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신 이유 (창2:18-25)
본문
하나님은 온 우주와 천지 만물을 6일 동안에 창조하셨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오늘날의 소위 과학적 사고방식의 사람들이 하는 반문이다.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으니 그렇다고 치고,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사람들 중의 일부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서슴없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학이 정말 위대한 것으로 알고 “세상의 과학자”들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신앙을 마치 비과학적이요, 샤머니즘적인 미신으로 생각하는지…. 왜 그렇게도 과학에 비위를 맞추려 하는지 모를 일이다. 날의 해석을 두고, “세대”, “시대”로 어떻게 하든지 늘려 잡아서 과학의 연대와 맞추려고 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째 날이니라”고 했다. 아침과 저녁으로 이루어지는 “날”이 24시간 하루이지 무슨 말이 그리도 많은지 하나님 앞에 서면 “새 대가리” 만도 못한 인생인데, 그 머리 속에서 나오는 이유가, 논리가, 타당성이, 그리도 많은 것인지 정말 골치가 아플 지경이다.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이 바로 출애굽기 20장의 하나님이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사람들이, 어찌 이 두 곳의 “날”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20:8-11절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했다. 엿새 동안에 힘써 네 모든 일을 하고 제 칠일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도 안식하라는 말씀이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결국 출애굽 여정의 이스라엘 백성이 일할 수 있는 “하루”나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하시던 “하루”나 같은 “하루”라는 말씀이다. 오늘의 우리가 살고 있는 “하루”나 같은 24시간 “하루”라는 말씀이다. 그 어떤 사람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이들의 말을 쫓아가면 사람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 아니라 원숭이 가 진화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결국 오늘의 본문 말씀 자체가 “신화 이야기” 곧 전설 따라 삼천리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결코 “전설 따라 삼천리”가 될 수 없다. 흔히들 “참새가 어찌 봉황의 뜻을 알리요”한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은 그렇게 말하는 그들이 “새 대가리” 같은 자신의 머리로 마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사실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또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이다. 이런 믿음 안에서 오늘 본문이 밝히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신 이유를 살펴 보고져 한다.
1.동물에게서 짝을 찾을 수 없음으로 본문 19-20절에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고 했다.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속에서 살아갈 각종 땅 아래 물 속의 짐승과(고기) 각종 땅 위의 짐승과 각종 공중의 짐승을 창조하셨다. 그 땅을 정복하고, 그 모두를 다스릴 주인이 필요해서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물론 인간의 창조는 그보다 더 큰 목적이 있다. 이 점은 다시 살펴 보기로 한다. 하나님이 왜 모든 동물을 아담 앞으로 “이끌어” 오셨을까
⑴.이름을 짓게 하시려고 본문19절에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아담의 뛰어난 “지성”을 바라볼 수 있다. 모든 동물의 특성을 알고, 거기에 합당한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름이 바로 그 사람의 “전인격”을 대표하듯 “이름”은 대단히 중요하다. 아담이 각종 동물의 모양이나 생태를 정확히 알아 그 특성에 맞게 이름을 지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아담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동물학자이오, 가장 뛰어난 조류학자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과 같은 아담의 “연구”의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완전한 지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담이 가진 “지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주신 “지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담이 가진 “지성”이 “하나님의 지성”과 꼭 같다는 것이 아니라 “형상을 따라”이다. 곧 “닮았다”,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양대로”이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형체적인 “모양”의 닮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가진 “지성”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완전한 지성”이다. 범죄로 인하여 아담은 이 “완전한 지성”에 손상을 입게 되고, 파손되어 “불완전한 지성”이 되어 버렸다. 오늘의 우리, 곧 아담의 후손은 이 “불완전한 지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특성을 알내기 위해 오랫동안 관찰하고, 다각도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담은 그렇지 않다. 그 탁월한 지성으로 보는 순간 모든 것을 판단했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아담 앞에 각종 짐승을 “이끌어” 오심이 “차례대로”라는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아담)에게로” 이끌고 계시기 때문이다. 아담이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각종 어류도 같이 취급이 되어야 한다. 각종 어류의 이름도 분명히 아담이 지었다. 각종 어류의 “이끌어” 오심이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의 “이끌어” 오심이 “같은 장소”에서 “차례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기에 여기서 언급이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와”를 보는 순간 그의 부르짖음이다. 본문 23절에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고 했다. 연구 관찰의 개념이 되면, 아담은 이름 짓기 위해 더불어 함께 살아보아야 한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의 이름 짓기가-(하와)-끝난 후 결혼의 제도를 선언하신다.
