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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멀리 떠나 (눅15:11-32)

본문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이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분깃을 요구하여 받아 가지고 먼 타국으로 떠났다. 거기서 허랑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허비한 후, 남의 집 삯꾼 생활을 하다가 뉘우치고 아버지께로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그래도 탕자에게 새 삶의 길이 있었고, 꿈이, 소망이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탕자가 버리고 떠나간 아버지였지만 나간 자식 돌아오기를 밤새워 기다리시는 아버지였다. 먼 산을 바라보며 자식을 기다리는 마음…. 동구밖의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입맞추는 아버지였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타락한 우리 인간들이 어서 돌아오길 기다리고 계신다. 죄에 대한 심판과 멸망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우리 하나님은 온 세상 사람 모두가 회개하여 구원 얻기를 원하고 계신다(벧후3:9) 아버지를 멀리 떠나 탕자가 걸어간 길 바로 타락한 인생이 가는 길이다. 아니 우리 모두가 다 탕자의 길을 걷고 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나타락한 인생이 가는 길의 표본이다. 오늘 우리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아버지를 멀리 떠나 탕자가 걷는 길을 살펴보며, 지금 나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혹시 탕자의 길이 아닌가를 살펴보자.
1.자유 하길 원했네 본문 12절에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라고 했다. 유대 나라도 우리 나라처럼 맏아들이 호주권을 상속을 하고, 가업을 이어 받는다. 그래서 장자의 명분이 대단하다.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서 보듯 장자권을 차지하기 위해 야곱이 갖은 수단을 부린다. 그만큼 장자권이 중대하다는 것이다.
1.아버지의 간섭 본문 13절에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라고 했다. 그러나 장자권이 없는 아들이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은 우리 나라와 비슷한 모양이다. 본문의 둘째 아들도 자신의 분깃을 챙겨 며칠이 못되어 먼 타국으로 가 버린다. 곧 아버지의 간섭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이다. 장자권이라는 소망도 없고, 뼈빠지게 일해 보았자 형님 좋은 일이니 자신에게는 득이 없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맏이가 아닌 아들들의 공통된 생각이 아닌가 여겨진다. 실상 아버지의 그늘이 사랑인데 얄팍한 속셈이 이를 간섭으로 오해케 한다. 아버지의 간섭은 자신을 일깨워 주는 사랑인데 이를 깨닫지 못한다. 우리 인간의 가슴속에 욕심이 작용을 하면 이처럼 판단이 흐려지게 된다. 이는 너와 나, 우리 모두의 삶을 통하여 경험하는 사실이다.
2.독립 본문 12절에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더니”라고 했다.
둘째 아들에게도 장자권만은 못하지만 “자기의 분깃”을 요구할 수 있는 재산 청구권이 있었다. 자기에게 돌아올 몫을 계산해 보니 그런대로 독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독립은 그의 소망이 되었다. 마침내 아버지께 “자기의 분깃”을 청구하게 되고, 나눠주는 살림으로 곧 바로 독립의 길을 걷게 된다. 독립
그렇다면 실질적인 독립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아버지의 눈에 안 보여야 하고, 아버지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곳, 바로 거기가 완전한 독립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같은 나라도 아닌 이국 땅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3.아버지 같이 본문 13절에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라고 했다. 둘째 아들이 왜 아버지의 간섭을 떠나 독립된 삶을 소망했을까 바로 아버지처럼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라고 시키기만 하면 되고, 언제나 매사의 최후 결정자로서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위치 바로 아버지의 특권이다. 그것이 늘 부러웠다. 나도 독립을 하면 그 아버지의 특권을 가질 수 있고, 내 뜻대로 모든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그 부러움이 마침내 독립을 선언하고 아버지의 곁을 떠나게 했다. 아버지의 특권, 그것은 권리만이 아니라 거기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둘째 아들은 몰랐다. 권리가 크면 클수록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실상은 그만큼 책임도 중하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모른다. 직장인의 세계에서도 높은 자리일수록 그만큼 책임이 중대한 것이다. 책임이 따르지 않는 권리는 없다. 알고 보면 권리는 내가 져야 하는 책임의 대가이다. 높은 자리에 있어 보지 못한 말단 사원은 생각지 못하는 부분이다.
