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 (요1:1-18)
본문
오늘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살펴보고져 한다. 두 주일에 걸쳐 살펴본 바는,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요,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고,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실 때 나의 구주 곧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시기에(본문14절) 그분이 입을 열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나온다. “달리다굼” 하시니 죽은 소녀가 살아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 태초에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던 바로 그 말씀의 능력이다.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인간의 문자로 기록되어질 때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이고 곧 성경이다. 성경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오늘 이 시간에 나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특별한 사람을 부르시어 시대 시대에 필요한 말씀을 들려주시고, 전하게 하시며 또한 기록하게 하셨다. 후대를 위해서 곧 오늘의 나를 위하여 기록하게 하셨다.
우리는 성경 곧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통하여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듣고 체험하고 깨달아야 한다. 그 성경 속에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찾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 성도들이 성경 곧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에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찾는 길은 그 성경 곧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읽고, 듣고, 지키며 사는 것이다. 성경 곧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읽어서 안되면 듣고, 들어도 안되면 믿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지키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처음에는 이해되어지지 않고, 믿어지지 않던 그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임을 깨닫게 된다. 바로 성경 곧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에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만나고, 듣고, 체험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자기 심령 속에 가진 사람들은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역사를 따라 살아가게 된다. 바로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이다.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은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역사를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의 “생활” 곧 “삶” 자체이다. 초대 교회 사도들의 삶 속에 나타난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의 기록이 The Acts of The Apostles 곧 “사도행전”이다.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 그 세 번째로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에 대하여 살펴 보고져 한다.
3.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 본문 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자”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보게 되고, 알게 되고, 체험하게 되고, 깨닫게 된다는 말씀이다.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 나타나는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을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5:16절에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다. 주님이 그를 따르는 제자들, 곧 나를 향하여 이 세상에서 “빛”으로 살라고 하셨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라고 했다. 그래서 너희(신자) 착한 행실을 보고 저희로(불신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다. 바로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의 삶을 강조하시는 말씀이다. 불신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성경을 펴고 요3:16을 읽어 주어도 별로 신통한 게 아니다. 사실상 관심이 없다. 저희로(불신자) 너희(신자)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무슨 뜻일까 바로 저들이 보고 읽고 듣는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곧 성경책이 아니라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 곧 “성도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읽고 듣는다는 것이다. 독생자 예수님이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나타내신 것처럼 우리 성도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 믿지 않는 자들은 성경 속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 속에 나타나는 “서로 사랑하는 삶”을 보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게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를 신앙고백하는 나의 삶이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의 삶이 되고 있느냐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의 삶은 주님이 “화 있을진저”로 저주하시던 바로 그 “외시하는 자”의 삶이 되고 만다(마23:13이하)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 산다는 게 바로 신앙의 삶이다. 우리의 부족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들이 많다. 이는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 내가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2: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 살아가는 것은 “내”가 하는 것 아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 안에 “주”가 살아 계실 때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하는 것 아니요, “내” 안에 사시는 “주”가 하시는 것이다. “내” 안에 영접한(요1:12) “‘주”를 제쳐 두고 “내”가 하려고 하니 안된다.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안되는 것이다. “내” 안에 계신 “주” 바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다. 우리 성도들은 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곧 성경에서 찾고 만나고 영접해야 한다. 듣고 보고 체험하고 깨달아야 한다. 특별난 집회도 아니요, 특별난 기도원도 아닌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곧 성경 속에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있기 때문이다.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곧 성경을 읽고 듣고 지켜 행함으로 우리 성도가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찾고 만나고 듣고 체험하고 깨닫게 되면 그의 삶이 변화된다. 곧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 살아가게 된다. 성경 속에 나타난 예를 찾아보자.
1.수문 앞 광장에서(느8장) 느헤미야 8:8절에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라고 했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벽 중건 공사를 마치고 수문 앞 광장에 이스라엘 온 백성을 모아 놓고 “하나님의 율법책” 곧 성경을 낭독하고 해석하였다. 그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학사 에스라를 통해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접하게 된다.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그들 속에 역사하니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 나타난다. 죄를 뉘우쳐 회개하게 되고(느8:9), 초막절을 지키게 된다. 백성들이 나가서 나무 가지를 취하여 지붕 위에, 뜰 안에, 하나님의 전 뜰에, 수문 광장에, 에브라임 문광장에 초막을 지었으니 여호수아 이후로 잊었던 초막절을 다시 지키게 된다.
