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히 먹이신 예수님 (요6:1-15)
본문
사람에게 있어서 배고플 때 필요한 것은 먹을 수 있는 음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배가 고팠습니다. 그러나 모인 사람은 많은데 음식은 없으니 큰 걱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배고픈 사람들에게 한 어린아이의 도시락으로 배불리 먹여 주셨습니다. 5천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는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생명의 양식 뿐만 아니라 육신으로 굶주린 사람들에게 육신의 배도 채워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인 문제도 풍성하게 채워 주시지만 육신의 모든 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문제를 예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온전히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넉넉하게 채워주시는 은혜를 얻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을 보면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적의 사건을 말하면서 유월절 이야기를 왜 말씀하셨을까요 이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여기서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명절에 참석하려고 많이 이동하였던 때였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심으로 예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자신의 몸을 찢어 인류의 굶주린 심령을 배불리시는 생명의 떡이심을 나타내려 하신 깊은 뜻이 있습니다.
1. 본문 당시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의 형편은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따른 사람들입니다. 본문 2절에 보면 병 낫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따랐습니다. 병자의 가족과 친지들이 함께 따랐습니다. 또다시 표적을 보기 원하며 따랐습니다. 이들은 이미 고침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감격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표적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오늘 본문의 사건인 5병2어의 놀라운 기적을 다시 체험한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배고픈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은 매일 하루 세 끼를 먹어야 삽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집에서 나온지가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심히 배가 고팠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양식을 주신 주님이 배고픈 그들을 풍성히 먹여 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가득한 능력의 역사가 저들로 하여금 배불리 먹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십니다. 굶주린 영혼을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굶주린 상태로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심령에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배고픈 자가 되어서 주님이 채워 주시는 영의 말씀으로 배불리 먹어야 합니다.
셋째, 저들은 예수님을 세상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14절에 표적을 본 사람들이 “이는 참으로 이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선지자란 구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선지자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만왕의 왕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단순한 유대를 통치하는 왕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떡을 배불리 먹이신 근본 뜻도 알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배가 부른 것으로 그저 만족했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왕이 되시면 먹는 문제는 해결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도 이 사람들처럼 오직 육신의 문제만 가지고 예수님을 기다리고 만나려 하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께서는 생명의 떡이시고 유월절에 그 몸을 찢어서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세상에 오신 구속의 목적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근본적인 목적을 모르니 기적을 행하신 이후에 홀로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2. 그럼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의 참된 의도는 무엇입니까 기적을 행하신 첫 번째 이유는 말씀 듣다가 지치고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여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육신을 채워 주신 사건을 통해서 유월절에 대속의 양이 죽게 되는 참 의미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자신이 인류의 생명의 떡이심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물으신 이유는 돈으로 사서는 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대신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주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과연 빈들인 곳에서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줄 떡도 구하기가 힘들었고 그만한 돈도 없었던 것입니다. 계산이 빠른 빌립은 2백 데나리온의 돈도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장정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니 대단한 돈입니다. 그러니 빌립의 대답은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과연 벳새다 광야의 형편으로써는 그 많은 사람들의 육신의 배를 채워 주기에는 제자들만의 힘으로써는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의 만족 역시 사람들의 힘으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서 영혼의 만족이란 사람의 힘으로써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없이는 생명의 떡도 없습니다. 진정한 만족도 없습니다. 풍성함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앉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배부르게 먹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미 예수님에게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한 아이가 자기가 먹는 대신에 예수님께 바친 것입니다. 사람들이 앉아야 하는 이유는 질서를 위해서 였습니다. 또 믿음으로 순종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생명의 떡을 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고 받으려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 앞에 앉아야 합니다. 고넬료의 온 집안 식구들이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씀을 들으려고 앉은 것처럼, 벳새다 광야의 사람들이 주님의 모습을 주시한 것처럼, 주님을 앉아서 주시해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 받는 자의 바른 자세입니다. 바른 믿음입니다. 바른 순종입니다. 이렇게 하면 그 심령이 주님이 주시는 신령한 양식으로 배불리 채워 주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순종한 제자들은 그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배불리 먹고도 많이 남았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부스러기를 주워 모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풍성하게 하시는 예수님이 부스러기를 소중히 여기신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은혜 중에는 부스러기까지도 소중한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부스러기의 은혜로써도 그 딸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너무 낭비하면 안됩니다. 나의 배부른 것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내가 먹다 남은 이 부스러기라도 필요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풍성하게 하실 수 있으셨지만 이 부스러기까지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3. 이 기적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중요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 어린아이의 작은 도시락이지만 주님께 바친 일입니다. 이 놀라운 기적, 풍성한 기적의 시작도 이 작은 헌신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의 마음, 헌신의 마음이 기적의 시작입니다. 이기주의로 가득한 세상에서 정말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어디서 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타적인 사랑이 있는 곳에 흡족함이 있습니다. 즐거이 헌신하는 곳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주님의 손에 들려질 때에 많은 것으로 변화됩니다.
