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왕상19:1-8)
본문
오늘 본문의 말씀은 엘리야 선지자가 이세벨의 칼날을 피하여 광야로 도망하며,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 여호와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는 부르짖음이요, 기도라 할 수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엘리야 선지자가 누구인가…. 그가 기도함으로 3년 6개월간 비가 오지 않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닌가. 죽은 아이를 다시 살려낸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닌가. 밀가루 통, 기름 병이 다 떨어지지 않는 이적으로 세 사람이 기근을 이겨낸 능력의 선지자가 아닌가. 갈멜산에서 불이 내려 제물을 불태운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닌가. 바알 선지자 450명을 죽인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닌가. 갈멜산 꼭대기에서 기도하여 다시 비를 오게 한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닌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그런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가 부르짖는 이 외침 속에는 무슨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오늘 본문 중심으로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하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던. 엘리야의 심정을 살펴봄으로 우리가 당하는 “너무 너무 힘들어”.를 외칠 수밖에 없는 고난을 의미를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죽기를 구하는 부르짖음이다. 본문 4절/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하나님의 선지자요, 능력의 선지자인 엘리야가 죽기를 구하는 부르짖음이다. 살 길을 찾아 도망하는 자의 입에서 외쳐지는 부르짖음이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한 마디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지금 엘리야는 살 길을 찾아 도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본문 3절/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참으로 놀라운 것은.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는 도망자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하는 죽기를 구하는 외침이다. 생명을 위해 도망하는 그 길은. 그 도망자에게는 너무 너무 힘든 일이다. 사람의 생명은 자신이 지키려 한다고 해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10:29절/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 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렇다.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참새 한 마리의 생명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 더욱이 우리는 참새 한 마리가 아닌 많은 참새보다 더욱 귀한 존재이다(마10:31). 요나 4:8절/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 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 니이다/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하나님께 스스로 죽기를 구한 또한 사람이 바로 요나이다. 니느웨로 향하지 않고 도망하다가 바다 한 복판 현장에서 고래 배속에 체포되어 왔건만. 망하기를 바랐던 니느웨가 회개하고 돌아오니. 자신이 스스로 죽기를 구하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신의 생각을 좇아 도망하는. 도망자들이 스스로 죽기를 구하고 있다. 생명의 주관자가 누구이며, 역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잊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엘리야의 부르짖음은. 엘리야만의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나의 두 어깨를 짓눌러 오고, 나의 가슴을 조여 오는 삶의 고통. “오 주여, 내 영혼 받으소서”. 이런 흥얼거림이 나의 입에서 새어나올 때가 없는지요. 사도행전 7:59절/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 을 받으시옵소서/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어 가는 것은 아니지만.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스데반의 이 마지막 기도가 때로는 부러울 때가 많은 게 우리 인생의 삶인 것 같습니다. 스데반 같은. 거창한 순교자를 소망해서가 아니지요. 이 세상살이가 “너무 너무 힘들어”.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이런 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올 때가 있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여기에서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참새 한 마리의 생명도 주장하시는 하나님. 바로 우리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2.삶에 지친 자의 부르짖음이다. 본문 5-7절/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 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엘리야, 그는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는 일에 피곤하고 지쳐 있다.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는 엘리야. 굶주리고, 지쳐서 기진맥진한 상태이다. 정신을 잃고 자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대로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죽고 말 상태이다.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엘리야가 가는 길. 바로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는 길”이다(본문3절). 다시 말해서 “생명”을 위하여. 행하는 인간의 모든 수고와 노력을 뜻한다. 인간의 수고와 노력으로는.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도망자의 길에서 지쳐 버린 엘리야. 그의 힘과 수고와 노력으로는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없음을 안 것이다. 그렇다고 스스로 죽을 수도 없는 일. 그래서 부르짖는 소리가.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이다. 본문 5절/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일어나서 먹어라. 로뎀나무 아래 기진맥진하여 정신없이 스러져 자고 있는 엘리야에게 들려 온 기쁜 소리이다. 