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의 관계 (롬3:19-31)
본문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어떠한가 율법 따로, 복음 따로 일까 그렇게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율법은 세례 요한의 때까지이고(눅16:16), 약속한 자손이 오시기까지이다(갈3:19).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라고 하셨다(롬10:4).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서 하나님께 찾아가는 “길”로써의 “율법”을 말하고 있다. 그 길을 따라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공의의 하나님이 받아 주시느냐 마느냐 의 “판단의 기준”이 되는 “의미”의 “율법”은 아니다. 곧 “하나님의 요구”로서의 율법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율법”이다. 율법 “본래의 의미”가 끝난다는 것은 아니다. 곧 “율법의 요구”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은 아니다. 쉽게 말씀 드리면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제1계명의 요구는 모세 때나 지금이나 살아 있다는 말이다. “율법”이 끝났으니까 “우상”을 섬겨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는 말이다. 율법 따로, 복음 따로…. 그렇게 될 수 없다. “율법의 완성”이 곧 “복음”이다. 우리 인간이 공의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요구(율법의 요구)”를 “완전 충족(100%)”할 수 없기에, 사랑의 하나님이 나와 똑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율법의 요구” 충족을 공의의 하나님 앞에 나를 대신해서 “완전 충족(100%)”시켜 드렸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해주시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나를 구원해 주신 것이, “기쁜 소식”이요 “복된 소식”이다. 바로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강령도 “사랑”이요, “복음”의 강령도 “사랑”이다.
1.율법이 무엇인가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법”으로 단순한 인간 세계의 법이 아니다. “율법”을 접근하면서 “법”의 개념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지켜야 된다”, “그렇지 않다”의 논의가 발생한다. 율법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했는데, “살인”하지 않았다 해서 “의”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범죄 전 아담이 “살인”을 하지 않았다 해서 그것으로 “의롭게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율법”은 “법”이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이다.
⑴.율법은 공의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표준”이다. 에스겔 18:9절에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히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정녕 살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다. 율법은 좁게 보면 “십계명”이요, 넓게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키 위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이 “바른 관계”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 목적”을 이루는 것이요, 인간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자신을 향한 “창조 목적”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하는 것이다. “율법”을 접근하든, “복음”을 접근하든, 결국 하나님 앞으로 접근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그 “창조 목적”을 잊어서는 안된다. “바른 관계의 정립”, 바로 이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또 “하나님의 요구”이다. 율법은 “의의 표준”으로 공의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잣대”이다. 이 공의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요구의 충족”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 곧 “구원”이 없다. 다른 말로 “바른 관계”가 없다. “구원”이 없다. 그 공의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요구 충족”을 “율법”을 통해 알려 주셨다. 곧 “율법의 요구”이다. 이 “율법의 요구”를 100% “요구 충족”을 이루면 공의의 하나님이 “의”로 “선언”하신다. 곧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을 얻는다. 곧 “바른 관계”가 정립된다. 에스겔 18:9절에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히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정녕 살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다. 이 말씀을 분석해 보면
1.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진실히 행할진대 하나님의 요구 충족
2.그는 의인이니 정녕 살리라 → 하나님의 약속, 선언
3.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 하나님의 공포