둘째, 예수님의 나누어 먹고자 하는 정신입니다. 비록 한 사람 분의 도시락이었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적게라도 나누어 먹자고 하신 것이 주님의 의도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앉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혼자서만 음식을 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배가 고파도 함께 고프고 배가 불러도 함께 불러야지 하는 것이 주님의 생각이었습니다. 같이 나누는데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공동운명체임을 안 것입니다. 서로를 생각하신 것입니다. (최일도목사의 밥퍼주는 사랑)
셋째, 믿음과 순종입니다. 제자들이 믿고 순종했고 무리들이 믿고 순종했습니다. 도저히 사람의 생각으로서는 안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고 하였을 때에 한 사람도 따지거나 불평이 없었습니다. 음식이 없는데 어디서 구할 것인가 돈도 없습니다. 이렇게 불신앙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은 믿고 순종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산다고 했을 때 믿음으로 순종한 사람들은 살았습니다. 잔디에 앉으라 했을 때에 순종하여 앉으니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앉고나니 예수께서 음식을 들고 역사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음식을 받아 들고 나릅니다. 열심히 나릅니다. 얼마나 신바람이 났겠습니까 제자 한 사람당 사백명을 책임진 것입니다. 음식은 걱정이 없었습니다. 그저 받아서 주면 되었습니다. 빠진 사람만 없게 하면 되었습니다. 무리가 더 요구하면 갔다 주면 되었습니다. 여기 저기서 이제는 배부르다고 합니다. 실컷 먹었습니다. 정말 신났습니다. 부스러기가 많이 남았습니다. 이것을 주으라 하시니 모두 순종했습니다.
넷째, 무리의 질서입니다. 한 사람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니 질서 있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오천명이니 서로 앞다투어 먼저 받겠다고 했으면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옥을 방불했을 것입니다. 먼저 먹어보야야 한 시간인데 그것을 참지 못해서 아우성이었다면 어찌 될 뻔했습니까 그저 앉아만 있으면 되었습니다. 갖다가 주니 받아서 먹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천지창조에서부터 역사 섭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질서를 중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벳새다 광야의 오천 명이 질서를 지킨 일을 보고 우리도 질서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생명의 떡이심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벳새다 광야에서는 육신의 양식으로 배부르게 하셨지만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생명의 떡을 흡족하게 주십니다. 예수님앞에 나오면 육신의 만족이 있습니다. 영의 만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내가 가진 것이 작은 것일지라도 그것을 주님께 드리겠다는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 헌신이 기적의 시작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주님의 말씀 순종하면서 주께서 풍족하게 채워 주시는 영육간의 음식으로 만족을 얻으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문제를 예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온전히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넉넉하게 채워주시는 은혜를 얻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을 보면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적의 사건을 말하면서 유월절 이야기를 왜 말씀하셨을까요 이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여기서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명절에 참석하려고 많이 이동하였던 때였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심으로 예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자신의 몸을 찢어 인류의 굶주린 심령을 배불리시는 생명의 떡이심을 나타내려 하신 깊은 뜻이 있습니다.
1. 본문 당시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의 형편은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따른 사람들입니다. 본문 2절에 보면 병 낫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따랐습니다. 병자의 가족과 친지들이 함께 따랐습니다. 또다시 표적을 보기 원하며 따랐습니다. 이들은 이미 고침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감격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표적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오늘 본문의 사건인 5병2어의 놀라운 기적을 다시 체험한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배고픈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은 매일 하루 세 끼를 먹어야 삽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집에서 나온지가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심히 배가 고팠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양식을 주신 주님이 배고픈 그들을 풍성히 먹여 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가득한 능력의 역사가 저들로 하여금 배불리 먹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십니다. 굶주린 영혼을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굶주린 상태로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심령에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배고픈 자가 되어서 주님이 채워 주시는 영의 말씀으로 배불리 먹어야 합니다.