2.종교개혁(왕하23장) 왕하 23:2절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거민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무론 노소하고 다 왕과 함께 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라 했다. 성전을 수리하다가 하나님의 율법책을 발견하고(왕하22:8) 여호와의 전에 백성들을 불러 모아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려주었다. 그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듣고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깨달은 요시야 왕과 백성들은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 삶이 변화된다. 곧 종교 개혁이 이루어진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고 결심한다.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기명을 여호와의 전에서 내어다가 불살랐다. 산당을 헐어 버리고, 그곳 제사장을 폐하고, 우상숭배를 위해 만든 각종 신상을 제하였다. 그리고 신접자, 박수, 우상의 모든 가증한 것을 제하고 유월절을 지키니 사사 시대 이후 처음이었다.
3.노아-방주 예비 히브리서 11: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고 했다. 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받았다.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을 바라보시며 인간 지으심을 후회하시며 120년 후의 대홍수 심판을 예고하셨다. 이를 가리켜 “아직 보지 못하는 일”이라고 했다. 아직은 보지 못할 일이지만 장차는 반드시 보게 될 일이다. 모두가 다 겪게 될 일이다. 그래서 노아는 그 일을 위하여, 120년 후의 홍수를 대비하여 방주를 지었다. 노아는 산을 오르내리며 남들의 방해와 비난과 조롱과 비웃음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남들의 눈에는 그것이 미친 짓이요, 얼빠진 짓이요, 넋 나간 짓이지만 노아는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는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있기 때문이다. 하루도 아니고, 한 달도 아니고, 1년도 아니요, 100년도 아니요, 120년 간이나 산꼭대기를 오르내리는 일도 참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그만둘 수 없었다. 게으름을 피울 수도 없었다. 그러한 노아의 삶이 바로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이다. 노아는 산을 오르내리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홍수심판을 전하고 있다. 어떻게 하여야 그 홍수심판에서 구원 얻을 수 있는가를 삶을 통해 증거하고 있다.
4.아브라함-믿음으로 히브리서 11:8절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곧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들었다. 그의 삶은 곧 바로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 나타났다. “장래 기업”의 땅을 향해 나아가나 갈 바를 알지 못했다. 단지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인도 따라 갈 뿐이다. 그 “장래 기업”을 향해 한평생 나그네의 길을 걷는다. 나온바 본향이 아닌 “더 나은 본향”을 향해 나그네의 여정을 계속했다. 그의 삶이 바로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이다. “네 자손으로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받았다(창15:5). 곧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받았다.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능력으로 100세에 이삭을 얻었다. 그의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아들 이삭을 바치라 하신다. 사랑하는 아들이요, 독자 이삭이다.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는다는 약속을 받은 자이다. 그러기에 주실 때의 기쁨보다 바치라 하실 때의 야속함이 더 크다. 그러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받은 아브라함이기에 순종할 수밖에 없다.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능력을 알기에 죽은 자 가운데서 “능히” 살리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삭을 모리아 산정에서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이다. 그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의 삶이 “여호와이레”의 역사를 가져 왔고, “여호와이레”의 기적을 가져 왔고, “여호와이레”의 신앙을 가져 왔다(창22:14).
5.요셉-꿈(Vision) 히브리서 11:22절에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라고 했다. 요셉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꿈(Dream)을 꾸고, 꿈(Vision)을 가진 자이다. 곧 꿈을 통하여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받은 자이다. 꿈을 가진 자는 그 꿈 때문에 살고, 그 꿈을 위해서 살아간다. 그래서 그 꿈으로 인한 시련도, 고난도, 역경도 참고 이긴다. 그 꿈을 향한 간절한 기대와 소망으로 형들의 시기와 미움도 참아내고,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도 물리치고, 억울한 누명과 옥살이도 이겨낸다. 꿈(Vision)을 가진 자만이 꿈(Vision)을 줄 수 있다. 곧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가진 자만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줄 수 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가지고 나가라고 명함으로 출애굽 의 꿈(Vision)을 히브리 민족의 가슴속에 심어 주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이다.
