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밥과 복음의 관계 (롬3:19-31)
본문
율법”을 인간의 차원에서 보고 접근하면 “법”이 되고 만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는 것으로 “법”적인 해석 곧 “시효가 지난 법”이 되고 만다. 그래서 “복음”이란 “새로운 법”이 주어졌고, 이 법은 “믿음”으로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으로 알게 된다. 한 발 더 나아가 “믿음으로 다 된다는 것”도 아니라 “다 된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율법의 무용론”이나, “율법의 폐기론”이 나오게 된다. 예수님이 대신 “다 이루어” 주셨으니, 나는 감사하며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된다. 얼마전 크리스챤 신문 광고란에 게재된 “십일조” 문제가 바로 이런 잘못된 성경 해석 때문이다.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제가 이해한 것은 “예수 부활 승천 후” 곧 교회 시대에 성경 어디에도 “십일조”하라는 구절이 없다는 것이다.-(신문을 찾아도 없어서 그대로 옮기지 못함)-
제가 이해하기로는 “십일조”는 구약에서 요구하는 것이고, 지금의 요구는 아니라는 것이다. 좀더 비약하면 구약은 지금 이 시대에는 “성경”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논리가 된다. 실제로 저는 “구약은 성경이 아니다”는 사람들과 부딪쳐 보았고, 그들을 “이해”시켜야 했다. 이런 잘못된 믿음, 혹은 사고방식이 어디서 왔는가 모두 “믿음으로, 믿음으로 만사 o.k”라는 것에서 왔다. “오직 믿음주의”라고 할까…. “율법”의 요구가 끝난 것으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마침”은 자신의 골육지친에게 주시는 말이다. “생명에 이르게 하리라”(롬7:10),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롬10:5), 바로 그들이 알고 있는 “생명의 길”이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알고있는 길이 “생명의 길”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길”은 맞으나 그 길을 따라 하나님께 까지 나아갈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사랑의 하나님이 오셔서 열어 주신 “새 길”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새 길”이 생겼으니 “옛길”은 “길로서의 사명”이 끝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본래의 사명” 곧 하나님의 요구로서의 사명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 8:1-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님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은 예수 안에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예수 “밖에”가 되면 모든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의 의도, 속죄도, 구원도, 누림도, 모두가 다 허사가 된다. 이 “예수 안에”(En Christou)가 바로 바울 신학의 “핵심”이다. 바울 신학의 모든 것이 그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울 서신 속에 이 “안에”라는 말은 수도 없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이 “예수 안에”라는 말은 곧 “예수 믿는다”는 “믿음”이라는 “의미”가 되어서 “믿음으로, 믿음으로, 만사 O.K”가 될 때가 많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 안에” 있으면 정죄도 없고, 생명의 성령님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다. 이에서 더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예수 안에” 있어야 하는가 영원토록인가 하는 점은 고려에 넣지 않는 것 같다.
고린도전서 15:22-23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라고 했다. “에수 안에” 있으면 모든 게 끝난 상태가 아니다. “예수 부활”이 “내 부활”의 “근거”가 되는 것이지 “예수 부활 = 내 부활”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부활체”를 갖고 있어야 한다. 포도 송이도 포도 알이 알알이 달리듯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주님께 “예수 안에”가 아니라 “예수 밖에”서 알알이 달려야 한다. 곧 우리 몸의 구속을 입어야 한다. 로마서 8:21-23절에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님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했다. 모든 피조물의 탄식과 고통은 실상 그들의 죄 때문이 아니다. 그 주인의 범죄로 인하여 당하는 탄식과 고통이다. 이들의 고통은, 성령님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는 이 “탄식”이 그칠 때, 사라지게 된다. 곧 우리 “몸의 구속”의 때이다. 우리가 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아직 우리 “몸의 구속”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구속”이 이루어지기까지 우리는 “완전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다. 곧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얻은 것이지 우리의 “육체”까지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기로 한 때가 차야 한다.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며, 우리 스스로도 “몸의 구속”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성화”의 길을 걸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
2.복음이란 무엇인가 인류의 조상 아담의 범죄로 인간은 “정죄” 되어지고, “징벌”로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 창2:17절의 언약을 채결한 “대표자”이다. 창3장에서 “하와”에게 “잉태와 해산”의 고통, 남편의 다스림을 받으며 그를 사모해야 한다는 “징벌”이 더해질 뿐 “죽음” 곧 “멸망”이 따로 “선언” 되는 것이 아님을 본다. 곧 “아담 안에”서 이루어진 “언약”이요, “아담 안에서” 이루어진 “징벌”이 된다. 갈라디아 4:4-5절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이처럼 “
둘째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 다시 오셨다. 왜 오셨는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리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고 오셨다. 곧 하나님이 아담의 범죄 사실을 “심문”하시고, 아담을 “징벌”하시기 전에 “자신이 책임” 지시기로 “선언”을 하신, 그 “선언”의 “내용”을 일러주시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요구를 이루시기 위해 “여인의 후손”으로 나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오셔서 하실 일을 일러주신다. 나를 “속량”하시고, 나로 하여금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는 것이, 그분이 이 땅 위에 오신 목적이요, 그분이 이루셔야 할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일을 “하나”로 생각해 버려서 “율법의 완성”이 “복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다. 로마서 4: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라고 했다. 우리의 “범죄 때문에” 갈보리 산 골고다 위의 십자가 보혈이 필요했고, 우리의 “의롭다함”을 위하여 “부활”이 필요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다.