오늘 본문의 둘째 아들 역시 지금까지 아버지의 그늘에서 맡겨진 일만 감당하면 되었지 자신의 한 일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삶이 아니었다. 책임의 중대성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책임의 중대성을 보지 못하고 권리의 화려함만 보니까 부러움의 대상이요, 소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 소망이 강하여 욕심으로 발전하면 판단을 잃게 되고 욕심을 따라 제멋대로 행하게 된다. 창세기 3:4-5절에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했다.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의 경우를 보라. 뱀의 유혹을 받아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사실에 그만 욕심을 부린 것이다. “하나님 같이” 되려다가 결국 에덴에서 쫓겨 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사야 14:12-15절에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라고 했다. 이 말씀은 자기의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나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고 욕심을 부리던 천사가 타락하여 쫓겨나 사탄의 자리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유1:6) 이처럼 우리 인간은 욕심에 빠지게 되면 사리 판단이 흐려지게 된다. 자기 지위도, 자기 처소도 지키지 않고 날뛰게 된다. 사리 판단이 흐려진 자의 삶이 실패로 끝날 것은 또한 뻔한 일이다. 그러나 막상 내가 같은 처지에 이르면 꼭 같은 길을 걷게 되는 것이 연약한 내 모습이다. 그러기 능하신 주의 손에 붙잡혀 살아갈 수 있도록 더욱 깨어 기도해야 한다
2.세상열락(世上悅樂)을 즐겼네 본문 13절에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라고 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나 아버지의 간섭을 받지 않고, 내 마음 내 뜻대로 살고자 했던 둘째 아들 그의 앞에 펼쳐진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버지 같이” 주권을 가지고 세상열락을 즐기려는 그에게 주어진 숱한 즐거움과 웃음들 그것이 그리도 무서운 웅덩이 일 줄이야
1.허랑방탕(虛浪放蕩) 본문 13절에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라고 했다. 여기의 “허랑방탕하다”는 말은 “방탕한 생활”을 말하며 “구원치 못한다”는 뜻이다. 곧 “방탕”은 구원과 상반되는 멸망의 길이다. 절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 따라 행동하는 삶이다. 아버지를 멀리 떠나 “아버지 같이” 되니 참으로 좋았다. 지금껏 맛보지 못한 육신적인 즐거움, 자기 앞에서 자기의 비위를 맞추려 애쓰는 사람들 사는 재미가 이렇게 좋은 것인 줄 몰랐다. 자기 아버지도 맛볼 수 없는 사는 재미 내가 누리고 있다. 가슴 뿌듯한 만족이다. 아버지 보다 더 나은 자신임에 자랑스럽기도 하다. 자기가 아는 한 아버지는 꿈속에서도 이런 재미가 있는 사실조차 모르리라. 딱하고 불쌍한 우리 아버지 오히려 동정하는 자세이다.
