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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 (왕하23:1-25)

본문

10월 31일은 종교 개혁일이다. 그래서 10월 마지막 주일은 종교 개혁 주일로 지킨다. 종교 개혁은 우리가 잘 아는바대로 16 세기에 교회가 극도로 타락하고 부패해졌을 때 마틴 루터를 중심으로 회개를 촉구하며 일어난 개혁 운동이다.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다가 부족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면죄부”란 것을 만들어 돈을 받고 파는 엄청난 잘못을 교회가 자행하고 있었다. 참으로 얼토당토않는 일이다. 죄를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는 것인데 사람이 면죄부를 줄 수 있다니…. 그것도 돈을 받고 판다니…. 돈만 있으면 아무런 죄를 지어도 걱정할게 없다는 것이 아닌가. 돈이 최고라는 말이 된다. 돈의 힘이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깨우고 교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촉구한 운동이 바로 종교 개혁 운동이다. 진리대로 살자는 운동이다. 그러나 교회는 오히려 이들 개혁 운동자들을 정죄하고 처벌하며 회개할 줄 몰랐다. 그래서 종교 개혁의 취지를 따르는 교회와 그렇지 않는 기존 교회로 양분되었다. 종교 개혁을 부르짖으며 기존 교회에 “대항하고 항의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Protestant 라 불리워진다. 이 Protestant 들이 바로 신교이다. 회개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남아 있는 교회들이 바로 구교 곧 Catholic 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천주교라고 한다. 신교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루터교 등 여러 교파로 나뉘어져 있다. 오늘 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본문에 나타난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을 살펴보며 종교 개혁의 중심 사상이 무엇인지를 찾아 보고져 한다.
1.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본문 3절에 “왕이 대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좇기로 하니라”고 했다. 왕과 온 백성이 여호와 앞에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지켜 이루리라는 언약을 세우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는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로마서 14: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했다. 고린도전서 10: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창조함을 받았다. 어떤 물건이던 만든 이의 뜻에 따라 바로 사용되어질 때 제 값어치를 나타내는 것이고 아름다움이요 행복이 된다. 시골 어느 화원에서 곱게 자라난 꽃 한 송이, 그 꽃 한 송이는 꽃다발을 만들거나 화분에 꽂혀 있어야 한다. 만약 쓰레기 통에 버려져 있으면 그 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도 가치도 행복도 다 사라지는 것이다. 대장간 아저씨의 땀을 먹고 만들어진 식칼이 어느 집 조리대 위에서 맛있는 요리를 위해 사용되어진다면 참으로 좋은 도구이지만 바로 그 식칼이 강도의 손에 들려지면 흉기로 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때 가장 아름답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인간 행복의 여러 가지 조건을 얘기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안이다. 그 평안은 하나님 앞에 두려움이 없을 때 참된 평안이 주어지게 된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때 두려움이 없는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본문에 나타난 요시야 왕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이방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다.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해, 달, 별 그리고 그모스, 아스다롯,밀곰, 몰랙에 미혹되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렸고 자기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던 중 율법책을 발견하고(왕하22:8) 그 율법책을 통하여 자기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 여호와의 특별한 사명을 가진(왕상13:2) 요시야의 가슴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뜨겁게 불타 올랐고 이방 신들의 산당과 신상을 불태우고 그 섬기는 제사장들을 징벌했다. 하나님을 저버린 삶,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린 삶, 이런 잘못된 삶을 바로잡고 개혁을 한 것이다.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린(롬1:23) 하나님의 영광을 되찾자는 것이다. 그 영광을 위해 살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 창조 목적에 맞게 사는 삶이다. 오늘을 사는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못하고 자신의 영예를 쫓는 잘못된 사람들이 있다. 저 바벨탑을 쌓던 무리들처럼 자기 이름을 높이고 드러내려는 사람들이 있다. 최고 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다. 최고가 되어야 한다. 국내에서 최고, 동양에서 최고, 세계에서 최고가 되어야 한다. 그러는 사이에 하나님의 영광은 뒷전이 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돈을 쫓아가는 사람이 있다. 명예, 권력, 향락을 쫓아가는 사람이 있다. 모두가 다 개혁되어져야 할 사람들이다. 어쩌면 우리 각자의 가슴 속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아 없애는(아가2:15) 내 마음 속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하겠다.
2.하나님의 말씀으로 본문 3절에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좇기로 하니라”고 했다. 본문 25절에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고 했다. 요시아 왕의 종교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룩되어졌다. 성전 수리 중 발견한 율법책을 통하여 자신들의 지금까지의 삶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율법책을 통하여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눈을 뜨게 하였고, 자신들의 추한 모습을 보게 하였고, 죄악으로 더러워진 삶을 박차고 일어설 수 있는 결단을 내리게 하였다. 요시아 왕의 종교 개혁의 대열에 모두 함께 하며 이제까지 섬기며 숭배해 왔던 이방 신들을 과감히 버릴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놀라운 힘과 능력이다. 말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말이 지니는 힘이 달라진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담겨져 있다. 요시야 왕 이전까지 우상숭배가 온 나라에 극성이었음에도 누구 하나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두가 다 순종하였다. 16 세기에 일어난 종교 개혁 운동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사람이 죄 사함을 얻고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지(롬3:22)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을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돈주고 면죄부를 사서 의롭게 될 수는 더더욱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참으로 우리 성도가 가슴 깊이 간직해야 될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가 한편 많은 폐단을 가져오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잘못 사용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면죄부의 판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가 아니었을까. 문제는 지나친 열정이 기도보다 성령님보다 앞서 가는데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뜨거운 마음이 하나님의 뜻을 앞지르는데 있다.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친 베드로드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8:1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면서, 주를 위한 충성이 지나쳐서 생기는 문제도 많다. 베드로 성당을 지어 하나님께 봉헌하고져 하는 뜨거운 마음이 잘못되어 면죄부를 판매하기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대한 예수교 장로회”란 이름 아래 100이 넘는 교단이 있다고 한다. 저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께 충성하며 살려니 어쩔 수 없었다는 분리의 이유들이 진정 주의 영광을 수놓는 아름다운 오색실일까. 세월이 흐르고 나름대로의 자리가 잡히면 동질성을 얘기하고 형제 교단 운운한다니. 함께 할 수 없어서 해어진 이들이 연합 운동이란 이름 아래 한 자리에 모여 같이 찬송하며 함께 기도하고 아-멘 한다. 그러면서 왜 하나가 되지는 못하는 것일까. 한 자리에 모여서 같이 찬송하고 함께 기도하고 한 목소리로 아-멘 하며 예배 드릴 수 있는 이들이 하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주님 앞에서 진정 어떤 이유일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데 그 하나님의 영광은 어떤 영광일까. 우리 성도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나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삼고 있는지를. 행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면서 그 영광의 자리에 자신이 올라 있지나 않는지. 우리의 창조된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8) 이 사실을 명심하고 내 가슴 속에 이루어야 할 종교 개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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