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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실로아의 물을 사모하라 (사8:5-8)

본문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남쪽 유다에게 들려주신 말씀이다. 잔잔한 실로아의 물을 버리고,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유브라데강을 선택함으로, 그 강의 범람으로 망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잔잔한 실로아의 물”은 예루살렘 동남쪽에 있는 수원지로(느3:15), 이 물은 기드론 골짜기 위에 있는 기혼의 샘으로부터 바위를 뚫고 만든 터널을 통해 공급된다. “실로암”이나 “셀라”라는 이름으로도 불려진다.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유브라데강”은 에덴 동산의 네 강 중의 하나이며, 발원지는 힛데겔강과(티그리스) 같이 오늘날의 터어키 알메니아 산맥을 근원지로 한다. 두 강이 합쳐져 페르시아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이기도한 이 강은 길이가
2,850km나 된다고 한다. 매년 5월경이면 상류 지방의 눈이 녹아 하류 지방에서는 강물의 범람으로 물난리를 겪는다고 한다. “잔잔한 실로아의 물”과 “흉용한 유브라데강”에 대해서는, 그 당시 사람들은 서로 반대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실로아의 물은 예루살렘에 생명수를 공급해 주는 젖줄로, 유브라데강은 범람으로 죽음, 황폐, 고통의 상징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람 왕 르신과 북쪽 이스라엘 왕 르말리야의 아들 베가가 예루살렘을 침공했으나 점령하지는 못했다(사7:1). 그러나 아람군이 에브라임에 진군하여 진을 쳤다는 소식에 왕과 백성들의 마음이 두려움에 떨었다(사7:2). 그래서 유다 왕국이 “잔잔한 실로아의 물” 같이 흐르는 반석에서 솟아나는 생명수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눈에 보이는 큰 힘의 강물 곧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유브라데강”인 앗수르를 택하게 된다. 이것이 그들의 패망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해 있어라. 하나님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살길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사야 8:18절에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고 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주신 자녀들을 통하여 “징조와 예표”를 삼으셨다. 한 아들의 이름은 “스알야숩”이었고(사7:3), 또한 아들은 “마헬살랄하스바스”이었는데, 하나님이 주신 이름이다(사8:3.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이고, “마할사렐하스바스”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할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긴바 될 것”이라는 뜻이다. 다메섹은 아람의 수도이고,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의 수도이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잔잔한 실로아의 물을 사 모하라고 하시는, 이사야를 통하여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 보고져 한다.
1.잔잔한 실로아의 물은 무엇을 말하는가 본문 6절에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라고 했다. 본문 6절의 말씀은 난해한 구절이다.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을 “기뻐한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로 유다 왕국을 동맹하여 침공해 온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7:1-2절에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 때에 아람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 왕 베가가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혹이 다윗집에 고하여 가로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고 했다. 그래서 “기뻐하다”와 비슷한 “두려워하다”의 잘못된 기록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문맥상의 의미는 통할지 모르나 잘못된 기록으로 인정하고 수정하기 시작하면 성경 본래의 모습은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이다. 여기서 “기뻐하나니”의 다른 의미는 “즐거워하였음으로”이다. “잔잔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 같은 하나님의 도우심…. 곧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니, 겉으로 나타나 보이는 “힘의 모습”이 없다는 말이다. 그와는 달리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니 아람과 이스라엘의 동맹군의 모습은 “위세 당당”하다는 말이다. 여기서 “르신과 르말라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라는 말은 그들의 “위세 당당”한 힘의 모습을 “부러워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남쪽 유다 왕국은 실제로 이사야의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위세 당당”한 힘의 모습을 찾아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유브라데강”의 앗수르에게 구원을 요청한다(왕하16:7).
이러한 유다 왕국의 인간적 생각은 “잔잔한 실로아의 물”을 버리게 된다. 사실은 사모하고 따라야 살길이 있고,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노래할 수 있는 것인데. 저들이 버린 “잔잔한 실로아의 물”은 무엇을 뜻하는가
⑴.하나님의 말씀 이사야 8:20-21절에“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고 했다. 실로암의 물이 기드론 골짜기 위에 있는 기혼의 샘으로부터 바위를 뚫고 만든 터널을 통해 공급되듯, 반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을 먹이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상징한다. 고린도전서 10:4절에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했다. 오늘의 우리는 이 “잔잔한 실로아의 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마시게 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은혜와 사랑, 그리고 성령님의 도우심 등이다. 우리 성도가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이 신령한 음료를 버리고, 인간적인 “육신의 소욕”을 쫓아(갈5:17),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6)을 쫓아 살아가면, 남쪽 유다 왕국이 걸어간 패망의 길을 걷는 것이 된다.