※하나님의 약속 혹은 선언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공 포했다. “율법의 요구”에 인간이 “요구 충족”을(100%) 시키지 못함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의, 구원, 관계 정립이 안 됨)-“율법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의를 선언할 능력이 없어서, 아니면 의의 표준이 못 되어서)-공의의 하나님이 “의롭다함”을 “선언”하시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모세의 율법”으로 국한시키면 안된다.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이 그때까지 주셨던, 또 앞으로도 필요한 하나님의 요구를 성문화(成文化) 해서 주신 것이다. “율법”을 인간 세계의 “법”이란 차원으로 보면 안된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법으로 그 속에 담겨져 있는하나님의 요구로 보아야 한다. 곧 “율법”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보아야 한다. 창세기 26:5절에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고 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셨던, “내 말(하나님의 말씀)의 순종”, “내 명령”, “내 계명”, “내 율례”, “내 법도” 등, 이 모두를 “지키라고 요구”하심이 곧 “율법”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요구”이다. 창세기에서 아담이나 그 가족에게 “제사법”을 주신 기록이 없다. 그렇다고 그들에 “제사법”을 안 주었다는 것이 될 수 없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나오고, 그 “제물”의 “열납” 문제로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발생 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특별 계시”가 성경에 다 기록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특별 계시”도 있다는 말이다. 모세 때까지 성경에 기록 되지 않은 “특별 계시”를 “성문화”해서 주셨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요구는 범죄 전 아담에게도 “요구 충족”을 원하셨고, 범죄 후 아담과 그 후손 모두에게도 “요구 충족”을 원하고 계신다. 그 어느 누구도 이 “요구 충족”을 100% 이루지 못하고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구원”도, “바른 관계”도 없다. 범죄 전 아담은 자신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를 이루어 드릴 수 있었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이룩해야 했는데-(생명나무 선택)-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등을 보이고,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에게로 향해 버렸다.-(8월 17일자 설교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신 이유” 참조)-하나님 자신과의 “바른 관계”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에 “요구 충족”을 못한 것이 “죄”이다. 곧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표준”에 미달하는 것이 “불의”이고, 그 “불의”가 곧 “죄”라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금단의 열매만을 놓고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마라”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이고, 이 요구에 “거역”해서, “불순종”해서, 또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의심”해서, 아담이 “따먹은 것”이 “요구 충족”을 못한 것이고, “의의 표준”에 미달한 것이다. 아담의 그 행동을 공의의 하나님이 자신의 “의의 표준”으로 판단하실 때, 다시 말해서 “의의 잣대”로 재어 보고, “의의 저울”로 달아보실 때, “요구 충족”의 미달로 “의”가 아닌 “불의”이다. 곧 “죄”라고 판단하신다는 것이다. “율법의 기능”을 “죄를 깨닫게함”뿐이라는 것으로 국한 시켜서 “율법”이 “죄의 표준”이 된다는 것은 “율법의 요구”가 “죄의 요구”가 되고, 결국 하나님은 “죄를 요구”하신다는 결론이 된다. 물론 “율법”을 “하나님의 요구”로 보지 않으면 달라진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요구”를 인간에게 알려 주신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따라온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저로서는 “율법” 외에 달리 “더 좋은 것”을 “성경”에서 찾을 수 없었다. “율법의 요구”는 공의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요구”이고, “의의 표준”이다. 이 요구가 채워질 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이루어진다. “바른 관계의 정립”이 곧 “구원”이다.
⑵.범죄한 아담과 그 후손이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할 수 있느냐 로마서 3: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다. “율법”을 “법”의 개념으로 생각하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은 “살인”을 하지 않으면 “율법”이 “지켜지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강령”은 생각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마22:36-40). 다 알고 있는 주님의 말씀이다.