⑵.짝을 찾게 하시려고 본문 20절에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고 했다. 하나님이 모든 동물을 아담에게 이끌어 오시고, 이름을 짓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서로 모양이 “다른 것”을 단순히 “구별하자”는 차원이 아니다. 또 모양이 “비슷한 것”의 “특성”을 “구별하자”는 차원이 아니다. “네 짝”을 찾아 보라는 것이다. “짝”을 찾는다는 의미는 “교제의 대상”, “사랑의 대상”, 함께 “살 수 있는 대상”을 의미한다.
육지의 동물류, 하늘의 조류, 바다의 어류가 사람에게 “이용의 대상”, “협조의 대상”, “벗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교제의 대상”, 곧 “배필의 대상”은 될 수 없다. 바로 하나님이 “배필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이 점을 일깨우시려 아담으로 “이름을 짓게” 하셨다. 그 결과 아담은 자신의 “배필의 대상”이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하와를 “이끌어” 왔을 때 아담은 곧바로 자신의 “교제의 대상”이요, “배필의 대상”을 알아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사람이-(인격체)-점점 짐승이-(동물화)-되어 가고 있는 오늘의 현실인데 사람이 사람이 아닌 동물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좋아한다”는 차원을 넘어섰다는 말이다. “애완 동물”이라고 그 대상의 성격을 정의하지만 “애완 동물”의 차원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애완 동물” 때문에 자신의 “목숨”도 버리는 경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애완 동물”의 보급이 늘어가고, “애완 동물”에대한 집착이 점점 더 “깊어짐”은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하나님이 주신 목적에서-(이용, 협조, 벗)-벗어나고 있음이 분명하다.
2.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서 본문 22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고 했다. 이 말씀은 “돕는 배필”을 주시는 자와 주시려는 “이유”와 “동기”를 밝히고 있다.
⑴.완전한 삶을 위하여 아담 혼자서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완전한 삶”이 되지 못한다. 남녀는 서로 다른 본질을 가지고 있는데, 이 남녀가 만나 “완전한 사랑”을 이룰 때 사람으로서 “완전한 삶”이 된다. 그 반쪽의 아담을 바라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아니다는 말이다. 그래서 “좋지 못하니”라고 하신다. 그래서 하와를 창조하시게 되고 이 둘을 놓고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된 것이다. 범죄 전 아담과 하와, 참으로 아름다웠다. 인간이 아닌 “하나님 차원”에서 보시기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될 정도이다. 이들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의로움” 곧 “선함”(딤전4:4), “아름다움”, “성결함”, “영광스러움”, “찬란함” 등이 이미 끝난 창조물에 비취니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될 정도이다.
둘째 날을 빼고는 하나님이 “지으신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셨다. 6일에도 인간 창조 이전까지는(창1:25) “보시기에 좋았더라”이다. 그러나 인간 창조가 끝난 후 바라보시니(창1:31) “지으신 모든 것”이-(지금까지는 “보시기에 좋았더라”가)-“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로 바뀐다. 그 사이의 변화는 “인간 창조”뿐이다. 그 “인간 창조”가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로 바뀌게 한 “요인”이다. 범죄 전 아담의 “의로움” 곧 “선함”과 “아름다움”, “성결함”, “영광스러움”, “찬란함” 등이 “지으신 모든 것”에-(빠진
둘째 날을 포함)-전가되니 그 “지으신 모든 것”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된 것이다. 마치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기에 해와 달의 “비췸”이 파묻히고 쓸데없듯이(계21:23) 범죄 전 아담과 하와의 “찬란함”에 “보시에 좋았더라”가 파묻혀지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그 “의로움” 곧 “선함”, “아름다움”, “성결함”, “영광스러움”, “찬란함” 등을 잃어버리자 “지으신 모든 것”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를 잃어버리게 된다. 오히려 “주인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고, 이 저주를 풀어 주고 자신들의 모습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로 회복시켜 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남을 고대하며 지금 탄식하고 있다(롬8:19-22) 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를 “창조 사역의 완성”으로 오는 하나님의 기쁨, 만족, 또 창조물의 완벽을 노래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의미”가 약하다.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⑵.하나님이 주신다. 본문 18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했다. 그 돕는 배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다는 말씀이요, 아담을 위하여 “준비하신다”는 말씀이다. “준비했다”는 말씀이 아니라 “준비하겠다”는 계획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모든 동물들을 쌍, 쌍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사람도 처음부터 남녀로 창조하시면 될 터인데 왜 아담을 창조하시고, 동물들을 이끌어 이름을 짓게 하시고난 후에 “하와”를 창조하셨을까 하는 의문은, 바로 “돕는 배필”을 찾기 위함임을 알게 된다.