⑵.말씀을 묵상하는 생활 시편 1:1-3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했다. 잔잔한 실로아의 물을 사모하는 삶은 바로 다윗과 같이 말씀을 늘 묵상하는 삶이다. “주야로” 묵상하는 삶, 곧 “시시때때로”란 말이다. 이런 자에게는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라”고 했다. 그것은 바로 그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시23:3).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기 때문이다(시1:6)
⑶.씹고 또 되씹고 왕상 19:11-1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어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 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잔잔한 실로아의 물” 같이 임하신다.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도 아니다. 지진 가운데도, 불 가운데도 아니다. 크고 장엄한 모습들이 지나간 후, 마치 폭풍 전야와 같은 고요함 속에 들려 오는 “세미한 소리”, 다시 말해서 “잔잔한 실로아의 물결” 같은 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 왔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처럼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게 잘게 부수고 갈아야 한다. 이 과정이 “말씀을 묵상”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2.급한 물 본문 6절에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라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라고 했다. 유다 백성이 “잔잔한 실로아의 물”을 버리고, 위세 당당한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급류 곧 “급한 물”을 부러워하게 된다. 실상은 그 “위세 당당함”이 인간의 눈에 비쳐진 당당함 뿐인데.
⑴.르신과 베가 르신은 아람 왕이다. 베가는 북쪽 이스라엘의 왕으로 르말리야의 아들이다. 베가는 이스라엘의 장관으로 브가히야 왕을 죽이고 왕이 되어(왕하15:25) 20년간 통치하였다. 이들은 앗수르가 세력을 넓힘에 따라 반 앗수르파의 세력을 규합하고져 했으나 유다 왕 아하스의 반대로 동맹하여 치게 된다. 남쪽 유다에도 친 아람계인 다브엘의 아들로 왕을 삼아(사7:6) 친 아람파의 세력을 넓히고져 했다. 이들 동맹군이 예루살렘을 침공하니 한 나라도 아닌 두 나라 동맹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적을 보니 두려움이요, 자신을 바라보니 절망 뿐이었다. 함께 하시던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다. 왕하 18:7-8절에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사람을 쳐서 가사와 그 사방에 이르고 망대에서부터 견고한 성까지 이르렀더라”고 했다 어디 그뿐인가 저들의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고, 만나 내려 먹이시고, 그 불과 구름 기둥으로 광야를 통과케 하신 하나님이시다. 다윗의 하나님이시오, 솔로몬의 하나님이셨다. 그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저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다 하신다. “두려워 말라. 낙심치 말라” 하신다. “저들의 도모가 이루지 못하리라”고 하신다. 그러나 유다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세미하여 “잔잔한 실로아의 물” 같아서이리라. 그래서 저들은 “천천히 흐르는 물”이 아닌 “급한 물”을 부러워하였으리라.
⑵.급한 성격 요한복음 18:10절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 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고 했다. 주님을 위한 목숨 건 베드로식의 충성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를 금하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 아니라고 하셨다. 오늘의 우리 성도들이 빠지기 쉬운 “급한 물”이라고 본다. 목숨을 건 충성도 주님의 방식이 아니고 자기 방식이 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목숨을 건 충성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누가복음 9:54절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행, 더욱이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시기 위해 올라가시는 마지막 길이셨다. 갈릴리 사역을 마친 주님이 사마리아를 통과하게 되셨다. 머무실 장소를 찾는 주님 일행을 배척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간의 해묵은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이방인 취급을 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의 출입을 금하였고, 사마리아인들은 따로 예배 처소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요4:20)
그런데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려 올라간다며 평소에도 않던 일을 하고 있다.-(유대인은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지름길을 버리고 돌아서 다님)-자기들의 예배 처소에서 예배를 드리고져 해도 용납할지, 말지 인데. 그래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했다(녹9:53). 그때 이들을 지켜보던 야고보와 요한이 “우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멸하시기를 원하십니까”라고 주님의 동의를 구하는 장면이다. 주님을 향한 불타는 충성심인데.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꾸짖으심”이다(눅9:5
5). 바로 오늘의 우리 성도들이 빠지기 쉬운 “급한 물”이라고 본다.