⑴.속죄의 제물:-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요한복음 1:29절에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다. 인류의 조상이요, 인류의 대표인(언약 채결자) 아담의 범죄로 전가된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사랑의 하나님은 “속죄의 제물”로 한 마리, 세상 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고린도후서 5: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죄를 알지도 못한다는 말은 “죄”가 없다는 말이요, “죄의 의식” 조차도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마치 바보처럼 “죄도 모른다”는 뜻이 아니다. “죄”를 알지도 못한다면 어떻게 “다시는 범죄치 말라”고(요8:11) 선언을 하시겠는가.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선”도 “악”도 몰랐다는 식의 “죄”를 알지도 못함이 아니다. 예수님은 죄와는 “무관하다”는 말이요, 죄가 “없다”는 말이다. “속죄의 제물”은 아무 흠도 없고, 점도 없어야 된다. 곧 “죄”로 더렵혀지지 말아야 한다. 아담의 후손은 다 “죄인”으로 태어난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음으로 “죄인”이 되는 게 아니다. 범죄는 “죄인”으로 태어난 “죄인”이 “죄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야 했는가 갈라디아 4:4절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이라고 했다. 창3: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이라고 했다. 남자의 후손이 아니다. 아담의 후손은-(여자도 포함)-죄의 전가로 “죄인”으로 태어나 “속제의 제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18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님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했다. 누가복음 1:34-35절에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님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했다.
“여자의 후손”이란 “여자”와도 무관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바로 “성령님으로 잉태된 아들”이라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기 위하여 “여자의 몸”을 빌려 오시는 것이다. 그 “여자”는 현대 의학에서 말하는 “대리모” 이상의 아무런 “의미”도 없다. “성모 마리아”의 사상은 잘못된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 “성모 마리아”나 “나의 어머니”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똑같은 “죄인”이다. 아담과 전혀 상관없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오셨기에 그분에게는 죄가 없다는 말이다. 죄와는 아예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분이 “속죄의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⑵.왜 율법 아래 나게 하셨는가-(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시고)-요한복음 19:30절에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고 했다. 주님이 운명하시기 직전에 “선언”하신다. 다 이루었다 고 선언하신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인가 바로 공의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를 사랑의 하나님이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나를 대신해서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물론 “속죄의 제물”로 바쳐짐으로 우리의 “속죄”도 다 이루었다에 포함된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서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거한 하나님의 요구를 다 이루신 것이다. 공의의 하나님이 흡족히 받으실 “의의 요구”에 “완전 성취”를 가져온 것이다. 범죄한 아담과 그 후손이 도무지 할 수 없는 “율법의 요구” 충족을 대신 이루어 주신 것이다. “속제의 제물”, 단순히 예수님이 그것만을 위하여 오셨다면 구태여 33년의 이 땅 위의 삶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갓난아기 때이든지, 어린 아이 때이든지, 청소년기 때이든지, 젊은 청년기 때이든지, 아무 때나 “속죄”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시고, 왜 33년간의 세월을 그 고난 속에서 사셨을까.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집히시던 때부터 갈보리 산 십자가까지를 생각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하늘의 영광 보좌를 비어 두시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몸, 그것도 종의 형상을 입고 오신 삶 자체가 고난이다. 하나님의 본체시오, 하나님과 동등하신 그분으로 본다면(빌2:6) 죄 많은 이 세상 자체가 고난이다. 비유컨대, 사람이 돼지우리 속에 들어가서 돼지와 함께 먹고, 자고, 쉬고, 뒹굴어야 하는 삶보다 몇 천배, 몇 만배나 더한 고난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천국과 이 땅의 차이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히브리서 4:15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다. 히브리서 5:7-9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 했다.