⑶.돕는 배필 하와 창세기 2:22-23절에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고 했다. 아담이 동물들에게서 “돕는 배필”을 찾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와”를 창조하셨다. 그 하와를 아담에게 이끌어 오시니(본문22절) 아담은 곧바로 알아보았다. 바로 “나의 짝”이다(본문23).
그런데, 문제는 아담을 도와 합동하여 선을 이루라고 주신 “돕는 배필”인데(롬8:123) 합동하여 “선”을 이루지 못하고, 합동하여 “악”을 이루는 “돕는 배필”이 되고 말았다. 사탄은 아담을 정복하기 위해 아담과의 정면 승부를 피하고, 먼저 하와를 정복하여 그녀를 이용해 아담을 정복하는 우회 작전을 택하였는데, 이 사탄의 작전에 하와와 아담이 걸려든 것이다. 바로 “사탄의 유혹”이다. 사탄이 아담과 정면 승부를 걸고 아담을 유혹이 아닌 “위협”으로 나왔다면 아담이 대처할 수도 있었겠고 하여튼 그리도 쉽게 무너지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도 위협에 굴복하여 범죄하는 일보다 유혹에 빠져 범죄하는 경우가 더 많으리라고 본다. 바로 사탄의 변함없는 수법임을 알면서도 우리가 쉽게 빠지는 함정이다.
3.진정하고 참된 교제의 대상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장로교 신앙의 뿌리가 되는 것은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과 성경 대소 요리 문답이라고 하겠다. 여기 그 요리 문답의 1번을 옮기면, 문
'1'. 사람의 첫째가 되고 가장 높은 목적이 무엇인가 답:사람의 첫째 되고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1), 그를 영원토록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이다.(2)
(1).롬11:36, 14:8. 고전10:31 (2).시73:24-26, 요17:22, 24
이 문답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다루고 있다. 바로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영광 돌리며 자신과 영원토록 온전히 즐거워할 “교제의 대상”을 찾고 계신 것이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면서 이 사실을 잊을 때가 많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목적은 잊어버리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을까에 관심을 더 가지게 된다. 그래서 되도록 더 잘 보이기 위한 노력이 펼쳐지고, 행하여 지고, 쌓여 가게 된다. 그런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얻어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요구”는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주신 능력을 행하고, 기능을 발휘한다고 해서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여 그 능력, 기능이 사용되어져야 한다. 예를 들면 “식칼”은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위하여 만들어진 칼이다. 이 식칼이 자르고 찌르는 기능이 있고, 웬만큼 단단한 것도 자르고 찌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자. 이 기능과 능력이 식사 준비를 위해서 사용되어질 때, 식칼 본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식칼이 강도의 손에 쥐어지면 그 본래의 “만든 목적”과는 전혀 상관없는 “흉기”가 되는 것이다. 강도의 손에서 그 식칼이 자신의 기능을, 능력을 행하면 행하는 만큼 “본래의 목적”에서 더 멀어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범죄 전 아담이 가졌던 그 탁월한 능력, 참으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완전한 지성”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고, 자신의 “창조 목적”대로 살아야 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아니라 “생명나무”를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아담은 그렇지를 못했다. 그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는 삶이 아니라, “창조 목적”을 이루는 삶이 아니라,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하나님을 “등지는 삶”을 선택하고 만다. 만일 아담이 그때 “생명나무”를 선택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다. 자신이 창조하신 아담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지시고, 자신이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으시는 성육신도 필요가 없고, 갈보리 산 십자가도 필요 없고, 무덤을 깨치고 나오는 부활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담의 진정하고 참된 “교제의 대상”은 실상은 “하와”가 아니다. 