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소문이 난 교회 (살전1:1-10)
본문
오늘은 우리 수지중앙교회가 설립된지 2주년을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지난 2년 동안을 되돌아 보면 하루 하루가 기적이요 감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수지중앙교회를 개척하여 봉사한 지난 2년은 저에게 있어서 가장 보람되고 감격스러운 목회였습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를 지켜주시고 성장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교회를 위해 헌신하시고 저의 목회를 전적으로 협력해 주신 분들께 중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사도 바울이 각처에 많은 교회를 세우는 중에 가장 인상깊이 기억된 교회는 데살로니가 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 2차 선교여행을 할 때 데살로니가에 3주간 정도 머무르는 동안에 복음을 전해서 세운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과 야손의 집에서 복음을 전했으며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핍박하므로 더 이상 머물지를 못하고 이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신자들이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낙심이 되지나 않을까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모범적인 교회로 성장하여 좋은 소문이 났습니다.
1. 믿음으로 역사하는 교회였습니다. 본문 3절에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라고 했습니다. 여기 “믿음의 역사”란 믿음의 행위, 믿음의 활동, 믿음의 힘이라는 뜻입니다. 즉, 믿음의 힘에 있어서 믿음의 바른 행동과 믿음으로 바로 일을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믿음을 그들의 생활 가운데서 나타냈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구체적인 행위를 수반합니다(약 2:14-26).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고 하였습니다. 믿음과 행위는 바늘과 실의 관계처럼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실은 그의 믿음에 의하여 행함이 따른 것입니다(창 22:1-12, 약 2:21). 사람은 일하는 목적이 보수를 바라고 일할 수도 있고, 의무감에서 일할 수도 있고, 채찍이 무서워서 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예배당을 짓고 있었습니다. 여러 석수들이 뜰에서 돌을 깎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수고하는 석수에게 “날씨도 더운데 수고하십니다.”라고 인사를 하니 석수가 대답하기를 “배운 재간이 이것밖에 없으니 할 수 있소”라고 하더랍니다. 옆에 있는 다른 석수에게 같은 인사를 하니 그 석수는 기쁜 표정으로 “돌 깎는 재주를 배웠다가 이번에는 성전을 짓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 하더랍니다. 똑같이 돌을 깎는 일을 하지만 한 사람은 믿음이 없이 일하니까 보람도 없고, 기쁨도 없으나, 한 사람은 믿음으로 하니까 보람도 있고 기쁨도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요, 달란트로 알고 큰 믿음 가지고 역사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랑으로 수고하는 교회였습니다. 본문 3절에 “사랑의 수고와”라고 했습니다. 수고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수고로운 봉사가 동반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고는 진정한 사랑의 증표요 열매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도 남편을 위해서는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 또한 자식을 위한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수고하는 사랑, 이것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다른 교회와 다른점이었습니다. 입으로만 하는 사랑,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희생의 수고가 포함된 사랑의 본을 그들은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라는 책을 쓴 토마스 아캠퍼스는 “고통이 없는 사랑에는 삶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곧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리빙스톤이 어떻게 그처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아프리카로 가서 일생을 지내며 갖은 고생을 다 했습니까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왜 독일 백림대학 교수직도 내놓고 식인종이 있는 곳에 가서 흑인들을 돌보며 손수 병원을 지으며 환자들을 돌보며 살았습니까 다니엘 신부가 왜 나병 환자를 돌보며 나중에는 그 몸에 나병이 옮아서 죽을 때까지 그들을 위해 끝까지 봉사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골육(骨肉)간에도 행하기 어려운 이 참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같은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 소망중에 인내하는 교회였습니다. 본문 3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인내있는 소망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로 숱한 핍박과 환난 가운데 잘 참고 견디어 나갔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재림 대망으로 인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장차 다가올 미래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이 소망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농부가 갖는 추수의 소망은 일년 동안의 인내가 필요하며, 학생의 학업 대성의 소망은 십수년의 인내가 필요하고, 직업인의 영달(榮達)의 소망은 평생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소망이 크면 클수록 그 인내도 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는 성도의 소망이야말로 최대의 소망이므로 최대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소망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소망을 가지는 동안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참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의 소망이 아니라 하늘에 간직한 소망이며, 보이는 소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소망이며, 썩어지는 소망이 아니라 썩지 않는 산 소망입니다(벧전 1:3-4).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둔 사람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인내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게되기 때문입니다(롬 5:3-4). 데살로니가 교회는 좋은 소문이 난 교회였습니다. 우리 수지중앙교회는 어떤 소문이 나고 있습니까 교세 건물 재정 교파와 같은 피상적인 것들이 아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채워진 교회가 되어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칭찬받고 모범적인 교회로 소문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수지중앙교회를 개척하여 봉사한 지난 2년은 저에게 있어서 가장 보람되고 감격스러운 목회였습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를 지켜주시고 성장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교회를 위해 헌신하시고 저의 목회를 전적으로 협력해 주신 분들께 중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사도 바울이 각처에 많은 교회를 세우는 중에 가장 인상깊이 기억된 교회는 데살로니가 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 2차 선교여행을 할 때 데살로니가에 3주간 정도 머무르는 동안에 복음을 전해서 세운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과 야손의 집에서 복음을 전했으며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핍박하므로 더 이상 머물지를 못하고 이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신자들이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낙심이 되지나 않을까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모범적인 교회로 성장하여 좋은 소문이 났습니다.
