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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넓고 푸른 초장 위에는 (시23:1-6)

본문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윗이 지난날 아버지의 양 떼를 치던 목동 시절을 회상하며, 자신과 여호와의 관계를 양과 목자의 관계에 놓고 지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로,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어느 시골 산 속의 목장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시이다. 저 넓고 푸른 초장 위에는…. 양 떼들이 뛰놀고, 이를 지켜 보며 한 목동이 나무 그늘에 앉아 수금을 타며 여호와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 노래 소리에 화음을 맞추며 졸졸졸 시냇물도 함께 노래한다. 참으로 평화로운 목가적인 풍경이다. 근심도, 걱정도, 불안도, 두려움도 없는, 평화로움이 잔잔히 흘러넘치는, 아름다운 풍경이 떠오르는 시이다. 거기에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평안이 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렇게 우리 모두에게 친근감 있게 다가오는 시이다.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 시이다. 남의 시로 느껴지지 않고 내 것으로 느껴지는 친숙함이 있는 시이다. 우리 다 같이 시를 읊는 마음으로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시편 23:1-6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인의 깊은 속 뜻은 모른다 할지라도, 우리의 가슴 속에도 저 넓은 초장과 같이 훤-히 앞이 탁- 트이는 마음이 된다. 저 푸른 초장과 같은 싱그러움과 생명력이 솟아 오른다. 잔잔한 시냇물의 흐름과 같이 평온함이 잔잔히 스며 온다. 걱정도, 근심도, 두려움도 없는 참된 평화가 깃든다. '찬미예수 820장' 우리에게 동심으로 돌아가, 저 넓은 초장에서, 저 푸르른 초장에서, 양 떼들과 함께 딩굴고 싶은 마음이 되게 한다.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되게 하는 오늘 본문 말씀을 가슴 속에 그리며, 저 넓고 푸른 초장을 바라보고 져 한다. 저 넓고 푸른 초장에는. 무엇이 있을까.
1.여호와 나의 목자가 있다. 본문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했다. 저 넓고 푸른 초장에는. 나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이 그곳에 계신다. 참 좋으신 나의 목자 하나님. 그분은 바로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의 보물 창고이시다. 육의 양식도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이다. 영혼의 양식도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이다. 육의 쉴 곳도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이다. 영혼의 쉴 곳도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이다.
⑴.부족함이 없다. 본문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는 부족함이 없다. 육의 양식도 영의 양식도 부족함이 없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니. 풍성한 꼴이 있어 부족함이 없다. 들어가며 나오며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꼴을 주시니 부족함이 없다(요10:9). 그가 나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니. 사시사철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이 있어 부족함이 없다. 내 배에서 생수가 샘 솟게 하시니 부족함이 없다(요4:14; 7:38). 그가 내게 상을 베푸시니. 먹고 마실 것 염려 않게 하사 일용할 양식 주시어 부족함이 없다(마6:31). 주의 살과 피로 참된 양식 주시니 부족함이 없다(요6:5
5). 그가 내 잔을 넘치게 하시니. 언약의 피로 나로 마시게 하시어 부족함이 없다. 십자가의 보혈을 나같은 죄인에게도 부어주시니 부족함이 없다(마16:28).
⑵.길 잃어버릴 염려 없다. 본문 3절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되시니. 길 잃어버릴 염려 없다. 푸른 초장도, 쉴만한 물가도, 의의 길도 나 모르나. 그가 날 인도하시니 염려 없다. 그가 나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니. 꼴을 찾아, 물을 찾아, 위태한 길을 헤매일 염려 없다. 배고픔도, 목마름도, 헤매임도 없는. 풍요와 안식 주시니 내게는 염려 없다. 그가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니. 내 영혼 방황 없어 염려 없다. 나 비록 의의 길 알지 못하나 그가 내 길 앞장서 가시니 내게는 염려 없다(요10:4). 그가 자기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인도하시니. 나 비록 지치고 스러지나 그가 책임져 주시어 염려 없다. 곤한 내 영혼이나 그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니 나 염려 없다.
⑶.두려움 없다. 본문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되시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악한 대적도 나 두려움 없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지켜 주시니 나 두려움 없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지켜 주시니. 내 가는 길이 비록 사망의 길이라도 그는 나의 구원자이시니 두려움 없다(삼하22:3). 여호와는 나의 목자 되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도다. '어린이 찬송가 189장'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로하여금 푸른 풀밭에 눕게하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시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 함-은 주께서 나와 항상 함께 계심이로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나를 인도하시네 주의 지팡이 주의 막대기 나를 지키시니 조금도 두렴 없네 주님 함께 계시네.