하와를 대상으로 “진정한 교제”를 이루고, “참 사랑”을 이룬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아담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는 것은 못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신 이유는 아담의 진정하고 참된 “교제의 대상”이 하와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 탁월한 지적 능력의 소유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실패하고 만다. 진정하고 참된 교제는 서로가 서로를 전인격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자유로이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원하신 것이다. “나의 창조자이기에”가 아니라 나의 진정하고 참된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교제의 대상”이기에 “진정하고 참된 사랑”을 이루기 위해 사탄이 아닌 하나님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 때문에”가 아니고, “조건 때문에”가 아니다. 내 가슴 속에 있는 “진정하고 참된 사랑”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기에”가 되어야 한다. 그 사람이 바로 “교제의 대상”이다. 위압에 밀리거나, 기계적인 결정은 “전인격적인 선택”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아담을 당신의 형상대로 “온전한 인격체”로 창조하셨지, 리모콘으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로봇을 창조하신 게 아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진정하고 참된 “교제의 대상”으로 “전인격적인 선택”을 하게 하시려고 “짝”을 찾게 하셨다. 동물들 가운데서 그러나 아담은 찾지 못하였다. 하와를 바라보며 그 탁월한 지적 능력으로 곧바로 자신의 짝임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진정하고 참된 자신의 “교제의 대상”은 아니었는데 하와 보다 더 나은 자신의 짝 곧 “교제의 대상”인 하나님을 선택하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물론 사탄의 유혹이 가로막고 욕심이 발동해서였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고 했다(약1:15). 이 욕심을 갈보리 산 십자가 위에 내려놓자(마16:24). 결국 욕심은 죄를 이룰 뿐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진정하고 참된 나의 “교제의 대상”을 찾는 일을 가로막게 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교제의 대상”을 찾게 하시려고, 나에게로 “이끌어” 오시는 게 무엇인지요 동물들과 같은 물질, 이름을 짓는 탁월한 지식, 만물을 다스리는 권력,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로 만드는 그 찬란한 영광인가요 아니면 내 뼈 중의 뼈요 살인 하와와 같은 사랑인가요 이 모두에 완벽한 성공을 이루어도 실상은 아담처럼 실패자로 끝난다. 이 모두는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창조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목적”, 그 목적을 이루는 게 바로 “성공”이다. 그 목적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공적인 삶”이다.
출애굽기 20:8-11절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했다. 엿새 동안에 힘써 네 모든 일을 하고 제 칠일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도 안식하라는 말씀이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결국 출애굽 여정의 이스라엘 백성이 일할 수 있는 “하루”나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하시던 “하루”나 같은 “하루”라는 말씀이다. 오늘의 우리가 살고 있는 “하루”나 같은 24시간 “하루”라는 말씀이다. 그 어떤 사람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이들의 말을 쫓아가면 사람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 아니라 원숭이 가 진화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결국 오늘의 본문 말씀 자체가 “신화 이야기” 곧 전설 따라 삼천리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결코 “전설 따라 삼천리”가 될 수 없다. 흔히들 “참새가 어찌 봉황의 뜻을 알리요”한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은 그렇게 말하는 그들이 “새 대가리” 같은 자신의 머리로 마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사실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또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이다. 이런 믿음 안에서 오늘 본문이 밝히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신 이유를 살펴 보고져 한다.