지치고 곤하여 스러진 엘리야에게 들려 온 생기를 주는 복음이다. 일어나 먹어라. 천사가 들려 준 소리이다(본문5절). 여호와의 사자가 다시 들려준 소리이다(본문7절). 구약 성경에서 천사나 여호와의 사자가 같이 취급되기도 한다. 같은 천사라 할지라도 “또다시 와서”.라고 하심으로(본문7절). 로뎀나무 아래 정신없이 잠들어 있는 엘리야를. 두 번이나 찾아 주신 것이다. 어루만져 주시고, 흔들어 깨워 주신 것이다. 떡과 물을 주시어. 먹고 마셔 힘을 얻게 하신 것이다. 본문 8절/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엘리야는 새 힘을 얻어 40주 40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찾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고 로뎀나무 아래 지치고 스러져 깊은 잠 속에 빠져 버린 엘리야. 그냥 내버려두면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일어나 먹어라. 그런 엘리야를 찾아 어루만져 주시고, 흔들어 주시고, 깨워 주시고, 먹고 마시게 해 주시어. 새 힘을 얻고 일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일어나 먹어라. 한 번 찾아 사랑을 베풀어서. 모자라면. 두 번 다시 찾아 사랑을 베푸시는.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봅니다. 기어이 새 힘을 얻고 일어나게 하시고야 마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 하나님은 일찍이. 까마귀를 동원하여 그릿 시냇가의 엘리야를 먹여 살리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르밧 과부를 통하여 기근에서 엘리야의 생명을 보존하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는. 도망자의 길을 달려가다. 엘리야는 그만 지치고 스러져 깊은 잠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이세벨의 군사가 그를 발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3.스스로 죽을 수 없는 자의 부르짖음이다. 본문 4절/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는. 도망자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외쳐질 때는. 벌써 살 소망이 끊어진(행27:20) 상태를 말한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는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라고 죽기를 구하고 있다. 이는 스스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죽는 것은 자살 행위로서.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엄청난 큰 죄가 된다. 우리 성도는 이런 망령된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마태복음 27:5절/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가룟 유다가 주님을 은전 30에 팔고. 뒤늦게 무죄한 피를 팔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찾아갔으나, 되물릴 수 없게 되자. 스스로 목매어 죽고 말았다. 삼상 31:4-5절/ 그가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없는 자들이 와 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병기 든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사울이 길보아산 전투에서 불레셋 군사에게 패하고, 몸에 심한 상처로 인하여. 살아 남을 수 없음을 판단하고 병기 든 자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나 거절함으로 자신의 칼 위에 엎드러져 스스로 죽고 말았다. 삼하 17:23절/ 아히도벨이 자기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 아비 묘에 장사되니라/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다윗의 가장 뛰어난 모사(謀士)이었던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게 되었고, 그의 모략이 거짓 투항한 후새에 의해 실행되지 못함을 보고. 압살롬의 반역이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목매어 죽고 말았다. 성경에 나타난 스스로 죽은 자들을 살펴보면. 가룟 유다, 사울, 아히도벨. 모두가 시작은 좋았으나, 끝이 좋지 못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으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잘못을 범하여 버리움을 당한 사람들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기룟 유다, 사울, 아히도벨처럼. 스스로 죽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이런 외침이 필요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뜻대로 스스로 죽으면 되는 것이지요.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하는 엘리야 선지자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하는 요나 선지자는 스스로 죽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스스로 죽지 못하여.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죽기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겠기에. 하는 외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들이 살아가는 길에는.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 같이 지치고 곤하여 스러지는. 너무 너무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순간들이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우리의 입에서. 이런 흥얼거림이 새어나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성도가 스스로 죽을 수 없는 자들이기에. 이렇게 흥얼거리는 것입니다. 일어나 먹어라. 나를 어루만지시고, 나를 흔들어 깨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또다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먹고 마시게 하시어 새 힘을 얻어 하나님의 산 호렙을 찾기까지. 찾아오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일어나 먹어라. 그 하나님은 어제께나 오늘이나 또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이요,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히13:8). 그 사랑의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셔서 우리의 심령 속에 역사하십니다. 온유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들려주십니다.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나의 인생 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죽기를 구하여 부르짖을 때. 기진맥진하여 스러져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일어나 먹어라. 