6.바울-심령에 메임을 받아 사도행전 20:22절에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途上)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사울아!” “사울아!” 부르시는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들었다.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바울의 가슴속에 함께 하니 그의 삶이 변했다. 곧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 나타났다. 그의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서의 삶을 기록한 것이 사도행전이요, 베드로의 삶의 기록에 이은 기록으로 사도행전의 ⅔ 정도를 차지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의 삶을 “심령에 메임”을 받은 삶이라고 했다. 갈라디아 2:20절에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다. 사도 바울이 사도의 행적을 남기는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서의 그의 삶이 “자신의 삶”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삶”이라고 했다.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다. 죽고 없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내 안에 살아 있는 예수 곧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역사하심을 따라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역사를 성령님의 역사 라 했고, 자신은 성령님의 메임을 받아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 살아간다고 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성령님의 행전(The Acts of The Holy Spirit)이라고도 한다. 그 성령님에 자신의 “심령이 메임”을 받아, 그 성령님이 인도하는 데로 끌려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했다(행21:13). 나는 주 예수를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의 삶이다.
7.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 히브리서 11:38절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고 했다. 이런 사람이 누구인가 곧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그 가슴속에 있고,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의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님에 사로잡힌 자들이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다. 부활의 산 소망이 저들의 가슴속에 있었기에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치 아니하였다. 헤롯왕의 칼날에 죽은 야고보(행12:1), 구전에 의하면 므낫세 왕의 톱날에 잘려 죽은 이사야, 돌세례에 죽은 스데반(행7:59), 양과 염소의 가죽을 쓰고 사막을 배회하다 죽어간 성도들, 독사 자루 속에서 죽어간 성도들, 그리고 저 풀무불 속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우리가 찾아보면 참으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저들이 세상을 이긴 힘이 무엇인가 바로 주님이 들려주신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말씀이다. 바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다. 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내 심령 속에 살아 역사할 때, 나의 “삶”은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 나타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하면, 우리 성도들은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의 “삶”이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보는 “성경”이라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의 말 한마디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야 하고,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5:16절에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다. 믿지 않는 내 이웃이 나의 신앙생활을 지켜보고, 나의 삶을 바라보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가 우리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의 부족과 연약으로 주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는 않고 있는지….
우리는 성경 곧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통하여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듣고 체험하고 깨달아야 한다. 그 성경 속에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찾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 성도들이 성경 곧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에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찾는 길은 그 성경 곧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읽고, 듣고, 지키며 사는 것이다. 성경 곧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읽어서 안되면 듣고, 들어도 안되면 믿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지키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처음에는 이해되어지지 않고, 믿어지지 않던 그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임을 깨닫게 된다. 바로 성경 곧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에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만나고, 듣고, 체험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자기 심령 속에 가진 사람들은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역사를 따라 살아가게 된다. 바로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이다.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은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역사를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의 “생활” 곧 “삶” 자체이다. 초대 교회 사도들의 삶 속에 나타난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의 기록이 The Acts of The Apostles 곧 “사도행전”이다.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 그 세 번째로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에 대하여 살펴 보고져 한다.