1.동물에게서 짝을 찾을 수 없음으로 본문 19-20절에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고 했다.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속에서 살아갈 각종 땅 아래 물 속의 짐승과(고기) 각종 땅 위의 짐승과 각종 공중의 짐승을 창조하셨다. 그 땅을 정복하고, 그 모두를 다스릴 주인이 필요해서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물론 인간의 창조는 그보다 더 큰 목적이 있다. 이 점은 다시 살펴 보기로 한다. 하나님이 왜 모든 동물을 아담 앞으로 “이끌어” 오셨을까
⑴.이름을 짓게 하시려고 본문19절에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아담의 뛰어난 “지성”을 바라볼 수 있다. 모든 동물의 특성을 알고, 거기에 합당한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름이 바로 그 사람의 “전인격”을 대표하듯 “이름”은 대단히 중요하다. 아담이 각종 동물의 모양이나 생태를 정확히 알아 그 특성에 맞게 이름을 지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아담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동물학자이오, 가장 뛰어난 조류학자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과 같은 아담의 “연구”의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완전한 지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담이 가진 “지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주신 “지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담이 가진 “지성”이 “하나님의 지성”과 꼭 같다는 것이 아니라 “형상을 따라”이다. 곧 “닮았다”,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양대로”이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형체적인 “모양”의 닮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가진 “지성”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완전한 지성”이다. 범죄로 인하여 아담은 이 “완전한 지성”에 손상을 입게 되고, 파손되어 “불완전한 지성”이 되어 버렸다. 오늘의 우리, 곧 아담의 후손은 이 “불완전한 지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특성을 알내기 위해 오랫동안 관찰하고, 다각도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담은 그렇지 않다. 그 탁월한 지성으로 보는 순간 모든 것을 판단했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아담 앞에 각종 짐승을 “이끌어” 오심이 “차례대로”라는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아담)에게로” 이끌고 계시기 때문이다. 아담이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각종 어류도 같이 취급이 되어야 한다. 각종 어류의 이름도 분명히 아담이 지었다. 각종 어류의 “이끌어” 오심이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의 “이끌어” 오심이 “같은 장소”에서 “차례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기에 여기서 언급이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와”를 보는 순간 그의 부르짖음이다. 본문 23절에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고 했다. 연구 관찰의 개념이 되면, 아담은 이름 짓기 위해 더불어 함께 살아보아야 한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의 이름 짓기가-(하와)-끝난 후 결혼의 제도를 선언하신다.
⑵.짝을 찾게 하시려고 본문 20절에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고 했다. 하나님이 모든 동물을 아담에게 이끌어 오시고, 이름을 짓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서로 모양이 “다른 것”을 단순히 “구별하자”는 차원이 아니다. 또 모양이 “비슷한 것”의 “특성”을 “구별하자”는 차원이 아니다. “네 짝”을 찾아 보라는 것이다. “짝”을 찾는다는 의미는 “교제의 대상”, “사랑의 대상”, 함께 “살 수 있는 대상”을 의미한다.
육지의 동물류, 하늘의 조류, 바다의 어류가 사람에게 “이용의 대상”, “협조의 대상”, “벗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교제의 대상”, 곧 “배필의 대상”은 될 수 없다. 바로 하나님이 “배필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이 점을 일깨우시려 아담으로 “이름을 짓게” 하셨다. 그 결과 아담은 자신의 “배필의 대상”이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하와를 “이끌어” 왔을 때 아담은 곧바로 자신의 “교제의 대상”이요, “배필의 대상”을 알아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사람이-(인격체)-점점 짐승이-(동물화)-되어 가고 있는 오늘의 현실인데 사람이 사람이 아닌 동물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좋아한다”는 차원을 넘어섰다는 말이다. “애완 동물”이라고 그 대상의 성격을 정의하지만 “애완 동물”의 차원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애완 동물” 때문에 자신의 “목숨”도 버리는 경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애완 동물”의 보급이 늘어가고, “애완 동물”에대한 집착이 점점 더 “깊어짐”은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하나님이 주신 목적에서-(이용, 협조, 벗)-벗어나고 있음이 분명하다.
2.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서 본문 22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고 했다. 이 말씀은 “돕는 배필”을 주시는 자와 주시려는 “이유”와 “동기”를 밝히고 있다.
⑴.완전한 삶을 위하여 아담 혼자서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완전한 삶”이 되지 못한다. 남녀는 서로 다른 본질을 가지고 있는데, 이 남녀가 만나 “완전한 사랑”을 이룰 때 사람으로서 “완전한 삶”이 된다. 그 반쪽의 아담을 바라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아니다는 말이다. 그래서 “좋지 못하니”라고 하신다. 그래서 하와를 창조하시게 되고 이 둘을 놓고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된 것이다. 범죄 전 아담과 하와, 참으로 아름다웠다. 인간이 아닌 “하나님 차원”에서 보시기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될 정도이다. 이들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의로움” 곧 “선함”(딤전4:4), “아름다움”, “성결함”, “영광스러움”, “찬란함” 등이 이미 끝난 창조물에 비취니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될 정도이다.