첫째도 사랑, 둘째도 사랑, 아마 셋째, 넷째…. 열째를 말씀하시더라도 “사랑”이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요구”에서 “하나님의 요구”는 “살인”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요구”가 “완전히 충족” 되어진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살인하지 말고, 내가 죽이고 싶도록 미운 그 사람을(요일3:15)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의 요구”이고, “하나님의 요구”이다. 자꾸만 “율법”을 접근하면서 “인간의 표준”에 놓고 바라보고, “인간의 사고 방식”으로 접근하니까 “율법”이 “하나님의 요구”로 보여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차원”에서,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사고 방식”으로 “율법”을 접근하니, 율법이 “불완전”하게도 보이고, “죄의 표준”으로도 보이고, 율법의 요구가 “끝난 것”으로도 보인다. 갈라디아 2:16절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했다. 범죄한 아담이나 그 후손이 “율법의 요구”를 100% “요구 충적”을 할 수 있는가 물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율법의 요구” 자체가 “그림의 떡”이라는 반문이 나온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할 것을 아시고 계신다. 아담이 아무리 뛰고 나는 재주가 있어도 절대로(!) 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아담에게 “능력이 없어서”라는 차원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속죄의 원칙”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다. 아담의 속죄도 “생명에는 생명”으로 갚아야 한다. 그렇다고 아담이 자신을 “속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림으로 “자신의 속죄”를 이룰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아담은 하나님 앞에 “일백 번 고쳐 죽어” 자신의 몸을 “속죄의 제물”로 드려도 “자신의 속죄”를 이룰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죄로 “더렵혀진 아담”은 “속죄의 제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범죄한 아담과 그 후손이 “율법의 조항”을 얼마나 지킬 수 있느냐 의 차원이 아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요구”에 따라 범죄한 아담은 “정죄” 되어지고 “징벌” 되어져서 “하나님의 저주”아래 놓이게 된다.
창세기 6: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했다. 범죄 전 아담 곧 “사람”이 “육체”가 된 것이다.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아담은 이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입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육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벗”(사41:8) 정도의 관계라 할까. 하여튼 “완전한 바른 관계”는 아닌 관계이었지만, 그나마의 관계도 “단절”이 된다.-(인간적인 의미로 본다면 벗:배필)-곧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고 “생명나무”와는 “화염검”으로(창3:24) “완전 차단”이 되고 만다. 이 “완전 차단”된 상태가 바로 “죽음”이 “선언”된 “육체”가 되었다는 말이다. 곧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었던 “사람”의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이 율법을 다루면서(롬3:20, 갈2:16) 왜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사람이 없다고 하지 않고,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하였을까. 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이라고 하면, “범죄 전 아담”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⑶.영영 사라진 “율법의 요구” 충족의 길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공의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의의 요구”를 범죄한 아담과 그 후손이 “완전 충족”할 수 있는 길은 영영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인간”을 “내 몰라라” 내버려두자니 자신의 “창조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불완전함”도 문제이지만, 자신의 지위를 떠나버린 천사(유1:6) 곧 사탄보다도 “더 큰 사탄”이 존재하게 된다.
히브리서 1:14절에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라고 했다. 이 말은, 천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 아니다. 그 천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켜서 “바른 관계”를 이루었을 때, 곧 “구원” 받았을 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완전히” 살아갈 때, 그 “하나님의 자녀”를 위하여 “돕는 자” 곧 “수종드는 자”로 천사는 창조되어졌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18:10절에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했다. 천사는 실상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지금도 하나님 보좌 앞에서 나를 위해 수종드는 천사가 있다. 이 천사의 주인이 되는 아담이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면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 곧 사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적자”가 된다는 말이다.
⑷.하나님 자신이 책임지시기로
그러므로 하나님은 즉각 “응징”을 하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입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공의의 하나님의 정죄와 징벌의 결과 인간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고 만다. 이렇게 되고 보니 결국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목적”을 이루지 못한 “실패자”가 되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이 모든 일의 “책임”을 지시기로 한 것이다. 창세기 3:14-15절에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할 것은, 죄를 “심문”하는 과정은 아담→ 하와의 순서이고, 죄를 “징벌”하는 과정은 뱀→ 여자→ 아담의 순서이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 창2:17의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자이다. 하와와는 아담 안에서 맺어진 관계이다.