3.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 본문 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자”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보게 되고, 알게 되고, 체험하게 되고, 깨닫게 된다는 말씀이다.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 나타나는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을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5:16절에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다. 주님이 그를 따르는 제자들, 곧 나를 향하여 이 세상에서 “빛”으로 살라고 하셨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라고 했다. 그래서 너희(신자) 착한 행실을 보고 저희로(불신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다. 바로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의 삶을 강조하시는 말씀이다. 불신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성경을 펴고 요3:16을 읽어 주어도 별로 신통한 게 아니다. 사실상 관심이 없다. 저희로(불신자) 너희(신자)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무슨 뜻일까 바로 저들이 보고 읽고 듣는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곧 성경책이 아니라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 곧 “성도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읽고 듣는다는 것이다. 독생자 예수님이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나타내신 것처럼 우리 성도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 믿지 않는 자들은 성경 속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 속에 나타나는 “서로 사랑하는 삶”을 보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게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를 신앙고백하는 나의 삶이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의 삶이 되고 있느냐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의 삶은 주님이 “화 있을진저”로 저주하시던 바로 그 “외시하는 자”의 삶이 되고 만다(마23:13이하)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 산다는 게 바로 신앙의 삶이다. 우리의 부족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들이 많다. 이는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 내가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2: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 살아가는 것은 “내”가 하는 것 아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 안에 “주”가 살아 계실 때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하는 것 아니요, “내” 안에 사시는 “주”가 하시는 것이다. “내” 안에 영접한(요1:12) “‘주”를 제쳐 두고 “내”가 하려고 하니 안된다.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안되는 것이다. “내” 안에 계신 “주” 바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다. 우리 성도들은 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곧 성경에서 찾고 만나고 영접해야 한다. 듣고 보고 체험하고 깨달아야 한다. 특별난 집회도 아니요, 특별난 기도원도 아닌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곧 성경 속에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있기 때문이다.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곧 성경을 읽고 듣고 지켜 행함으로 우리 성도가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찾고 만나고 듣고 체험하고 깨닫게 되면 그의 삶이 변화된다. 곧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 살아가게 된다. 성경 속에 나타난 예를 찾아보자.
1.수문 앞 광장에서(느8장) 느헤미야 8:8절에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라고 했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벽 중건 공사를 마치고 수문 앞 광장에 이스라엘 온 백성을 모아 놓고 “하나님의 율법책” 곧 성경을 낭독하고 해석하였다. 그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학사 에스라를 통해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접하게 된다.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그들 속에 역사하니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 나타난다. 죄를 뉘우쳐 회개하게 되고(느8:9), 초막절을 지키게 된다. 백성들이 나가서 나무 가지를 취하여 지붕 위에, 뜰 안에, 하나님의 전 뜰에, 수문 광장에, 에브라임 문광장에 초막을 지었으니 여호수아 이후로 잊었던 초막절을 다시 지키게 된다.
2.종교개혁(왕하23장) 왕하 23:2절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거민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무론 노소하고 다 왕과 함께 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라 했다. 성전을 수리하다가 하나님의 율법책을 발견하고(왕하22:8) 여호와의 전에 백성들을 불러 모아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려주었다. 그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듣고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깨달은 요시야 왕과 백성들은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 삶이 변화된다. 곧 종교 개혁이 이루어진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고 결심한다.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기명을 여호와의 전에서 내어다가 불살랐다. 산당을 헐어 버리고, 그곳 제사장을 폐하고, 우상숭배를 위해 만든 각종 신상을 제하였다. 그리고 신접자, 박수, 우상의 모든 가증한 것을 제하고 유월절을 지키니 사사 시대 이후 처음이었다.
3.노아-방주 예비 히브리서 11: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고 했다. 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받았다.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을 바라보시며 인간 지으심을 후회하시며 120년 후의 대홍수 심판을 예고하셨다. 이를 가리켜 “아직 보지 못하는 일”이라고 했다. 아직은 보지 못할 일이지만 장차는 반드시 보게 될 일이다. 모두가 다 겪게 될 일이다. 그래서 노아는 그 일을 위하여, 120년 후의 홍수를 대비하여 방주를 지었다. 노아는 산을 오르내리며 남들의 방해와 비난과 조롱과 비웃음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남들의 눈에는 그것이 미친 짓이요, 얼빠진 짓이요, 넋 나간 짓이지만 노아는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는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있기 때문이다. 하루도 아니고, 한 달도 아니고, 1년도 아니요, 100년도 아니요, 120년 간이나 산꼭대기를 오르내리는 일도 참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그만둘 수 없었다. 게으름을 피울 수도 없었다. 그러한 노아의 삶이 바로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이다. 노아는 산을 오르내리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홍수심판을 전하고 있다. 어떻게 하여야 그 홍수심판에서 구원 얻을 수 있는가를 삶을 통해 증거하고 있다.