나를 도우시는 사랑의 주님. 나를 어루만지시고, 나를 흔들어 깨우시고, 나를 불러 주십니다. 그 주님이 준비하신 떡과 물을 먹고 마시어 새 힘을 얻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너무 너무 힘들어. 지치고 스러질 때. “일어나 먹어라”.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주님 그 목소리. 그 목소리에 새 힘을 얻어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향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그런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가 부르짖는 이 외침 속에는 무슨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오늘 본문 중심으로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하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던. 엘리야의 심정을 살펴봄으로 우리가 당하는 “너무 너무 힘들어”.를 외칠 수밖에 없는 고난을 의미를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죽기를 구하는 부르짖음이다. 본문 4절/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하나님의 선지자요, 능력의 선지자인 엘리야가 죽기를 구하는 부르짖음이다. 살 길을 찾아 도망하는 자의 입에서 외쳐지는 부르짖음이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한 마디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지금 엘리야는 살 길을 찾아 도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본문 3절/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참으로 놀라운 것은.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는 도망자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하는 죽기를 구하는 외침이다. 생명을 위해 도망하는 그 길은. 그 도망자에게는 너무 너무 힘든 일이다. 사람의 생명은 자신이 지키려 한다고 해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10:29절/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 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렇다.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참새 한 마리의 생명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 더욱이 우리는 참새 한 마리가 아닌 많은 참새보다 더욱 귀한 존재이다(마10:31). 요나 4:8절/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 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 니이다/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하나님께 스스로 죽기를 구한 또한 사람이 바로 요나이다. 니느웨로 향하지 않고 도망하다가 바다 한 복판 현장에서 고래 배속에 체포되어 왔건만. 망하기를 바랐던 니느웨가 회개하고 돌아오니. 자신이 스스로 죽기를 구하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신의 생각을 좇아 도망하는. 도망자들이 스스로 죽기를 구하고 있다. 생명의 주관자가 누구이며, 역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잊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엘리야의 부르짖음은. 엘리야만의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나의 두 어깨를 짓눌러 오고, 나의 가슴을 조여 오는 삶의 고통. “오 주여, 내 영혼 받으소서”. 이런 흥얼거림이 나의 입에서 새어나올 때가 없는지요. 사도행전 7:59절/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 을 받으시옵소서/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어 가는 것은 아니지만.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스데반의 이 마지막 기도가 때로는 부러울 때가 많은 게 우리 인생의 삶인 것 같습니다. 스데반 같은. 거창한 순교자를 소망해서가 아니지요. 이 세상살이가 “너무 너무 힘들어”.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이런 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올 때가 있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여기에서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참새 한 마리의 생명도 주장하시는 하나님. 바로 우리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2.삶에 지친 자의 부르짖음이다. 본문 5-7절/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 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엘리야, 그는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는 일에 피곤하고 지쳐 있다.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는 엘리야. 굶주리고, 지쳐서 기진맥진한 상태이다. 정신을 잃고 자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대로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죽고 말 상태이다.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엘리야가 가는 길. 바로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는 길”이다(본문3절). 다시 말해서 “생명”을 위하여. 행하는 인간의 모든 수고와 노력을 뜻한다. 인간의 수고와 노력으로는.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도망자의 길에서 지쳐 버린 엘리야. 그의 힘과 수고와 노력으로는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없음을 안 것이다. 그렇다고 스스로 죽을 수도 없는 일. 그래서 부르짖는 소리가.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이다. 본문 5절/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일어나서 먹어라. 로뎀나무 아래 기진맥진하여 정신없이 스러져 자고 있는 엘리야에게 들려 온 기쁜 소리이다. 지치고 곤하여 스러진 엘리야에게 들려 온 생기를 주는 복음이다. 일어나 먹어라. 천사가 들려 준 소리이다(본문5절). 여호와의 사자가 다시 들려준 소리이다(본문7절). 구약 성경에서 천사나 여호와의 사자가 같이 취급되기도 한다. 같은 천사라 할지라도 “또다시 와서”.라고 하심으로(본문7절). 로뎀나무 아래 정신없이 잠들어 있는 엘리야를. 두 번이나 찾아 주신 것이다. 어루만져 주시고, 흔들어 깨워 주신 것이다. 떡과 물을 주시어. 먹고 마셔 힘을 얻게 하신 것이다. 본문 8절/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엘리야는 새 힘을 얻어 40주 40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찾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고 로뎀나무 아래 지치고 스러져 깊은 잠 속에 빠져 버린 엘리야. 