둘째 날을 빼고는 하나님이 “지으신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셨다. 6일에도 인간 창조 이전까지는(창1:25) “보시기에 좋았더라”이다. 그러나 인간 창조가 끝난 후 바라보시니(창1:31) “지으신 모든 것”이-(지금까지는 “보시기에 좋았더라”가)-“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로 바뀐다. 그 사이의 변화는 “인간 창조”뿐이다. 그 “인간 창조”가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로 바뀌게 한 “요인”이다. 범죄 전 아담의 “의로움” 곧 “선함”과 “아름다움”, “성결함”, “영광스러움”, “찬란함” 등이 “지으신 모든 것”에-(빠진
둘째 날을 포함)-전가되니 그 “지으신 모든 것”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된 것이다. 마치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기에 해와 달의 “비췸”이 파묻히고 쓸데없듯이(계21:23) 범죄 전 아담과 하와의 “찬란함”에 “보시에 좋았더라”가 파묻혀지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그 “의로움” 곧 “선함”, “아름다움”, “성결함”, “영광스러움”, “찬란함” 등을 잃어버리자 “지으신 모든 것”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를 잃어버리게 된다. 오히려 “주인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고, 이 저주를 풀어 주고 자신들의 모습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로 회복시켜 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남을 고대하며 지금 탄식하고 있다(롬8:19-22) 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를 “창조 사역의 완성”으로 오는 하나님의 기쁨, 만족, 또 창조물의 완벽을 노래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의미”가 약하다.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⑵.하나님이 주신다. 본문 18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했다. 그 돕는 배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다는 말씀이요, 아담을 위하여 “준비하신다”는 말씀이다. “준비했다”는 말씀이 아니라 “준비하겠다”는 계획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모든 동물들을 쌍, 쌍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사람도 처음부터 남녀로 창조하시면 될 터인데 왜 아담을 창조하시고, 동물들을 이끌어 이름을 짓게 하시고난 후에 “하와”를 창조하셨을까 하는 의문은, 바로 “돕는 배필”을 찾기 위함임을 알게 된다.
⑶.돕는 배필 하와 창세기 2:22-23절에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고 했다. 아담이 동물들에게서 “돕는 배필”을 찾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와”를 창조하셨다. 그 하와를 아담에게 이끌어 오시니(본문22절) 아담은 곧바로 알아보았다. 바로 “나의 짝”이다(본문23).
그런데, 문제는 아담을 도와 합동하여 선을 이루라고 주신 “돕는 배필”인데(롬8:123) 합동하여 “선”을 이루지 못하고, 합동하여 “악”을 이루는 “돕는 배필”이 되고 말았다. 사탄은 아담을 정복하기 위해 아담과의 정면 승부를 피하고, 먼저 하와를 정복하여 그녀를 이용해 아담을 정복하는 우회 작전을 택하였는데, 이 사탄의 작전에 하와와 아담이 걸려든 것이다. 바로 “사탄의 유혹”이다. 사탄이 아담과 정면 승부를 걸고 아담을 유혹이 아닌 “위협”으로 나왔다면 아담이 대처할 수도 있었겠고 하여튼 그리도 쉽게 무너지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도 위협에 굴복하여 범죄하는 일보다 유혹에 빠져 범죄하는 경우가 더 많으리라고 본다. 바로 사탄의 변함없는 수법임을 알면서도 우리가 쉽게 빠지는 함정이다.