2.돈 쓰는 재미 본문 13절에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라고 했다. 허랑방탕한 생활은 영혼의 멸망만 가져올 뿐 아니라 육신의 생활도 파멸케 한다. 허랑방탕에서 오는 육신의 즐거움, 돈 몇 푼 던져 주고 마음대로 명령하고 마음대로 부려먹는 그 돈 쓰는 재미에서 오는 즐거움 그 즐거움 뒤에 기다리는 멸망과 파멸의 그림자 깨닫지 못한다. 돈이 다하는 날, 그 모든 즐거움이 함께 날아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돈을 때문에 굽실대고, 돈 때문에 아양을 떨고 비위를 맞추고 있는 줄을 알지 못한다. 돈보고 하는 일을 마치 자기가 훌륭해서 그런 줄로 착각을 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3.창기와 함께 본문 30절에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라고 했다. 돌아온 동생을 환대하는 아버지에 대한 맏아들의 불평이요 항변이다. 맏아들의 통분을 생각하고자 함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둘째 아들의 허랑방탕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술과 여자”로 그의 허랑방탕이 집약된다. 그렇다. 허랑방탕의 생활은 인간 육신의 소욕을 쫓는 삶이다. 육신 소욕의 대표적 욕망이 바로 정욕이다. 그것을 채우는 길이 곧 “술과 여자”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하늘에서 내린 유황불에 멸망 받은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의 삶이 그러했고(창19:24, 유1:7), 출애굽 여정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먹고 마시며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었지만 싯딤에서 모압 야인들의 유혹에 넘어 갔다(민25:1-) 아버지를 멀리 떠나 세상열락에 잠길 때 멸망과 파멸이 그 집 앞에 곧 찾아온다. 아버지가 몰라서 즐기지 못하는 재미가 아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알기에 세상열락에 빠질 수 없는 것이다. 한 가정을 대표하는 자신의 위치를 안다. 신앙적으로 보면 믿음의 조상으로서 표본이 되어야 하고, 세상적으로도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 표본이 되어야 한다.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를 멀리 떠나 세상열락을 즐기다 패망의 길에 빠지면 그 가족은 누가 책임을 지는가
3.실패할 수밖에 없었네 본문 13-14절에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고 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나 아버지의 간섭도, 아버지의 가르침도 마다하고 멀리 멀리 이역 만리 타국 땅에서 독립을 하였다. 참으로 시작은 꿈과 소망이 넘쳤다. 아버지도 맛보지 못한 사는 재미를 맛보았다. 그러나 그 재미가 영원한 것이 아님을 알지 못했다. 그 재미의 끝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찾아올 줄은 몰랐다(마24:50) 누리는 “권리의 영화”만큼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또한 내일을 대비하지 못하고 “오늘의 즐거움”에만 빠져 있으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1.비로소 궁핍 본문 14절에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했다. 세상열락에 빠지면, 허랑방탕에 빠지면 그것이 끝나기 전에는 깨닫기 힘든 모양이다. 본문의 탕자도 “다 없이 하기 까지” 깨닫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흉년이 들었다. 그것도 크게 들었다. 돈 떨어져 친구 떨어져, 거기에다 큰 흉년이 들어 결국 “비로소 궁핍한지라”가 되었다. 탕자가 지금까지 처해 보지 못한 위기이다. 부모의 슬하라면 부모가 대신할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를 멀리 떠나 아버지의 간섭을 피해 있는 지금, 사랑의 손길마저도 닿을 수 없는 형편이다. “책임지는 삶”에 대해 배우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그는 닥쳐온 위기 “비로소 궁핍”에 대처할 능력이 없다. 오직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을 포기하는 길뿐이었다. 그렇게도 “아버지 같이” 되기를 원한 “자신”인데, 한 때는 세상락이 다 자기 것으로 착각하리 만큼 잘 나가던 자신인데, 그러나 포기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다. “비로소 궁핍한지라” 정말 그에게는 또 하나의 세상을 맛볼 수 있는 궁핍이었다. 인정도 눈물도 없는 세상, 돈 떨어져, 친구 떨어져, 거기에다 하늘까지 무심해, 웬 흉년인가 그것도 크게 흉년이 들게 뭐람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고 한다. 인심은 쌀독에서 난다고 했다. 크게 흉년이 들어 너도나도 힘들고 어려우니 이웃 생각할 겨를이 있겠는가 결국 “비로소의 궁핍”은 모든 이의 가슴속에 사랑까지 메마르게 했다.