그러므로 아담을 먼저 “심문”한 것이고, “징벌”은 “죄”를 징벌하는 것임으로 “죄”가 존재한(범죄한) 순서대로 “징벌”하신다. “죄의 원흉” 뱀은(요8:44) “심문”할 필요도 없었기에,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묻지도 않고 “징벌”을 하신다. “더욱 저주”를 받아라는 “선언”을 하신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과의 싸움을 “예고”하시고, 그 “싸움의 결과”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겠지만, 그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 여자의 후손이 누구인가 우리 모두는 의심 없이 여자의 후손(창3:15)→ 처녀가 낳을 아들(사7:14)→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 예수로(마1:20-21) 알고 있다. 곧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다(갈4:4)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이 “나사렛 예수”요,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나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요구”, “의의 표준”에 합당한 100%의 “요구 충족”을 이루어주시기 위해, 아담이 실패한 그 책임을 하나님 “자신이 책임”지시려고, 나와 똑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이 사랑의 하나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하신 일”이 복음이요, 그분에 관한 “소식”이 복음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야 했는가. 왜 “율법 아래” 나게 하셨는가. 이 물음이 바로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Key Point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강령도 “사랑”이요, “복음”의 강령도 “사랑”이다.
1.율법이 무엇인가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법”으로 단순한 인간 세계의 법이 아니다. “율법”을 접근하면서 “법”의 개념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지켜야 된다”, “그렇지 않다”의 논의가 발생한다. 율법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했는데, “살인”하지 않았다 해서 “의”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범죄 전 아담이 “살인”을 하지 않았다 해서 그것으로 “의롭게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율법”은 “법”이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이다.
⑴.율법은 공의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표준”이다. 에스겔 18:9절에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히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정녕 살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다. 율법은 좁게 보면 “십계명”이요, 넓게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키 위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이 “바른 관계”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 목적”을 이루는 것이요, 인간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자신을 향한 “창조 목적”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하는 것이다. “율법”을 접근하든, “복음”을 접근하든, 결국 하나님 앞으로 접근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그 “창조 목적”을 잊어서는 안된다. “바른 관계의 정립”, 바로 이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또 “하나님의 요구”이다. 율법은 “의의 표준”으로 공의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잣대”이다. 이 공의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요구의 충족”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 곧 “구원”이 없다. 다른 말로 “바른 관계”가 없다. “구원”이 없다. 그 공의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요구 충족”을 “율법”을 통해 알려 주셨다. 곧 “율법의 요구”이다. 이 “율법의 요구”를 100% “요구 충족”을 이루면 공의의 하나님이 “의”로 “선언”하신다. 곧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을 얻는다. 곧 “바른 관계”가 정립된다. 에스겔 18:9절에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히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정녕 살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다. 이 말씀을 분석해 보면
1.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진실히 행할진대 하나님의 요구 충족
2.그는 의인이니 정녕 살리라 → 하나님의 약속, 선언
3.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 하나님의 공포
※하나님의 약속 혹은 선언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공 포했다. “율법의 요구”에 인간이 “요구 충족”을(100%) 시키지 못함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의, 구원, 관계 정립이 안 됨)-“율법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의를 선언할 능력이 없어서, 아니면 의의 표준이 못 되어서)-공의의 하나님이 “의롭다함”을 “선언”하시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모세의 율법”으로 국한시키면 안된다.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이 그때까지 주셨던, 또 앞으로도 필요한 하나님의 요구를 성문화(成文化) 해서 주신 것이다. “율법”을 인간 세계의 “법”이란 차원으로 보면 안된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법으로 그 속에 담겨져 있는하나님의 요구로 보아야 한다. 곧 “율법”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보아야 한다. 창세기 26:5절에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고 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셨던, “내 말(하나님의 말씀)의 순종”, “내 명령”, “내 계명”, “내 율례”, “내 법도” 등, 이 모두를 “지키라고 요구”하심이 곧 “율법”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요구”이다. 