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엘리야의 착각 (왕상19:1-18)

본문

오늘 본문의 말씀은 엘리야 선지자가 이세벨의 칼날을 피하여 도망한 일을 말해 주고 있다. 엘리야 선지자는 자기 생명을 위하여 40주 40야를 행하여 도망쳐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 그 호렙산 굴속에서 자기 생명을 위하여 숨어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고 물으실 때, 엘리야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본문 10절/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 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 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본문 14절에서도 똑같은 대답이 반복되고 있다. 왜 하나님이 똑같은 질문을 두 번 하셨을까…. 엘리야 선지자는 이 점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는 자신이 여기 이 자리에 있는 나름대로의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가 하나님 앞에서도 타당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엘리야의 착각 그렇다. 하나님 앞에서도 타당한 것으로 알고, 믿고 있었던 것은 바로 엘리야의 착각이다. 엘리야 자신의 생각으로는 지극히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엘리야의 착각이다. 이렇게 스스로의 착각 속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 사람들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죽기까지 따르오리다 베드로의 착각이다.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바리세인의 착각이다. 주님을 대접하려 준비하느라 마음이 분주한데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않으십니까 마르다의 착각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론 성경 속에 나타나는 인물들의 착각도 많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며 그런 인물들을 살펴보는 것도 좋은 성경 상고의 한 방법이 되겠지만 무엇보다도 나 자신은 착각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엘리야의 착각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해서 엘리야의 착각을 살펴 보며 우리들 자신의 삶의 모습은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게 아닌가를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 보고져 합니다.
1.나만 홀로 남았나이다. 본문 10절/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 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 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하시는 여호와의 물음에 대답한 엘리야의 여기 있는 나름대로의 타당한 이유이다. 나만 홀로 남았는데 내 생명까지 취하려 하기에 도망쳐 와서 여기 숨어 있다는 것이다. “나만 홀로” 이런 사고방식은 위험한 것이다. 착각을 떠나 독선에 빠져 버리고 말 위험한 사고방식이다. 기독교계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이비나, 이단의 무리들이 갖는 공통적인 사고방식이다. 이들은 말한다. 자신들만이 진리를 말하고,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고, 자신들을 데리려 주님이 오신다고 한다. 남들은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엘리야의 착각 “나만 홀로 남았나이다” 이 착각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세미한 여호와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 소리가 아니다. 땅이 갈라지는 지진 같은 진동도 아니다. 불길 같은 뜨거움도 아니다. 세미한 소리 여호와의 세미한 소리를 들어야 한다. 본문 13절/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에게 들려 온 여호와의 세미한 소리는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하는 10절의 첫 번째 질문과 똑같은 물음이었다. 왜 똑같은 질문을 두 번이나 하셨을까 깊은 묵상에 잠겨 자신을 돌아보기도 전에 엘리야의 대답은 너무도 타당한 자신의 이유를 되풀이하고 있다. 본문 14절/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 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 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엘리야의 착각 그 “나만 홀로 남았나이다”하는 착각에 너무 깊이 빠져 있다. 너무도 확신에 찬 삶의 모습이다. 자신에게 잘못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하는 확신에 차 있다. 본문 18절/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만 홀로 그게 아닙니다. 실상은 내가 알지 못하는 7천인이 있습니다. 이렇게 확실한 말씀을 듣기 전에는 그 무서운 착각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이 시간 나 자신을 한 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7:22-23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 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권능도 행하고 참으로 주의 이름으로 살아온 확신에 찬 신앙생활이었는데 표적도 따랐는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하시다니 “그 날에” 가서야 내가 “착각 속에 빠져 있었구나” 하는 것은 이미 “때는 늦으리”가 되고 맙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때”가 늦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2.나는 열심이 특심하나이다. 본문 14절/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 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 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하시는 여호와의 물음에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라고 엘리야가 대답을 한다. 그 “열심이 특심한 증거”는 저 이스라엘 자손들은 주의 언약을 버렸고, 주의 단을 헐었고,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나 나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바알의 선지자 450명을 죽였다는 것이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엘리야가 말하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는 열심은 저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상대적 열심이다. 엘리야가 말하는 특심도 상대적 특심이다. 다시 말해서, 엘리야의 “열심이 특심하오니”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비교하여 조금 나은 열심이요, 조금 나은 특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하시던, 그 열심은 아니다. 그 특심은 아니다. 엘리야의 착각 자신이 누구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선지자이다. 주의 언약을 버리고, 단을 헐고, 선지자들을 죽이는 저 형편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일깨우라고 부르신 하나님의 선지자이다. 