2.노니는 양 떼가 있다. 본문 2절에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다. 저 넓고 푸른 초장에는. 노니는 양 떼들이 그곳에서 풀을 뜯으며, 젖을 빨며, 물을 마시고, 딩굴고, 장난하고. 참으로 즐겁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 시를 쓴 시인은, 그 양이 바로 자신이라고 한다.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노래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 되시어 인도하여 주신 “저 넓고 푸른 초장 위에서.” 부족함이 없이, 염려 없이, 두려움 없이. 오히려 기쁘고 즐겁게, 평화롭게 참된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는 신앙의 고백이다.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노래이다.
⑴.부족함이 없는 양인가 본문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했다. 저 넓고 푸른 초장에는. 다윗과 같은 주의 양 떼들이 노닐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이 시간 자신을 한번 돌아 봅시다. 관연 나 자신도 “저 넓고 푸른 초장 위에.” 노니는 양 떼들 속에 들어가 있는지. 여호와는 나의 목자 되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를 노래하고 있는지.
⑵.평안이 넘치는 양인가 본문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했다. 저 넓고 푸른 초장에는. 다윗과 같은 주의 양 떼들이 노닐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과 같이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있어 내 가슴 속에 주의 안위가, 곧 참 평안이 흘러 넘치는지요 이 시간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 봅시다. 저 넓고 푸른 초장, 풍성한 꼴, 사시사철 흐르는 시냇물, 그것으로는 참 평안을 맛볼 수 없다. 물질의 부요로 영혼의 만족을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참 양식이 아니기 때문이다(요6:5
5). 이사야 55:2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고 했다. 참된 양식이 아닌 것으로는 “배부름이 없다”고 한다. 수고와 눈물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참된 양식으로는 “배부름”이 아닌 “마음이 기름진다”고 한다. “마음이 즐거움을 얻으리라”고 한다. 곧 참된 평안이다. 저 넓고 푸른 초장이 있어서도, 풍성한 꼴이 있어도, 마르지 않고 흐른 시냇물이 있어도. 그것으로는 참 평안을 얻을 수 없다. “주의 안위”가 있어야 한다. 곧 주님 주시는 평안이 아니고는, 참된 평안이 흘러 넘쳐날 수가 없다. 주님 주시는 물이 아니고는 “다시 목마름”이 있다(요4:13). 그래서 또다시 물을 길으려 샘물을 찾아야 하는 수고와 괴로움이 있다. 그러나 주님 주시는 물은 그렇지 않다. 다시는 목마름이 없다. 그 이유는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기에. 샘물이 마르는 일이 없기에. 다시는 목마름이 없다. 바로 다시는 목마름이 없는 이런 상태가 참 만족이요, 참 평안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있어 다윗의 가슴 속에서 흘러 넘쳐나오는 참된 평안이 내 자신의 가슴 속에도 흘러 넘치는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⑶.넓고 푸른 초장이 있는 양인가 본문 2절에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다. 저 넓고 푸른 초장에는. 다윗과 같은 주의 양 떼들이 노닐고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되시니. 그가 인도한 넓고 푸른 초장에는 풍성한 꼴이 있고, 마르지 않는 시냇물이 있고, 쉴만한 나무 그늘이 있다. 무엇보다도 모든 것 되시는 목자. 하나님이 계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넓고 푸른 초장이 나에게도 있는가 우리 한번 자신을 생각해 봅시다. 저 넓고 푸른 초장에는. 이 초장은 바로 내 교회이요, 내 가정이요, 내 삶의 현장이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씀 드리면 풍성한 꼴이 있고,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이 있고, 목자 되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바로 이 “성경”이 우리의 “저 넓고 푸른 초장”이다. 로마서 10:8절에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목자 되시니. 그가 나를 “저 넓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도다. 그 초장은 “성경 말씀”으로 “네게 가까이 있다”고 했다. “네 입에 있다”고 했다. “네 마음에 있다”고 했다. 저 넓고 푸른 초장이 나에게도 있는가 그 초장을 내가 얼마나 가까이 하고 있는가 그 초장의 푸른 꼴과 맑은 물을 얼마나 먹고, 마시고 있는가 또 얼마나 많이 마음 판에 새기고 있는가 우리 한번 조용히 생각해 보자. 저 넓고 푸른 초장에는. 