창세기에서 아담이나 그 가족에게 “제사법”을 주신 기록이 없다. 그렇다고 그들에 “제사법”을 안 주었다는 것이 될 수 없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나오고, 그 “제물”의 “열납” 문제로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발생 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특별 계시”가 성경에 다 기록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특별 계시”도 있다는 말이다. 모세 때까지 성경에 기록 되지 않은 “특별 계시”를 “성문화”해서 주셨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요구는 범죄 전 아담에게도 “요구 충족”을 원하셨고, 범죄 후 아담과 그 후손 모두에게도 “요구 충족”을 원하고 계신다. 그 어느 누구도 이 “요구 충족”을 100% 이루지 못하고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구원”도, “바른 관계”도 없다. 범죄 전 아담은 자신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를 이루어 드릴 수 있었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이룩해야 했는데-(생명나무 선택)-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등을 보이고,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에게로 향해 버렸다.-(8월 17일자 설교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신 이유” 참조)-하나님 자신과의 “바른 관계”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에 “요구 충족”을 못한 것이 “죄”이다. 곧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표준”에 미달하는 것이 “불의”이고, 그 “불의”가 곧 “죄”라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금단의 열매만을 놓고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마라”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이고, 이 요구에 “거역”해서, “불순종”해서, 또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의심”해서, 아담이 “따먹은 것”이 “요구 충족”을 못한 것이고, “의의 표준”에 미달한 것이다. 아담의 그 행동을 공의의 하나님이 자신의 “의의 표준”으로 판단하실 때, 다시 말해서 “의의 잣대”로 재어 보고, “의의 저울”로 달아보실 때, “요구 충족”의 미달로 “의”가 아닌 “불의”이다. 곧 “죄”라고 판단하신다는 것이다. “율법의 기능”을 “죄를 깨닫게함”뿐이라는 것으로 국한 시켜서 “율법”이 “죄의 표준”이 된다는 것은 “율법의 요구”가 “죄의 요구”가 되고, 결국 하나님은 “죄를 요구”하신다는 결론이 된다. 물론 “율법”을 “하나님의 요구”로 보지 않으면 달라진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요구”를 인간에게 알려 주신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따라온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저로서는 “율법” 외에 달리 “더 좋은 것”을 “성경”에서 찾을 수 없었다. “율법의 요구”는 공의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요구”이고, “의의 표준”이다. 이 요구가 채워질 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이루어진다. “바른 관계의 정립”이 곧 “구원”이다.
⑵.범죄한 아담과 그 후손이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할 수 있느냐 로마서 3: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다. “율법”을 “법”의 개념으로 생각하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은 “살인”을 하지 않으면 “율법”이 “지켜지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강령”은 생각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마22:36-40). 다 알고 있는 주님의 말씀이다.
첫째도 사랑, 둘째도 사랑, 아마 셋째, 넷째…. 열째를 말씀하시더라도 “사랑”이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요구”에서 “하나님의 요구”는 “살인”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요구”가 “완전히 충족” 되어진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살인하지 말고, 내가 죽이고 싶도록 미운 그 사람을(요일3:15)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의 요구”이고, “하나님의 요구”이다. 자꾸만 “율법”을 접근하면서 “인간의 표준”에 놓고 바라보고, “인간의 사고 방식”으로 접근하니까 “율법”이 “하나님의 요구”로 보여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차원”에서,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사고 방식”으로 “율법”을 접근하니, 율법이 “불완전”하게도 보이고, “죄의 표준”으로도 보이고, 율법의 요구가 “끝난 것”으로도 보인다. 갈라디아 2:16절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했다. 범죄한 아담이나 그 후손이 “율법의 요구”를 100% “요구 충적”을 할 수 있는가 물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율법의 요구” 자체가 “그림의 떡”이라는 반문이 나온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할 것을 아시고 계신다. 아담이 아무리 뛰고 나는 재주가 있어도 절대로(!) 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아담에게 “능력이 없어서”라는 차원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속죄의 원칙”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다. 아담의 속죄도 “생명에는 생명”으로 갚아야 한다. 그렇다고 아담이 자신을 “속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림으로 “자신의 속죄”를 이룰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아담은 하나님 앞에 “일백 번 고쳐 죽어” 자신의 몸을 “속죄의 제물”로 드려도 “자신의 속죄”를 이룰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죄로 “더렵혀진 아담”은 “속죄의 제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범죄한 아담과 그 후손이 “율법의 조항”을 얼마나 지킬 수 있느냐 의 차원이 아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요구”에 따라 범죄한 아담은 “정죄” 되어지고 “징벌” 되어져서 “하나님의 저주”아래 놓이게 된다.