2.돼지 치는 자 본문 15절에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라고 했다. “내게 돌아올 분깃”을 챙겨 아버지를 멀리 떠나 독립을 선언하고, “아버지 같이” 되어 세상열락을 즐기던 탕자 참으로 탕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품군으로 전락했다. 그것도 남의 집 푼으로 전락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나 내 분깃을 챙겨 올 때와는 너무도 다른 패잔병의 모습이다. 먹고살기 위해 남에게 붙여 사는 일, 이 또한 일찍이 그가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 하노라고 해도 주인의 마음에 차지 못하는 일, 열심히 죽으라고 해도 먹고살기에 급급한 일 남의 집 종살이가, 남의 집 품군 노릇이 이리도 힘든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으리라. 남의 집 품군 노릇, 그것도 돼지 치는 자 생각하면 마음 아픈 괴로움 투성이다. 돼지는 부정한 짐승으로 유대인에게는 합당치 못한 일이다. 그러나 먹고살기 위해서 않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 내 분깃을 챙겨 나온 당당한 자유인인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열락을 즐기던 자신인데 돼지 치는 자라니, 그것도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한 돼지 치기라니
3.쥐엄 열매 본문 16절에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고 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나 독립 선언을 하고, 자유인의 노래를 부를 때와는 너무도 딴 판인 모습이다. 세상열락을 즐기며 돈 쓰는 재미를 즐길 때와는 너무도 달라진 모습이다. 딱하고 불쌍타 못해 처량한 모습이다. 처참한 모습이다. 모진 것이 목숨이라 드니 그래도 살려는 모습이 오히려 더 참담하다. “아버지와 같이” 되려다 결국 돼지 보다 못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돼지 먹는 쥐엄 열매”도 마음놓고 실컷 한 번 먹어 보지 못하는 처량한 모습이다.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이가 없는지라”고 했다. 돼지도 마음껏 배불리 먹는데 탕자는 그 돼지 사료인 쥐엄 열매도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멀리 떠나 간섭 없는 자유로움이 성공의 길인 줄 알았다. 세상열락의 그 즐거움이 성공의 영광인 줄 알았다.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파멸의 구덩이에 빠질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4.죄인임을 깨달았네 본문 18절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라고 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나 자유인으로 살기 원했고, 아버지의 간섭을 떠나 독립하기를 원했고, 세상열락을 즐기며 돈 쓰는 재미를 즐겼다. 그러나 “비로소 찾아온 궁핍” 앞에 무너지는 꿈이여! 산산이 부셔지는 자존심, 짐승 보다 못한 신세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나 주는 사람이 없는 외롭고 고독함이여
1.스스로 돌이킴 본문 17절에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했다. 인생살이를 수 없는 시행착오의 연속이라고 한다. 처음부터 온전한 것은 없다. 그래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했다(마5:48) 우리 모두는 남의 실패를, 남의 실수를 나무랄 수 없는 다 같은 처지이다. 우리의 잘못이나 실수가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뉘우치고 돌이키는 회개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게 문제이다.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을까 이사야 1:18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했다. 우리의 죄가 주홍 같고,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희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이 용서 못할 만큼 큰 죄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너희 죄가 어떤 죄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회개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죄 용서가 달려 있다.
2.아버지의 풍성 본문 17절에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나 말할 수 없는 실패와 절망 속에서 좌절하고 있을 때 그래도 탕자의 가슴속에 한 가닥 소망의 빛이 있은 것은 “아버지의 존재”이다.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 그것도 풍성하고 풍족한 아버지 먹고살기 위해 입에 풀칠하기에 급급한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버지이다. 아버지, 그의 사랑은 무궁하다(렘31:3) 밤마다 문 열어 놓고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시는 아버지이다. 자기 분깃을 챙겨 떠나가 버린 아들이다. 쉽게 말하면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간 자식이다. 그러나 그 자식이 돌아오기를 밤마다 문 열어 놓고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이다.
3.하늘과 아버지께 득죄 본문 18절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라고 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나 “비로소 궁핍”에 처한 그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다 그만 자기를 포기해 버린다. 자기를 포기해 버릴 때 비로소 눈이 열린다. 마음의 눈이 열린다. 영안이 열린다. 비로소 하늘(하나님)이 보이고, 사랑의 아버지가 보인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를 멀리 떠나 비로소 죄인임을 깨달았네.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 말할 수 없는 그의 은혜, 어찌 이대로 머물 수 있겠는가 찾아가 용서를 빌어야지 결단을 내리고 아버지를 향해 일어서는 탕자의 모습이다.