곧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에서, 그 말씀을 읽을 때에 내 영혼이 소생하고 생기가 솟구치는가 내 영혼의 갈증이 해소되고 내게 샘솟는 기쁨이 넘쳐 나는가 나의 마음에 수심 구름, 근심 걱정이 걷히고 그 찬란한 영광의 빛이 비취어 오는가 저 넓고 푸른 초장에는. 꼴도 많고, 물도 많지만 내가 먹고 마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먹기 싫어서 안 먹든, 게을러서 못 먹든, 바쁘서 못 먹든, 병이 나서 못 먹든, 이유야 많겠지만. 그러나 안 먹고는 못 산다. 만족은 고사하고 죽고 만다. 저 넓고 푸른 초장에는. 꼴도 많고, 물도 많다. 송이 꿀보다 더 맛있는 참된 양식이 많다. 먹으면 먹을수록 힘이 솟고, 먹으면 먹을수록 기쁨이 흘러 넘친다. 먹으면 먹을수록 참된 평안이 넘친다. 먹고 먹고 또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는 것이 참된 양식이다. 목고 먹고 또 먹어도 살찔 걱정 없는 것이 영의 양식이다. 먹으면 먹을수록 더 먹고 싶은 것이 나의 사랑하는 책 속에 가득한 참된 양식이다. '찬송가 234장'3.영원히 거할 집이 있다. 본문 6절에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했다. 저 넓고 푸른 초장에는. 영원히 거할 집이 있다. 20-30년만에 재개발해야 하는 이 땅의 아파트가 아니다. 해마다 손을 보고 보수공사를 해야 하는 그런 집이 아니다. 10년이 가고, 100년이 가고, 1000년이 가도 변함 없이 그대로인 영원히 거할 집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이 집을 사모하며 나온 바 본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다가 갔다(히11:15-16). 이 땅에 있는 집이 아니다. 하늘에 있는 집이다. 곧 소망의 나라이다. 영원히 거할 집이다. 시편 90:1-2절에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산이 생기기 전, 땅과 바다도 생기기 전, 곧 창세 전에도 계셨고, 창세 후에도 계시고, 또 영원히 계시는 주 하나님을 자신의 거처로 삼았다. 이 땅의 집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자신이 거할 영원한 집으로 삼았다. 오늘 본문의 다윗도 백향목으로 지은, 아름다운 왕궁인 이 땅의 집이 아니라, 여호와의 집을 자신이 거할 영원한 집으로 삼았다. 이 땅의 집으로서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화려한 왕궁을, 그는 자기의 거처로 생각지 않는다. 시편 84:10절에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했다. 다윗이 “여호와의 집”을 사모하는 마음은 남다르다. 남부러울 것 없는 그 화려한 왕궁의 임금 자리 보다는, 하나님의 집에서 문지기의 자리를 원하고 있다. 그만큼 값진 집이요, 그만큼 소망하는 집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되시니. 나의 평생에 함께 하실 여호와 하님, 그의 “선하심”으로 함께 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으로 함께 하실 하나님, 나의 평생에 정녕히 함께 하실 하나님, 그 여호와의 집에 자신이 거할 영원한 처소를 삼겠다고 고백한다. 요한복음 14:2-3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했다. 그 하나님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고 한다. 주님도 “내 아버지 집” 곧 여호와의 집에 영원한 거처를 삼고져 하는 자를 영접하여 함께 동거하겠다고 하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이 “하나님 문지기”로라도 가기를 원했던. 그처럼 소망하던 그 영원한 집이 나 자신에게도 있는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 집은 바로 주님이 예비하신 내 아버지 집의 “있을 곳”이다. 주를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집이다. 히브리서 11:9절에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라고 했다. 믿음의 선진들도 믿음으로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받아 장막에 함께 거하였다고 한다. 이 세상 나그네 길을 갔다고 한다. 이 땅위의 집을 거처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 보며. 그곳을 자신들이 거할 영원한 거처로 삼았다. 우리들도 이 땅위의 집이 아닌 하늘의 집을 소망하며, 저 높은 곳을 우리의 거할 처소로 삼자. 저 하늘, 저 높은 곳에 내가 거할 영원한 집이 있다면.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그러기에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다. '찬미예수 978장' 내 모든 소망은 저 하늘에 있다. 저 천국 문을 열고 날 부르시는 주님, 그곳에 계시네. 그 주님이 바로 나의 선한 목자이시로다. 나의 이름을 부르시며 앞장서 가신 주님이시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되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선한 목자 되신 주님. 내 길 인도하시니 길잃어버릴 염려 없으리로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지키시니. 대적의 두려움이 없으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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