창세기 6: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했다. 범죄 전 아담 곧 “사람”이 “육체”가 된 것이다.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아담은 이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입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육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벗”(사41:8) 정도의 관계라 할까. 하여튼 “완전한 바른 관계”는 아닌 관계이었지만, 그나마의 관계도 “단절”이 된다.-(인간적인 의미로 본다면 벗:배필)-곧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고 “생명나무”와는 “화염검”으로(창3:24) “완전 차단”이 되고 만다. 이 “완전 차단”된 상태가 바로 “죽음”이 “선언”된 “육체”가 되었다는 말이다. 곧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었던 “사람”의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이 율법을 다루면서(롬3:20, 갈2:16) 왜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사람이 없다고 하지 않고,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하였을까. 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이라고 하면, “범죄 전 아담”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⑶.영영 사라진 “율법의 요구” 충족의 길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공의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의의 요구”를 범죄한 아담과 그 후손이 “완전 충족”할 수 있는 길은 영영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인간”을 “내 몰라라” 내버려두자니 자신의 “창조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불완전함”도 문제이지만, 자신의 지위를 떠나버린 천사(유1:6) 곧 사탄보다도 “더 큰 사탄”이 존재하게 된다.
히브리서 1:14절에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라고 했다. 이 말은, 천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 아니다. 그 천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켜서 “바른 관계”를 이루었을 때, 곧 “구원” 받았을 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완전히” 살아갈 때, 그 “하나님의 자녀”를 위하여 “돕는 자” 곧 “수종드는 자”로 천사는 창조되어졌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18:10절에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했다. 천사는 실상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지금도 하나님 보좌 앞에서 나를 위해 수종드는 천사가 있다. 이 천사의 주인이 되는 아담이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면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 곧 사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적자”가 된다는 말이다.
⑷.하나님 자신이 책임지시기로
그러므로 하나님은 즉각 “응징”을 하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입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공의의 하나님의 정죄와 징벌의 결과 인간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고 만다. 이렇게 되고 보니 결국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목적”을 이루지 못한 “실패자”가 되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이 모든 일의 “책임”을 지시기로 한 것이다. 창세기 3:14-15절에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할 것은, 죄를 “심문”하는 과정은 아담→ 하와의 순서이고, 죄를 “징벌”하는 과정은 뱀→ 여자→ 아담의 순서이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 창2:17의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자이다. 하와와는 아담 안에서 맺어진 관계이다.
그러므로 아담을 먼저 “심문”한 것이고, “징벌”은 “죄”를 징벌하는 것임으로 “죄”가 존재한(범죄한) 순서대로 “징벌”하신다. “죄의 원흉” 뱀은(요8:44) “심문”할 필요도 없었기에,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묻지도 않고 “징벌”을 하신다. “더욱 저주”를 받아라는 “선언”을 하신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과의 싸움을 “예고”하시고, 그 “싸움의 결과”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겠지만, 그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 여자의 후손이 누구인가 우리 모두는 의심 없이 여자의 후손(창3:15)→ 처녀가 낳을 아들(사7:14)→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 예수로(마1:20-21) 알고 있다. 곧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다(갈4:4)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이 “나사렛 예수”요,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나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요구”, “의의 표준”에 합당한 100%의 “요구 충족”을 이루어주시기 위해, 아담이 실패한 그 책임을 하나님 “자신이 책임”지시려고, 나와 똑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이 사랑의 하나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하신 일”이 복음이요, 그분에 관한 “소식”이 복음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야 했는가. 왜 “율법 아래” 나게 하셨는가. 이 물음이 바로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Key Point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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