3.진정하고 참된 교제의 대상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장로교 신앙의 뿌리가 되는 것은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과 성경 대소 요리 문답이라고 하겠다. 여기 그 요리 문답의 1번을 옮기면, 문
'1'. 사람의 첫째가 되고 가장 높은 목적이 무엇인가 답:사람의 첫째 되고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1), 그를 영원토록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이다.(2)
(1).롬11:36, 14:8. 고전10:31 (2).시73:24-26, 요17:22, 24
이 문답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다루고 있다. 바로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영광 돌리며 자신과 영원토록 온전히 즐거워할 “교제의 대상”을 찾고 계신 것이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면서 이 사실을 잊을 때가 많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목적은 잊어버리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을까에 관심을 더 가지게 된다. 그래서 되도록 더 잘 보이기 위한 노력이 펼쳐지고, 행하여 지고, 쌓여 가게 된다. 그런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얻어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요구”는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주신 능력을 행하고, 기능을 발휘한다고 해서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여 그 능력, 기능이 사용되어져야 한다. 예를 들면 “식칼”은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위하여 만들어진 칼이다. 이 식칼이 자르고 찌르는 기능이 있고, 웬만큼 단단한 것도 자르고 찌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자. 이 기능과 능력이 식사 준비를 위해서 사용되어질 때, 식칼 본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식칼이 강도의 손에 쥐어지면 그 본래의 “만든 목적”과는 전혀 상관없는 “흉기”가 되는 것이다. 강도의 손에서 그 식칼이 자신의 기능을, 능력을 행하면 행하는 만큼 “본래의 목적”에서 더 멀어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범죄 전 아담이 가졌던 그 탁월한 능력, 참으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완전한 지성”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고, 자신의 “창조 목적”대로 살아야 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아니라 “생명나무”를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아담은 그렇지를 못했다. 그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는 삶이 아니라, “창조 목적”을 이루는 삶이 아니라,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하나님을 “등지는 삶”을 선택하고 만다. 만일 아담이 그때 “생명나무”를 선택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다. 자신이 창조하신 아담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지시고, 자신이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으시는 성육신도 필요가 없고, 갈보리 산 십자가도 필요 없고, 무덤을 깨치고 나오는 부활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담의 진정하고 참된 “교제의 대상”은 실상은 “하와”가 아니다. 하와를 대상으로 “진정한 교제”를 이루고, “참 사랑”을 이룬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아담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는 것은 못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신 이유는 아담의 진정하고 참된 “교제의 대상”이 하와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 탁월한 지적 능력의 소유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실패하고 만다. 진정하고 참된 교제는 서로가 서로를 전인격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자유로이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원하신 것이다. “나의 창조자이기에”가 아니라 나의 진정하고 참된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교제의 대상”이기에 “진정하고 참된 사랑”을 이루기 위해 사탄이 아닌 하나님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 때문에”가 아니고, “조건 때문에”가 아니다. 내 가슴 속에 있는 “진정하고 참된 사랑”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기에”가 되어야 한다. 그 사람이 바로 “교제의 대상”이다. 위압에 밀리거나, 기계적인 결정은 “전인격적인 선택”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아담을 당신의 형상대로 “온전한 인격체”로 창조하셨지, 리모콘으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로봇을 창조하신 게 아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진정하고 참된 “교제의 대상”으로 “전인격적인 선택”을 하게 하시려고 “짝”을 찾게 하셨다. 동물들 가운데서 그러나 아담은 찾지 못하였다. 하와를 바라보며 그 탁월한 지적 능력으로 곧바로 자신의 짝임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진정하고 참된 자신의 “교제의 대상”은 아니었는데 하와 보다 더 나은 자신의 짝 곧 “교제의 대상”인 하나님을 선택하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물론 사탄의 유혹이 가로막고 욕심이 발동해서였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고 했다(약1:15). 이 욕심을 갈보리 산 십자가 위에 내려놓자(마16:24). 결국 욕심은 죄를 이룰 뿐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진정하고 참된 나의 “교제의 대상”을 찾는 일을 가로막게 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교제의 대상”을 찾게 하시려고, 나에게로 “이끌어” 오시는 게 무엇인지요 동물들과 같은 물질, 이름을 짓는 탁월한 지식, 만물을 다스리는 권력,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로 만드는 그 찬란한 영광인가요 아니면 내 뼈 중의 뼈요 살인 하와와 같은 사랑인가요 이 모두에 완벽한 성공을 이루어도 실상은 아담처럼 실패자로 끝난다. 이 모두는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창조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목적”, 그 목적을 이루는 게 바로 “성공”이다. 그 목적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공적인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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