베드로전서 2:22-24절에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했다. 이 모든 성경들이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요구를 이루어 드리는 사랑의 하나님의 삶의 모습이다. 몸으로 “체휼”하셨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웠고, 온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분의 “온전”이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고 하셨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이 “영원한 구원의 근원”에 의지하여 공의의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나를 대신하여 책임져 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다. 갈라디아 4:4절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나를 “속량”하시는 “속죄의 제물”이 되셨고, “율법” 아래 나게 하사 그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심으로 나로 하여금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 로마서 4: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대속하였다는 사실만으로는 “나의 구주”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대속의 사역”만으로 끝난다면 나의 “의의 상태”를 범죄 전 “아담의 상태”로 “끌어올리는 것” 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십자가 보혈에 “나의 죄”를 씻을 수 있는 것은 “원죄와 자범죄” 그 이상의 다른 죄가 없다는 말이다. 결국 범죄 전 아담의 “자리”에 “돌아오는 것” 뿐이라는 결론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의 요구 앞에 서게 되고, 내 힘으로 그 “의의 요구”를 “완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사탄의 유혹에 밀려 하나님 앞을 떠나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을 아신 사랑의 하나님이 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거기에다 나를 대신하여 “의의 요구”를 “완전 충족”시키심으로 공의의 하나님 앞에 나의 “의의 요구”가 채워졌다는 것이다(롬8:4). 곧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부활하셨다는 말씀이다. 쉽게 말하면 “속제의 제물”이 되시어 대속+ 의의 요구 충족으로 “완전한 의” 곧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되셨다는 말이다. 공의의 하나님이 “선언”하시는 “완전한 의”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요구 충족에 실패를 하셨다면-(광야 시험, 겟세마네 기도, 등등에서)-“속죄의 제물”이 되실 수 없고, 우리는 여전히 죄 아래 얽매여 오늘도 “죄의 종노릇”을 하고 있을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
제가 이해하기로는 “십일조”는 구약에서 요구하는 것이고, 지금의 요구는 아니라는 것이다. 좀더 비약하면 구약은 지금 이 시대에는 “성경”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논리가 된다. 실제로 저는 “구약은 성경이 아니다”는 사람들과 부딪쳐 보았고, 그들을 “이해”시켜야 했다. 이런 잘못된 믿음, 혹은 사고방식이 어디서 왔는가 모두 “믿음으로, 믿음으로 만사 o.k”라는 것에서 왔다. “오직 믿음주의”라고 할까…. “율법”의 요구가 끝난 것으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마침”은 자신의 골육지친에게 주시는 말이다. “생명에 이르게 하리라”(롬7:10),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롬10:5), 바로 그들이 알고 있는 “생명의 길”이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알고있는 길이 “생명의 길”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길”은 맞으나 그 길을 따라 하나님께 까지 나아갈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사랑의 하나님이 오셔서 열어 주신 “새 길”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새 길”이 생겼으니 “옛길”은 “길로서의 사명”이 끝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본래의 사명” 곧 하나님의 요구로서의 사명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 8:1-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님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은 예수 안에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예수 “밖에”가 되면 모든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의 의도, 속죄도, 구원도, 누림도, 모두가 다 허사가 된다. 이 “예수 안에”(En Christou)가 바로 바울 신학의 “핵심”이다. 바울 신학의 모든 것이 그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울 서신 속에 이 “안에”라는 말은 수도 없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이 “예수 안에”라는 말은 곧 “예수 믿는다”는 “믿음”이라는 “의미”가 되어서 “믿음으로, 믿음으로, 만사 O.K”가 될 때가 많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 안에” 있으면 정죄도 없고, 생명의 성령님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다. 이에서 더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예수 안에” 있어야 하는가 영원토록인가 하는 점은 고려에 넣지 않는 것 같다.