그냥 내버려두면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일어나 먹어라. 그런 엘리야를 찾아 어루만져 주시고, 흔들어 주시고, 깨워 주시고, 먹고 마시게 해 주시어. 새 힘을 얻고 일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일어나 먹어라. 한 번 찾아 사랑을 베풀어서. 모자라면. 두 번 다시 찾아 사랑을 베푸시는.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봅니다. 기어이 새 힘을 얻고 일어나게 하시고야 마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 하나님은 일찍이. 까마귀를 동원하여 그릿 시냇가의 엘리야를 먹여 살리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르밧 과부를 통하여 기근에서 엘리야의 생명을 보존하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는. 도망자의 길을 달려가다. 엘리야는 그만 지치고 스러져 깊은 잠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이세벨의 군사가 그를 발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3.스스로 죽을 수 없는 자의 부르짖음이다. 본문 4절/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는. 도망자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외쳐질 때는. 벌써 살 소망이 끊어진(행27:20) 상태를 말한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는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라고 죽기를 구하고 있다. 이는 스스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죽는 것은 자살 행위로서.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엄청난 큰 죄가 된다. 우리 성도는 이런 망령된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마태복음 27:5절/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가룟 유다가 주님을 은전 30에 팔고. 뒤늦게 무죄한 피를 팔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찾아갔으나, 되물릴 수 없게 되자. 스스로 목매어 죽고 말았다. 삼상 31:4-5절/ 그가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없는 자들이 와 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병기 든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사울이 길보아산 전투에서 불레셋 군사에게 패하고, 몸에 심한 상처로 인하여. 살아 남을 수 없음을 판단하고 병기 든 자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나 거절함으로 자신의 칼 위에 엎드러져 스스로 죽고 말았다. 삼하 17:23절/ 아히도벨이 자기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 아비 묘에 장사되니라/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다윗의 가장 뛰어난 모사(謀士)이었던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게 되었고, 그의 모략이 거짓 투항한 후새에 의해 실행되지 못함을 보고. 압살롬의 반역이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목매어 죽고 말았다. 성경에 나타난 스스로 죽은 자들을 살펴보면. 가룟 유다, 사울, 아히도벨. 모두가 시작은 좋았으나, 끝이 좋지 못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으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잘못을 범하여 버리움을 당한 사람들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기룟 유다, 사울, 아히도벨처럼. 스스로 죽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이런 외침이 필요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뜻대로 스스로 죽으면 되는 것이지요.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하는 엘리야 선지자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하는 요나 선지자는 스스로 죽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스스로 죽지 못하여.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죽기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겠기에. 하는 외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들이 살아가는 길에는.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 같이 지치고 곤하여 스러지는. 너무 너무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순간들이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우리의 입에서. 이런 흥얼거림이 새어나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성도가 스스로 죽을 수 없는 자들이기에. 이렇게 흥얼거리는 것입니다. 일어나 먹어라. 나를 어루만지시고, 나를 흔들어 깨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또다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먹고 마시게 하시어 새 힘을 얻어 하나님의 산 호렙을 찾기까지. 찾아오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일어나 먹어라. 그 하나님은 어제께나 오늘이나 또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이요,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히13:8). 그 사랑의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셔서 우리의 심령 속에 역사하십니다. 온유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들려주십니다.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나의 인생 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죽기를 구하여 부르짖을 때. 기진맥진하여 스러져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일어나 먹어라. 나를 도우시는 사랑의 주님. 나를 어루만지시고, 나를 흔들어 깨우시고, 나를 불러 주십니다. 그 주님이 준비하신 떡과 물을 먹고 마시어 새 힘을 얻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너무 너무 힘들어. 지치고 스러질 때. “일어나 먹어라”.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주님 그 목소리. 그 목소리에 새 힘을 얻어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향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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