그런 그가 선지자인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을 비교하여 나는 좀더 나으니 “열심이 특심하오니”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들과 비교하여 내가 좀더 나은 것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맙시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사64:6), 걸레 같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롬3:10). 엘리야의 착각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은 주의 언약을 버렸고, 주의 단을 헐었으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나이다 엘리야의 착각 참으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다면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물음에서 자신이 있는 현재의 자리를 보아야 합니다. 목숨을 위하여 동굴 속에 숨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3.나까지 죽이려 하나이다. 본문 14절/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 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 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하는 여호와의 물음에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고 대답하고 있는 엘리야이다. 오직 나만 홀로 남았거늘 나까지 죽이려 하나이다 바로 엘리야의 착각이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부르신 것은 엘리야 자신의 생명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다. 주신 사명이 있다.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엘리야이다. 사도행전 20:24절/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 받은 사명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엘리야는 지금 사명지를 떠나 도망쳐 온 것이다. 이 사실을 잊고 있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오직 홀로 남은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선지자이요,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 하였고(약5:17),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을 죽인 엘리야이다 어디 내 목숨이 보통 목숨인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다. 네 생명이 대단한 것이 아니다. “오직 나만 홀로”가 아니다. 엘리야야 너 말고도 7천명이나 있다고 하신다. 본문 15-16절/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흘라 사밧의 아들 엘리 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가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는 엘리야를 향하여 주시는 명령이다. 네 생명을 지키는 자가 네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내가 네 생명을 지키는 것이지 네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 말고도 7천명의 생명을 내가 지키고 있다고 하신다.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가라” 엘리야의 착각에서 깨어나게 하시는 말씀이요, 갈 길을 제시해 주시는 말씀이요, 새로운 사명을 주시는 말씀이다.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가라” 가서 하사엘로 아람 왕을 삼고, 예후로 이스라엘 왕을 삼고, 엘리사로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로 삼으라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사명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나만 남았거늘 나까지 죽이려 하나이다 나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 엘리야에게 주어진 사명이 아닙니다. 일터로 달려가서 맡겨 주신 일을 감당하는 것이 엘리야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다메섹으로 달려가서 하사엘로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을 삼는 것도 대역죄로 당장에 목이 달아날 일입니다. 예후로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을 삼는 일도 당장 목이 달아날 일입니다.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가라”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사명 가운데서 이 한 가지만을 엘리야가 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명들은 엘리야를 대신한 엘리사 선지자가 감당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0:29-31절/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 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새 한 마리의 땅에 떨어짐도 하나님의 허락 안에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여기에 매달리다 보면 주신 사명을 축복을 남에게 넘겨주게 되고 맙니다. 엘리야의 착각 나만 홀로 남았나이다 실상은 7천명이나 있었습니다. 나는 열심히 특심하나이다 실상은 더러운 옷 같고, 걸레 같은 것입니다. 나까지 죽이려 하나이다 실상은 도망쳐서 지켜질 목숨이 아닙니다. 그릿 시냇가의 까마귀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사르밧 과부의 밀가루 통도, 기름병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을 죽이고 자신의 생명을 지킨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엘리야만의 착각일까요 저와 여러분은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시간 우리 다 같이 자신을 한 번 되살펴 봅시다. 마태복음 16:22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열심히 특심한 베드로의 당당한 호언장담 그러나, 그것이 바로 사탄의 앞잡이가 될 줄이야 베드로의 무서운 착각입니다. 요한복음 11:23-2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지막 날 부활에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는 주님의 말씀은 오늘 다시 산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마르다는 “마지막 날”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끝내는 썩어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오늘의 부활을 가로막으려는 불신앙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착각에 빠지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착각에서 깨어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나의 귀에서 들려 오는 소리가 아닙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들려 오는 세미한 소리입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916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