기막힐 노릇은 교회 지도자들이 몇 푼의 돈을 위해 성경적이 아니라면서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사업이 과연 그 돈 몇 푼에 좌우되는지
그렇다면 그들의 하나님은 그 돈 몇 푼보다 힘이 없는 하나님인지 그게 아니라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겠지만 “매미채로 돈을 걷는 교회”로 비난받아도 좋을 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타당한 이유가 과연 있을까 불신 세력에게, 사탄에게 비난의 “빌미 거리”를 주어야 하는 것인지 왜 그렇게들 돈에 얽매이는 것인가 경제 논리가 사회를 지배하는 “세상의 티”를 교회가 벗지 못했기 때문이다. 곧 물량 주의가 교회 안에도, 신앙 세계에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큰 교회 목사라야 목사답고, 목사의 대접을 받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경제력이 있고, 헌금을 많이 해야 장로가 된다. 돈이 없는 사람은 아예 장로감의 대상에 올라 있지도 못한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장로(長老)”가 무엇인가 연장자요, 노인이란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오랜 삶의 여정을 통해 신앙 경험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이 교회의 어려운 문제를, 살아오면서 채득한 산 경험적 지식으로 해결하도록 한 것이 장로 제도이다. 그런대 오늘의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은 30대, 40대의 장로가 태반이다. 50대에 장립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60대의 장립은 극히 드문 예가 되어 가고 있다. 3-40대의 장로, 그것은 신앙적 경륜을 쌓은 산 지식을 구하자는 장로가 아니라 안타깝게도 돈줄과 연관되어 있다. 이들 젊은 장로를 중심으로 펼칠, 주의 일이 무엇일까 물량 주의가 아니겠는가 교회의 건물이 높고 커야 되고, 모이는 성도의 숫자가 많아야 되고, 좋은 승용차를 타야 성공한 목회자로 평가되어지는 오늘의 현실이 갖어온 물량 주의이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구호는 외쳐지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자신의 편리를 위해 외쳐지는 구호가 되면 안된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자신의 정당화를 위한 방패막이가 되어서는 안된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참으로 자신을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구차한 변명을 내세우지 말고 “성경대로” 연보궤로 돌아가야 한다. 이를 실행하는 분들의 한결같은 말은 “처음은 줄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서 회복이 되었다”이다. 그 몇 푼의 돈으로 하나님을 무능한 하나님으로 보여지게 하지 말자.
3.주님의 마음을 감동케 한 과부의 두 렙돈 본문 43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고 했다. 연보궤 앞에서 무리의 헌금 드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시던 주님, 여러 부자들이 많은 돈을 넣는 것을 보셨다. 분명히 “부자는 많이 넣는데”라고 하셨다. 소위 말하는 큰 돈이다. 거액의 헌금이다. 우리들과는 달리 “거액”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으셨다. 액수에 무관심한 게 아니라 부자가 많이 드리는 것을 당연하게 보신 것이다. 자랑거리로 보신 게 아니다. 칭찬 거리로 보신 게 아니다. 그와는 달리 한 과부가 두 렙돈을 드리는 것을 보셨다. 부자의 많은 액수에 비교한다면 수에 칠 가치도 없는 액수이다. 쌓고 또 쌓아도 부자의 많은 액수만큼 모으려면 어쩌면 한 평생을 모아도 모자랄 것이다. 사람들은 그 과부의 두 렙돈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주목하지도 않았다. 그저 “저 과부도 헌금 드리나 보다”이다. 그까짓 동전 두 개, 있으나 마나 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주님은 달랐다. 과부의 헌금 드리는 것을 보시고 잔잔한 감동을 받으신다. 일반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랐다. 일반 사람들의 눈길과는 달랐다. 주님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받으신다. 주님은 과부의 두 렙돈 헌금에서 물질보다 정성을, 양보다 질을, 액수보다 비율을 보신 것이다. 부자의 많은 돈 보다 실상은 더 많다고 하셨다.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하셨다.