1. 믿음으로 역사하는 교회였습니다. 본문 3절에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라고 했습니다. 여기 “믿음의 역사”란 믿음의 행위, 믿음의 활동, 믿음의 힘이라는 뜻입니다. 즉, 믿음의 힘에 있어서 믿음의 바른 행동과 믿음으로 바로 일을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믿음을 그들의 생활 가운데서 나타냈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구체적인 행위를 수반합니다(약 2:14-26).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고 하였습니다. 믿음과 행위는 바늘과 실의 관계처럼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실은 그의 믿음에 의하여 행함이 따른 것입니다(창 22:1-12, 약 2:21). 사람은 일하는 목적이 보수를 바라고 일할 수도 있고, 의무감에서 일할 수도 있고, 채찍이 무서워서 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예배당을 짓고 있었습니다. 여러 석수들이 뜰에서 돌을 깎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수고하는 석수에게 “날씨도 더운데 수고하십니다.”라고 인사를 하니 석수가 대답하기를 “배운 재간이 이것밖에 없으니 할 수 있소”라고 하더랍니다. 옆에 있는 다른 석수에게 같은 인사를 하니 그 석수는 기쁜 표정으로 “돌 깎는 재주를 배웠다가 이번에는 성전을 짓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 하더랍니다. 똑같이 돌을 깎는 일을 하지만 한 사람은 믿음이 없이 일하니까 보람도 없고, 기쁨도 없으나, 한 사람은 믿음으로 하니까 보람도 있고 기쁨도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요, 달란트로 알고 큰 믿음 가지고 역사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랑으로 수고하는 교회였습니다. 본문 3절에 “사랑의 수고와”라고 했습니다. 수고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수고로운 봉사가 동반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고는 진정한 사랑의 증표요 열매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도 남편을 위해서는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 또한 자식을 위한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수고하는 사랑, 이것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다른 교회와 다른점이었습니다. 입으로만 하는 사랑,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희생의 수고가 포함된 사랑의 본을 그들은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라는 책을 쓴 토마스 아캠퍼스는 “고통이 없는 사랑에는 삶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곧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리빙스톤이 어떻게 그처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아프리카로 가서 일생을 지내며 갖은 고생을 다 했습니까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왜 독일 백림대학 교수직도 내놓고 식인종이 있는 곳에 가서 흑인들을 돌보며 손수 병원을 지으며 환자들을 돌보며 살았습니까 다니엘 신부가 왜 나병 환자를 돌보며 나중에는 그 몸에 나병이 옮아서 죽을 때까지 그들을 위해 끝까지 봉사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골육(骨肉)간에도 행하기 어려운 이 참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같은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 소망중에 인내하는 교회였습니다. 본문 3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인내있는 소망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로 숱한 핍박과 환난 가운데 잘 참고 견디어 나갔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재림 대망으로 인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장차 다가올 미래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이 소망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농부가 갖는 추수의 소망은 일년 동안의 인내가 필요하며, 학생의 학업 대성의 소망은 십수년의 인내가 필요하고, 직업인의 영달(榮達)의 소망은 평생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소망이 크면 클수록 그 인내도 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는 성도의 소망이야말로 최대의 소망이므로 최대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소망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소망을 가지는 동안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참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의 소망이 아니라 하늘에 간직한 소망이며, 보이는 소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소망이며, 썩어지는 소망이 아니라 썩지 않는 산 소망입니다(벧전 1:3-4).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둔 사람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인내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게되기 때문입니다(롬 5:3-4). 데살로니가 교회는 좋은 소문이 난 교회였습니다. 우리 수지중앙교회는 어떤 소문이 나고 있습니까 교세 건물 재정 교파와 같은 피상적인 것들이 아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채워진 교회가 되어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칭찬받고 모범적인 교회로 소문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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