4.아브라함-믿음으로 히브리서 11:8절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곧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들었다. 그의 삶은 곧 바로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 나타났다. “장래 기업”의 땅을 향해 나아가나 갈 바를 알지 못했다. 단지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인도 따라 갈 뿐이다. 그 “장래 기업”을 향해 한평생 나그네의 길을 걷는다. 나온바 본향이 아닌 “더 나은 본향”을 향해 나그네의 여정을 계속했다. 그의 삶이 바로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이다. “네 자손으로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받았다(창15:5). 곧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받았다.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능력으로 100세에 이삭을 얻었다. 그의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아들 이삭을 바치라 하신다. 사랑하는 아들이요, 독자 이삭이다.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는다는 약속을 받은 자이다. 그러기에 주실 때의 기쁨보다 바치라 하실 때의 야속함이 더 크다. 그러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받은 아브라함이기에 순종할 수밖에 없다.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능력을 알기에 죽은 자 가운데서 “능히” 살리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삭을 모리아 산정에서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이다. 그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의 삶이 “여호와이레”의 역사를 가져 왔고, “여호와이레”의 기적을 가져 왔고, “여호와이레”의 신앙을 가져 왔다(창22:14).
5.요셉-꿈(Vision) 히브리서 11:22절에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라고 했다. 요셉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꿈(Dream)을 꾸고, 꿈(Vision)을 가진 자이다. 곧 꿈을 통하여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받은 자이다. 꿈을 가진 자는 그 꿈 때문에 살고, 그 꿈을 위해서 살아간다. 그래서 그 꿈으로 인한 시련도, 고난도, 역경도 참고 이긴다. 그 꿈을 향한 간절한 기대와 소망으로 형들의 시기와 미움도 참아내고,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도 물리치고, 억울한 누명과 옥살이도 이겨낸다. 꿈(Vision)을 가진 자만이 꿈(Vision)을 줄 수 있다. 곧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가진 자만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줄 수 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가지고 나가라고 명함으로 출애굽 의 꿈(Vision)을 히브리 민족의 가슴속에 심어 주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이다.
6.바울-심령에 메임을 받아 사도행전 20:22절에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途上)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사울아!” “사울아!” 부르시는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들었다.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바울의 가슴속에 함께 하니 그의 삶이 변했다. 곧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 나타났다. 그의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서의 삶을 기록한 것이 사도행전이요, 베드로의 삶의 기록에 이은 기록으로 사도행전의 ⅔ 정도를 차지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의 삶을 “심령에 메임”을 받은 삶이라고 했다. 갈라디아 2:20절에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다. 사도 바울이 사도의 행적을 남기는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서의 그의 삶이 “자신의 삶”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삶”이라고 했다.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다. 죽고 없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내 안에 살아 있는 예수 곧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역사하심을 따라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역사를 성령님의 역사 라 했고, 자신은 성령님의 메임을 받아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 살아간다고 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성령님의 행전(The Acts of The Holy Spirit)이라고도 한다. 그 성령님에 자신의 “심령이 메임”을 받아, 그 성령님이 인도하는 데로 끌려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했다(행21:13). 나는 주 예수를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의 삶이다.
7.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 히브리서 11:38절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고 했다. 이런 사람이 누구인가 곧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그 가슴속에 있고,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의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님에 사로잡힌 자들이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다. 부활의 산 소망이 저들의 가슴속에 있었기에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치 아니하였다. 헤롯왕의 칼날에 죽은 야고보(행12:1), 구전에 의하면 므낫세 왕의 톱날에 잘려 죽은 이사야, 돌세례에 죽은 스데반(행7:59), 양과 염소의 가죽을 쓰고 사막을 배회하다 죽어간 성도들, 독사 자루 속에서 죽어간 성도들, 그리고 저 풀무불 속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우리가 찾아보면 참으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저들이 세상을 이긴 힘이 무엇인가 바로 주님이 들려주신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말씀이다. 바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다. 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내 심령 속에 살아 역사할 때, 나의 “삶”은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 나타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하면, 우리 성도들은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의 “삶”이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보는 “성경”이라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의 말 한마디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야 하고,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5:16절에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다. 믿지 않는 내 이웃이 나의 신앙생활을 지켜보고, 나의 삶을 바라보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가 우리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의 부족과 연약으로 주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는 않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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