4.품군의 하나로 본문 19절에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탕자, 죄 용서함 받기 위해 아버지 앞에 섰다. 자신의 분깃을 찾아 아버지의 간섭을 피해 떠날 때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르다. 스스로 자기를 포기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와의 차이이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와의 차이이다. 마음의 눈이 열리고 영안이 열려 하늘이 보이고 사랑의 아버지가 보이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와의 차이이다. 회개할 마음의 자세가 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와의 차이이다. 본문 21절에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고 했다 “아들”이기를 포기한다. 자기 스스로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다. 아버지의 간섭도, 가르침도, 명령도 원치 않았다. 왜 “아버지와 같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런 자신이 어찌 또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자기를 버리는 것이 용서를 비는 자의 참된 자세이다. 자신을 주의 십자가 앞에 내어놓을 수 있을 때, 가슴 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회개가 된다. 그렇지 못할 경우 마음 따로, 입술 따로의 회개가 되고 만다.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포기하는 회개, 마음 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회개 이런 회개를 아버지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신다. 또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그 기쁨 말로 다할 수 없다.
본문 22-23절에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라고 했다. 좋은 옷을 갈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는 것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키고 아들로 인정한다는 표시이다. 더욱이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린다는 것은 모든 사람 앞에서 아들로 인정한다는 공표이다. 본문 24절에 “이 내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고 했다. 아들을 인정하는 기쁨, 아들로 공표하는 기쁨, 곧 죽었다가 살아난 기쁨이요, 잃었다가 다시 찾은 기쁨이다. 돌아온 탕자의 마음은 말할 수 없는 은혜에 거저 감사할 뿐이요, 아버지의 마음은 죽은 자식 살아 돌아온 기쁨이다. 이 또한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이다. 본문 29-30절에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라고 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이 기쁨의 잔치에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오히려 아버지를 향하여 불평과 원망을 쏟아 놓았다. 그날도 밭에 나가 열심히 일하고 돌아오는 맏아들이 바로 그 사람이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긴 일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내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았다”고 불평을 한다. “내 벗과 함께 즐겨 본 일도 없다”고 불만을 토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을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느냐”고 원망을 한다. 노하여 집에 들어가기를 즐겨 하지 아니 했다고 한다.
본문 31-32절에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고 한다. 이것이 문제이다. 아버지와 함께 하는 축복 실상 다 자신의 것으로 누릴 수 있었는데 스스로 아버지 것이라고 여기고 누리지 못한 축복이다. 친구를 위하여 염소 새끼, 살찐 송아지, 아니 살찐 황소를 잡았어도 나무라실 아버지가 아니다. 맏이 역시 사랑의 아버지를 깨닫지 못하고 엄한 아버지로만 보아 왔고, 섬겨 온 것 같다(마25:24-25) 맏이의 형제애(兄弟愛)도 문제가 된다. 흔히들 맏이는 부모 대신이라고 한다. 그만큼 너그러운 마음으로 어린 동생들을 돌본다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면 맏이가 부모 대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형은 동생이라 부르지 않는다. “아버지의 아들”로 본다. 그것도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아버지의 아들”로 본다. 자기와의 관계를 끊으려고 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기의 아들”로 보지 않고 “맏이의 동생”으로 본다. “이 네 동생은”이라고 한다. 이것이 아버지다. 아버지의 마음이다. 두 형제가 의좋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일 처리를 “자기의 아들”에 두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 아니라 “이 네 동생은”하고 “맏이의 동생”의 위치에 놓고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형제의 우의를 두텁게 하는 부모의 일 처리하는 모습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나는 과연 어떤 길을 걷고 있나를 깊이 생각해 보자. 아버지를 멀리 떠나 저 탕자의 길을 걷고 있는가
그렇다면 어서 돌아오오, 밤마다 문 열어 놓고 밤새워 기다리시는 아버님 곁으로. 아니면 여러 해 아버지를 섬기고 명령을 어긴 바 없이 충성을 다 했다는 맏아들의 길을 걷고 있나요
그렇다면 아버지를 바라보는 생각을 바꾸세요. 그 아버지는 엄한 아버지가 아니라 사랑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섬기고 명령을 따르는 것은 아버지 앞에 내세울 공로가 아니다. 아버지기에, 효도해야 하기에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다. 잘 생각하세요. 아버지를 가장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은 바로 동생을 반겨 맞는 일이다. 달려가 아버지처럼 입을 맞추는 일이다. 거기에 용서가 있고, 이해가 있고, 사랑이 있고, 형제 우애가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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