이는 주님의 관심은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표준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드리는 헌금의 액수를 보시는 게 아니라 그 마음의 정성을 보신다는 것이다. 진실성을 보신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5절에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당시 정탐꾼의 보고를 듣는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의 소수의 보고는 무시되고, 다수인 열 명의 보고를 채택했다. 그 보고 내용의 정확성이나 진실성을 살펴본 것이 아니라 다수를 따랐다. 곧 물량 주의 원칙으로 처리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고, 급기야 “새 지도자를 뽑아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부르짖음이 난무했다. 이를 지켜보시던 하나님이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저들을 광야에 버리셨다. 바로의 손에서 건져 내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며, 광야를 통과케 하신 하나님을 잊은 자들이다. 그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 내려 먹이시고, 바위에서 생수를 마시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것이다. 그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지 못하는 행동이다.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 그들의 보고는 열 명의 보고와는 전혀 달랐다. 그곳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그 땅의 네피림의 후예 아낙 자손을 두려워 말라. 저들의 보호신은 떠났고, 그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리니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에는 진실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물량 주의, 대세 주의, 다수 주의에 빠진 저들에게는 헛소리로, 미친 소리로, 자기들만 하나님을 아는 체 하는 소리로 들렸다. 하나같이 돌을 들어 쳐죽이려 했다. 이렇게 물량 주의 앞에서는 소수의 목소리는 무시되어지고, 짓밟히게 되고, 쳐죽임을 당하게 된다. 소수의 진실된 목소리가 다수의 힘있는 소리에 억눌려지고 만다. 큰 소리의 난무 앞에 작은 소리는 들려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세미한 목소리도 듣고 계시는 하나님, 그 목소리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다 듣고 계신다. 절대 다수의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큰 소리보다 여호수아 갈렙 두 사람의 묻혀진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신다. 내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비록 적더라도 진실의 목소리, 여호와 의뢰하는 자의 목소리,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는 믿음의 목소리를 들으신다. 내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다 광야에 버리리라. 비록 소수이나 여호수아 갈렙만은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리라. 다수 주의 하나님이 아니다. 물량 주의의 하나님이 아니다. 대세 주의의 하나님도 아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의 모든 여건과 환경을 초월해 계시는 초월자 하나님이시다. 전능자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요, 그 예수님이 연보궤에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우리 성도들의 손길을 지켜보고 계신다. 나를 지켜 보고 계시는 그 주님 앞에서 헌금을 드리자. 사람 앞에서 드리는 자가 되지 말자. “헌금대”가 아니면 안되는 헌금 그런 헌금으로 주님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우리 한번 깊이 생각해 보자.
4.사라져 가는 과부의 두 렙돈 헌금 본문 42절에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고 했다. 두 렙돈은 한 고드란트이다. 렙돈은 헬라 화폐이고, 고드란트는 로마 화폐이다. 한 데나리온이 하루의 품삯인데, 1 데나리온은 16 앗사리온이다. 1 앗사리온은 4 고드란트이다. 1 고드란트는 2 렙돈이다. 과부의 드린 두 렙돈은 결국 하루의 품삯의(남자) 1/64이다. 하루의 품삯을 60,000원으로 계산하면