고린도전서 15:22-23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라고 했다. “에수 안에” 있으면 모든 게 끝난 상태가 아니다. “예수 부활”이 “내 부활”의 “근거”가 되는 것이지 “예수 부활 = 내 부활”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부활체”를 갖고 있어야 한다. 포도 송이도 포도 알이 알알이 달리듯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주님께 “예수 안에”가 아니라 “예수 밖에”서 알알이 달려야 한다. 곧 우리 몸의 구속을 입어야 한다. 로마서 8:21-23절에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님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했다. 모든 피조물의 탄식과 고통은 실상 그들의 죄 때문이 아니다. 그 주인의 범죄로 인하여 당하는 탄식과 고통이다. 이들의 고통은, 성령님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는 이 “탄식”이 그칠 때, 사라지게 된다. 곧 우리 “몸의 구속”의 때이다. 우리가 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아직 우리 “몸의 구속”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구속”이 이루어지기까지 우리는 “완전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다. 곧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얻은 것이지 우리의 “육체”까지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기로 한 때가 차야 한다.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며, 우리 스스로도 “몸의 구속”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성화”의 길을 걸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
2.복음이란 무엇인가 인류의 조상 아담의 범죄로 인간은 “정죄” 되어지고, “징벌”로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 창2:17절의 언약을 채결한 “대표자”이다. 창3장에서 “하와”에게 “잉태와 해산”의 고통, 남편의 다스림을 받으며 그를 사모해야 한다는 “징벌”이 더해질 뿐 “죽음” 곧 “멸망”이 따로 “선언” 되는 것이 아님을 본다. 곧 “아담 안에”서 이루어진 “언약”이요, “아담 안에서” 이루어진 “징벌”이 된다. 갈라디아 4:4-5절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이처럼 “
둘째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 다시 오셨다. 왜 오셨는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리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고 오셨다. 곧 하나님이 아담의 범죄 사실을 “심문”하시고, 아담을 “징벌”하시기 전에 “자신이 책임” 지시기로 “선언”을 하신, 그 “선언”의 “내용”을 일러주시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요구를 이루시기 위해 “여인의 후손”으로 나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오셔서 하실 일을 일러주신다. 나를 “속량”하시고, 나로 하여금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는 것이, 그분이 이 땅 위에 오신 목적이요, 그분이 이루셔야 할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일을 “하나”로 생각해 버려서 “율법의 완성”이 “복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다. 로마서 4: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라고 했다. 우리의 “범죄 때문에” 갈보리 산 골고다 위의 십자가 보혈이 필요했고, 우리의 “의롭다함”을 위하여 “부활”이 필요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다.
⑴.속죄의 제물:-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요한복음 1:29절에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다. 인류의 조상이요, 인류의 대표인(언약 채결자) 아담의 범죄로 전가된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사랑의 하나님은 “속죄의 제물”로 한 마리, 세상 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고린도후서 5: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죄를 알지도 못한다는 말은 “죄”가 없다는 말이요, “죄의 의식” 조차도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마치 바보처럼 “죄도 모른다”는 뜻이 아니다. “죄”를 알지도 못한다면 어떻게 “다시는 범죄치 말라”고(요8:11) 선언을 하시겠는가.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선”도 “악”도 몰랐다는 식의 “죄”를 알지도 못함이 아니다. 예수님은 죄와는 “무관하다”는 말이요, 죄가 “없다”는 말이다. “속죄의 제물”은 아무 흠도 없고, 점도 없어야 된다. 곧 “죄”로 더렵혀지지 말아야 한다. 아담의 후손은 다 “죄인”으로 태어난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음으로 “죄인”이 되는 게 아니다. 범죄는 “죄인”으로 태어난 “죄인”이 “죄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야 했는가 갈라디아 4:4절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이라고 했다. 창3: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이라고 했다. 남자의 후손이 아니다. 아담의 후손은-(여자도 포함)-죄의 전가로 “죄인”으로 태어나 “속제의 제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18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님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했다. 누가복음 1:34-35절에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님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했다.
