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마27:32-56)

본문

“진주 한 알” 아름답고 귀한 보석, 그 놀라운 아름다움으로 여인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까지진주 조개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다. 오랜 세월의 괴로움을 참아 낸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라고도 볼 수 있다. 고난 주일을 맞이하여, 부활의 큰 영광을 위해 골고다의 길을 걸어가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며고난이 주는 참된 의미를 알아야 한다.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그 밝은 빛을 사모하는 우리 성도들도 주와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해 또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 내게 주어진 고난의 길들을 오늘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며어떻게 감당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자.
1.하나님 아버지께 버림받는 고통을 보아야한다. 주님은 본문 46절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곧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울부짖어셨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가상 칠언” 중에서 유일하게 괴로움에 몸부림 치시며 울부짖는 소리이다.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 받는 고통이 가장 큰 괴로움이란 말이다. 우리 주님 걸어가신 고난의 발자국들은…
1.하늘 영광의 보좌를 비어 두시고 이 땅에 오신 자체가 수난이다(빌2:6-7)→ 늘 얘기 하지만 우리 인간이 돼지 우리 속에서 사는 것 보다 더한 비하요 강등이다.
2.육체적 고통→십자가를 짊어지심 당시 죄수들은 자신이 처형될 십자가를 스스 로 운반했다. 주님도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시다 넘 어지고 자빠져 팔과 무릎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으셨다. 본문 32절에 보면 잔혹한 로마 병정들 마져 차마 볼 수 없어 구레네 시몬에게 억지로 대신 십자가를 지게 했다.
3.정신적 고통→십자가에 달리심 십자가는 극형의 도구로서 당시 죄질이 나쁜 죄수를 처형할 때 사용되어졌다. 수치의 대명사이다. 그 보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하였기 때문이 다(갈3:13) 곧 수치와 저주의 표상이 되어 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변하여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주님이다.
4.버림받는 고통→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고통, 그 고통이 가장 괴로웠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울부짖어셨다. 33년의 생애 가운데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다. 버림받는 고통. 그것도 나의 하나님께, 나의 아버지로 부터 버림받는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버림받음 자체가 곧 저주요 멸망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이러한 고통이 자신의 죄로 인함이 아니라 남의 죄값을 치르는 대속의 고통이기에 그 아픔이 더 하였다. 주님이 치르시는 고통이 바로 내가 치루어야할 죄값이요 고통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성도들은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주의 이름으로 남의 고통에 동참하며 짐을 함께 나누어 져야한다.
2. 독생자를 버려야 하는 고통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은 다시 말하면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를 버려야 하는 고통이다.
1.다른 길이 없기에→ 인류 구원 인류의 조상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범죄 하게 되고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다. 죄와 허물로 영 죽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엡2:2)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롬6:23)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죄 없는 한 생명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범죄한 아담의 후손은 모두가 죄인으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아래 놓여 있다. 저와 여러분도 다 죄인이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의 성씨를 따라 김가 혹은 이가 박가로 태어난다. 내가 김씨가 좋다고 김씨가 될 수 없다. 김씨네 가풍을 따르며 김씨 처럼 산다고 김씨가 되는 것 아니다. 태어나면서 내가 좋든 싫든 김가 이가 박가로 태어난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롬3:10) 다시 말해 인간은 인간 자신에 의해 구원 되어질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죄 없으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를(고후5:21) 인류의 구원의 죄값을 대신 치르게 하시는 죽음의 자리에 내어놓으셨다.
2.차마 볼 수 없어 외면→ 백일이 무광 본문 45절에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신 동안 제 6시19시 까지 하늘의 해가 빛을 잃고 어둠이 온 땅에 가득했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셨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 예수의 죽어 가는 모습을 차 마 볼 수 없어 얼굴을 돌리셨다. ⓑ.온 세상의 죄가 그 곳에 다 모여 있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 예수에게 전가되 어 그 추한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얼굴을 돌리셨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독생자도 버리시는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무엇을 버릴 수 있는가
3.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고통을 보아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견딜 수 없는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일이다.
1.내가 목마르다 요한 19:28절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다.
2.다 이루었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남기신 말씀이다(요19:30) 운명하시기 까지, 최후의 순간까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모습을 본다. 우리 성도들도 이 생명 다하는 날 까지, 최후의 순간까지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자아를 희생할 줄 아는 자가 되자 내일의 행복, 하늘의 소망, 더 나은 본향을 향한 꿈을 가지고 사는 자는 오늘의 희생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는 부활의 영광은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 주님이 당하신 버림받는 고통이 있는가 부모,부부,형제,친척,이웃,친구 등 차마 볼 수 없어 얼굴을 돌리며 독생자를 버리듯 버려야 하는 고통이 있는가 부모,부부,형제,친척,이웃,친구, 또 부귀와 명예 등 이 고난의 길을 우리 성도들은 걸어야 한다. 그 길이 주께 합당한 길이기에(눅14:26),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에(롬8:18) 참고 이겨야 한다. 나에게 고난이 있음은 아직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이다. 주어진 고난을 너무 아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그 고난의 의미를 찾아보자. 하나님이 내어버려 두신 자는(롬1:24,26,28) 사랑의 채찍으로 치시는 시련의 고통도 없다. 이러한 형통은 부러워할 대상도 아니다(잠24:1,19) 내게 주어진 고난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자. 그 고난을 통해 연단한 금을 원하시는지(벧전1:7) 아니면 잘못된 내 삶의 길의 궤도 수정을 원하시는지를 잘 살펴 보아야 한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915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