셋째, 저들은 예수님을 세상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14절에 표적을 본 사람들이 “이는 참으로 이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선지자란 구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선지자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만왕의 왕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단순한 유대를 통치하는 왕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떡을 배불리 먹이신 근본 뜻도 알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배가 부른 것으로 그저 만족했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왕이 되시면 먹는 문제는 해결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도 이 사람들처럼 오직 육신의 문제만 가지고 예수님을 기다리고 만나려 하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께서는 생명의 떡이시고 유월절에 그 몸을 찢어서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세상에 오신 구속의 목적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근본적인 목적을 모르니 기적을 행하신 이후에 홀로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2. 그럼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의 참된 의도는 무엇입니까 기적을 행하신 첫 번째 이유는 말씀 듣다가 지치고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여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육신을 채워 주신 사건을 통해서 유월절에 대속의 양이 죽게 되는 참 의미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자신이 인류의 생명의 떡이심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물으신 이유는 돈으로 사서는 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대신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주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과연 빈들인 곳에서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줄 떡도 구하기가 힘들었고 그만한 돈도 없었던 것입니다. 계산이 빠른 빌립은 2백 데나리온의 돈도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장정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니 대단한 돈입니다. 그러니 빌립의 대답은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과연 벳새다 광야의 형편으로써는 그 많은 사람들의 육신의 배를 채워 주기에는 제자들만의 힘으로써는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의 만족 역시 사람들의 힘으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서 영혼의 만족이란 사람의 힘으로써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없이는 생명의 떡도 없습니다. 진정한 만족도 없습니다. 풍성함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앉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배부르게 먹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미 예수님에게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한 아이가 자기가 먹는 대신에 예수님께 바친 것입니다. 사람들이 앉아야 하는 이유는 질서를 위해서 였습니다. 또 믿음으로 순종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생명의 떡을 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고 받으려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 앞에 앉아야 합니다. 고넬료의 온 집안 식구들이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씀을 들으려고 앉은 것처럼, 벳새다 광야의 사람들이 주님의 모습을 주시한 것처럼, 주님을 앉아서 주시해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 받는 자의 바른 자세입니다. 바른 믿음입니다. 바른 순종입니다. 이렇게 하면 그 심령이 주님이 주시는 신령한 양식으로 배불리 채워 주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순종한 제자들은 그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배불리 먹고도 많이 남았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부스러기를 주워 모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풍성하게 하시는 예수님이 부스러기를 소중히 여기신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은혜 중에는 부스러기까지도 소중한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부스러기의 은혜로써도 그 딸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너무 낭비하면 안됩니다. 나의 배부른 것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내가 먹다 남은 이 부스러기라도 필요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풍성하게 하실 수 있으셨지만 이 부스러기까지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3. 이 기적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중요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 어린아이의 작은 도시락이지만 주님께 바친 일입니다. 이 놀라운 기적, 풍성한 기적의 시작도 이 작은 헌신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의 마음, 헌신의 마음이 기적의 시작입니다. 이기주의로 가득한 세상에서 정말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어디서 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타적인 사랑이 있는 곳에 흡족함이 있습니다. 즐거이 헌신하는 곳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주님의 손에 들려질 때에 많은 것으로 변화됩니다.
둘째, 예수님의 나누어 먹고자 하는 정신입니다. 비록 한 사람 분의 도시락이었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적게라도 나누어 먹자고 하신 것이 주님의 의도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앉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혼자서만 음식을 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배가 고파도 함께 고프고 배가 불러도 함께 불러야지 하는 것이 주님의 생각이었습니다. 같이 나누는데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공동운명체임을 안 것입니다. 서로를 생각하신 것입니다. (최일도목사의 밥퍼주는 사랑)
셋째, 믿음과 순종입니다. 제자들이 믿고 순종했고 무리들이 믿고 순종했습니다. 도저히 사람의 생각으로서는 안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고 하였을 때에 한 사람도 따지거나 불평이 없었습니다. 음식이 없는데 어디서 구할 것인가 돈도 없습니다. 이렇게 불신앙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은 믿고 순종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산다고 했을 때 믿음으로 순종한 사람들은 살았습니다. 잔디에 앉으라 했을 때에 순종하여 앉으니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앉고나니 예수께서 음식을 들고 역사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음식을 받아 들고 나릅니다. 열심히 나릅니다. 얼마나 신바람이 났겠습니까 제자 한 사람당 사백명을 책임진 것입니다. 음식은 걱정이 없었습니다. 그저 받아서 주면 되었습니다. 빠진 사람만 없게 하면 되었습니다. 무리가 더 요구하면 갔다 주면 되었습니다. 여기 저기서 이제는 배부르다고 합니다. 실컷 먹었습니다. 정말 신났습니다. 부스러기가 많이 남았습니다. 이것을 주으라 하시니 모두 순종했습니다.
넷째, 무리의 질서입니다. 한 사람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니 질서 있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오천명이니 서로 앞다투어 먼저 받겠다고 했으면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옥을 방불했을 것입니다. 먼저 먹어보야야 한 시간인데 그것을 참지 못해서 아우성이었다면 어찌 될 뻔했습니까 그저 앉아만 있으면 되었습니다. 갖다가 주니 받아서 먹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천지창조에서부터 역사 섭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질서를 중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벳새다 광야의 오천 명이 질서를 지킨 일을 보고 우리도 질서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생명의 떡이심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벳새다 광야에서는 육신의 양식으로 배부르게 하셨지만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생명의 떡을 흡족하게 주십니다. 예수님앞에 나오면 육신의 만족이 있습니다. 영의 만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내가 가진 것이 작은 것일지라도 그것을 주님께 드리겠다는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 헌신이 기적의 시작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주님의 말씀 순종하면서 주께서 풍족하게 채워 주시는 영육간의 음식으로 만족을 얻으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