1,000원에 조금 모자란다. 그 당시로 보면 통용되는 화폐 중에서 가장 작은 동전 두 닢이다. 좀더 쉽게 말하면 제일 작은 동전 두 닢을 쨍그랑하고 헌금한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 과부의 헌금에 잔잔한 감동을 받으신 것이다. 바리세인의 외식(外飾)이 곧 유대인의 외식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나의 잘남을 자랑하고 뽐내며 남의 못남을 업수히 여기고 짓밟는 시대이다. 그러한 시대 상황을 잘 알면서도 과부는 동전 두 닢을 쨍그랑하고 헌금했다. 가진 자들의 조소와 잘난 자들의 업수히 여김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정성을 모았다. 그 점에 주님이 감동한 것이다. 본문 43-44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했다. 주님이 내리신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헌금에 대한 평가이다. 그 시대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바리세인들의 평가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외식으로 가득한 그들의 세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평가이다. 과연 바리세인들의 시대에만 국한된 문제일까 오늘의 우리 한국 교회는 이 점에서 자유할 수 있는가 불신 세력과 사탄의 세력들은 오히려 지금이 더하다고 비난하고 조롱한다. 그들에게 빌미를 주리만큼 “강단의 소리”도 대단하다. “그까짓 동전 몇 푼이 헌금이냐 거지에게 주어 보아라. 받아 가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하나님이 거지 보다 못하냐”고 외친다. 그러나 그 외침에 상처를 입는 심령도 있다. 그래서 매 주일 주일 헌금을 드리지 못하고 모아서 한꺼번에 한다는 이도 있다.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은 사라져 가고 있다. 주님의 마음을 잔잔하게 감동시킨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은 사라져 가고 몇 십억, 몇 백억의 헌금이 박수갈채를 받는다. 과연 주님도 시대의 조류를 따라 이들의 박수갈채에 함께 하실까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하실까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더 큰 것으로 맡기리라” 축복하실까 히브리서 13: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사라져 가는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을 바라보고 계신다. 기다리고 계신다. 주님은 오늘도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을 부자의 많은 돈 보다 더 크게 보고 계신다. 칭찬하고 계신다. 주님의 평가의 잣대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통일하시다. 오늘도 그 주님이 살아 계셔서 연보궤에 헌금하는 나의 손길을 지켜보고 계신다. 우리 그 주님 앞에서 내 정성을 모은 헌금, 비록 적지만 과부의 동전 두 닢에 불과한 적은 액수지만, 내 주님 앞에서 나의 진실된 감사의 예물을 드리자. 저는 얼마전 어느 집회에 참석하여 헌금 시간에 헌금을 위해 대표 기도하는 분의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집회 본부에서 나누어준 헌금 봉투에 헌금을 넣는 “바스락, 바스락” 하는 소리에 기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왜 그럴까 예배 장소 입구에서 예배 참석자에게 헌금 봉투를 나누어준 준비의 불충실한 면도 있겠지만 그것이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남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이리라. 기도하기 전에나 기도한 후에도 얼마든지 헌금 봉투에 돈을 넣을 수 있지 않는가 내 영혼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으신 주님, 그 주님이 지켜보고 계시는 앞인데 과연 그 주님 앞에 드리는 진실된 감사의 예물일까 너무도 가슴이 갑갑해 왔다. 왜 그럴까 오늘의 설교는 그때에 왜 그럴까 왜 그럴까 의 연속된 되뇌임 속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말씀이다. 사라져 가는 과부의 두 렙돈 헌금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이 물음이 큰 것을 요구하시는 것인가요 많은 것을 요구하심인가요 나는 너를 위해 내 몸을 내어 놓았는데, 작은 것 가지고 되겠느냐 더 큰 것, 더 많은 것 내어 놓으라는 것인가요 아니다.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을 칭찬하신 주님이다.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더 크게 보신 주님이다. 헌금 액수를 보지 않으시고 그 마음의 정성과 감사 예물의 진실성을 보신 것이다. 만일 부자가 두 렙돈을 드렸다면 감사 예물의 진실성에 책망을 받았을 것이다. 적은 액수가 칭찬의 대상이나 이유가 될 수 없다. 과부라는 가난하고 소외된 형편이 칭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은 과부의 마음을 다하는 정성과 진실성, 그리고 외식함이 없는 곧 사람 앞에서가 아닌 지켜보시는 주님 앞에서 최선을 다한 점이다. 사라져 가는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은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헌금을 못한다는 사실이 있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아무리 적은 액수라도 거기에 정성과 진실이 담기면 주님의 가슴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엄청난 교훈을 주고 있다. 인간적인 생각에서 큰 것에 기죽지 말고, 많은 것에 움추려 들지 말자. 나도 내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다. 정성을 모으고 진실을 담으면 주님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줄 수 있다. 부족하지마는, 보잘 것 없지마는 나도 한번 주님을 감동시켜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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