⑶.성급한 결정 사사기 11:3절에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라고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입다의 결정이다. 사사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입다이다. 암몬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어야 할 중차대한 사명을 수행하려는 입다 사사이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충성심이 가져온 성급한 결정이리라. 성급한 맹세이리라. 조금만 찬찬히 생각하였다면,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였다면, 하나님께 “사람”을 번제로 드릴 수 없음을 알았을 터인데. 그 일이 바로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이방 신들의 일임을 알았을 터인데. 한 번 실수는 두 번 실수를 낳게 된다. 이것이 죄성이다. 하나님 앞에 드린 “맹세”가 잘못 된 맹세이면 자신이 회개할 일인데, 하나님 앞에 드린 맹세라고 무남 독녀 외동딸을 불태워 죽이다니. 이 모두가 입다의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충성심이 가져온 비극이다. 충성심으로 맹세를 하였고, 무엇인가 잘못된 일인 줄을 알면서도 그 맹세를 지켜야 한다는 충성심으로 자기의 무남 독녀 외동딸을 불태워 죽인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잘못된 맹세”에 관한 문제이다. 그 “잘못된” 일을 내게 “손해가 되는” 일로 생각하면 안된다. “맹세”를 하는 “인간의 입장”이 아니라 그 “맹세”를 받아들이는“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무남 독녀를 드리는 것이 입다에게 손해가 되어서가 아니라-(입다의 입장)-사람을 번제물로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이시기에-(하나님의 입장)-그 맹세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맹세 자체가 “잘못된 맹세”라는 점이다. 사사기 11:35절에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하여금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라고 했다. 입다의 잘못된 생각은 자꾸만 번져 나간다. 자기 딸이 아닌 종이 될 줄로 “예상”했다는 소리로 들린다. 그 종도 사람이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신 생명인데. 입다 사사의 이같은 성급한 결정. 바로 오늘의 우리 성도들이 빠지기 쉬운 “급한 물”이라고 본다.
3.흉용하고 창일한 물 본문 7절에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고 했다. “천천히 흐르는 물” 곧 잔잔한 실로아의 물을 버리고 “급하게 흐르는 물”, 급류 곧 급한 물인 아람과(르신) 이스라엘의(르말리야의 아들 베가) 동맹군의 “위세 당당”함을 부러워한 나머지, 그 “위세 당당”함 보다 더 크게 보이는 흉용하고 창일한 물을 의지하는 유다 왕국이 되고 만다.
⑴.앗수르 왕하 16:7-8절에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컨대 올라와서 나를 그 손에서 구원하소서 하고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취하여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내었더니”라고 했다. 잔잔한 실로아의 물을 버린 아하스 왕의 눈에는 하나님이 전혀 보이지 않았나 보다. 그들의 “오늘”이 있게 하셨던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인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을 의지하는 것만으로도 통탄할 노릇인데. 여호와의 전에 바쳐진 은금을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바치다니. 지금 아하스에게는 자신들의 유일하신 하나님도 보이지 않고, 이사야를 통해 주신 징조도 보이지 않는다.-(스알야숩→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사10:21),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선악을 분별하기 전 곧 철들 나이가 될 쯤 두 왕이 망함(사7:16), 대략 12-3세. 마헬살랄하스바스→ 엄마 아빠 하기 전에 두 나라가 망함(사8:4), 대략 3세.)-어디 그뿐인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도 들리지 않는다. 이사야를 통해 주신 말씀은, 너 보기에는 대단하여도 실상은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다. 65년 내에 북쪽 이스라엘의 멸망(사7:9)을 일러주시나 들리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흉용하고 창일한 물인 앗수르를 의지하기 위해 내디딘 잘못된 그 한 걸음은 타락의 길이 되고 만다. 앗수르 이방 신전을 찾게 되고 그 단의 구조, 제도, 식양을 본떠서 예루살렘에다 그 단을 만들고, 그 단 위에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삶이 되고 만다.
바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하는 시내산 밑에서의 저들의 조상들이 걸어간 길이다. 바로 오늘의 우리 성도들이 빠지기 쉬운 “종교 일치 주의”이다. 좋은 말로 종교간의 화합과 일치를 부르짖는 운동이다. 그러나 실상은 “종교 혼합 주의”가 되고 만다. 어쩌면 앞으로 나타날 거대한 종교 집단을 형성하게 되리라. 벌써 종교간 담이 허물어지고 있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 유교, 천도교, 등의 지도자들이 자리를 함께 하고 머리를 맞대고 있다. 흉용하고 창일한 물 큰 강 유브라데의 범람 같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힘인데. 그러나 인간의 눈에 보기에 미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잔잔한 실로아의 물을 버림이 패망인데. 흉용하고 창일한 물을 선택함이 멸망인데. 그것을 모르고 있다. 바로 영안이 어두워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귀가 어두워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이 세상으로 열려 세상의 큰 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것을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잔잔한 실로아의 물을 사모하자. 그 물이 바로 생명수의 물이다. 급한 물, 흉용하고 창일한 물은 생명수가 아니다. 먹을 수 있는 물이 아니다. 먹으면 배탈이 날 물이다. 잔잔한 실로아의 물이 나오는 그 반석이 “구원의 반석”, “피할 바위”가 되어야 한다.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어서는 안된다. 함정과 올무가 되어서는 안된다. 잔잔한 실로아의 물을 사모하라 그리하면 그 물이 나오는 반석이 “구원의 반석”, “피할 바위”가 되실 것이요, 잔잔한 실로아의 물을 사모하라 그리하지 않으면 그 물이 나오는 반석이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될 것이다. “함정과 올무”가 될 것이다(사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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