“여자의 후손”이란 “여자”와도 무관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바로 “성령님으로 잉태된 아들”이라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기 위하여 “여자의 몸”을 빌려 오시는 것이다. 그 “여자”는 현대 의학에서 말하는 “대리모” 이상의 아무런 “의미”도 없다. “성모 마리아”의 사상은 잘못된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 “성모 마리아”나 “나의 어머니”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똑같은 “죄인”이다. 아담과 전혀 상관없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오셨기에 그분에게는 죄가 없다는 말이다. 죄와는 아예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분이 “속죄의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⑵.왜 율법 아래 나게 하셨는가-(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시고)-요한복음 19:30절에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고 했다. 주님이 운명하시기 직전에 “선언”하신다. 다 이루었다 고 선언하신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인가 바로 공의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를 사랑의 하나님이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나를 대신해서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물론 “속죄의 제물”로 바쳐짐으로 우리의 “속죄”도 다 이루었다에 포함된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서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거한 하나님의 요구를 다 이루신 것이다. 공의의 하나님이 흡족히 받으실 “의의 요구”에 “완전 성취”를 가져온 것이다. 범죄한 아담과 그 후손이 도무지 할 수 없는 “율법의 요구” 충족을 대신 이루어 주신 것이다. “속제의 제물”, 단순히 예수님이 그것만을 위하여 오셨다면 구태여 33년의 이 땅 위의 삶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갓난아기 때이든지, 어린 아이 때이든지, 청소년기 때이든지, 젊은 청년기 때이든지, 아무 때나 “속죄”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시고, 왜 33년간의 세월을 그 고난 속에서 사셨을까.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집히시던 때부터 갈보리 산 십자가까지를 생각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하늘의 영광 보좌를 비어 두시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몸, 그것도 종의 형상을 입고 오신 삶 자체가 고난이다. 하나님의 본체시오, 하나님과 동등하신 그분으로 본다면(빌2:6) 죄 많은 이 세상 자체가 고난이다. 비유컨대, 사람이 돼지우리 속에 들어가서 돼지와 함께 먹고, 자고, 쉬고, 뒹굴어야 하는 삶보다 몇 천배, 몇 만배나 더한 고난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천국과 이 땅의 차이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히브리서 4:15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다. 히브리서 5:7-9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 했다.
베드로전서 2:22-24절에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했다. 이 모든 성경들이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요구를 이루어 드리는 사랑의 하나님의 삶의 모습이다. 몸으로 “체휼”하셨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웠고, 온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분의 “온전”이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고 하셨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이 “영원한 구원의 근원”에 의지하여 공의의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나를 대신하여 책임져 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다. 갈라디아 4:4절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나를 “속량”하시는 “속죄의 제물”이 되셨고, “율법” 아래 나게 하사 그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심으로 나로 하여금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 로마서 4: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대속하였다는 사실만으로는 “나의 구주”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대속의 사역”만으로 끝난다면 나의 “의의 상태”를 범죄 전 “아담의 상태”로 “끌어올리는 것” 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십자가 보혈에 “나의 죄”를 씻을 수 있는 것은 “원죄와 자범죄” 그 이상의 다른 죄가 없다는 말이다. 결국 범죄 전 아담의 “자리”에 “돌아오는 것” 뿐이라는 결론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의 요구 앞에 서게 되고, 내 힘으로 그 “의의 요구”를 “완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사탄의 유혹에 밀려 하나님 앞을 떠나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을 아신 사랑의 하나님이 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거기에다 나를 대신하여 “의의 요구”를 “완전 충족”시키심으로 공의의 하나님 앞에 나의 “의의 요구”가 채워졌다는 것이다(롬8:4). 곧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부활하셨다는 말씀이다. 쉽게 말하면 “속제의 제물”이 되시어 대속+ 의의 요구 충족으로 “완전한 의” 곧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되셨다는 말이다. 공의의 하나님이 “선언”하시는 “완전한 의”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요구 충족에 실패를 하셨다면-(광야 시험, 겟세마네 기도, 등등에서)-“속죄의 제물”이 되실 수 없고, 우리는 여전히 죄 아래 얽매여 오늘도 “죄의 종노릇”을 하고 있을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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