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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있는 삶 (마9:18-22)

본문

희망 있는 삶이란 참으로 복된 것입니다. 지금 형편이 어렵고 힘들어도 희망 있는 내일이 있다면 그 어려움은 별것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평안하고 좋아도 미래에 희망이 없다면 이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 샘물 교회가 창립 1주년을 맞이하게 되면서 아직은 여러 가지고 미약하고 힘들지만 희망의 내일이 있기 때문에 복된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가정도 오늘보다 내일이 더욱 좋아지는 희망적 삶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에 저는 TV를 통해서 이런 내용을 보았습니다. MBC창사 35주년 기념 특별 생방송 중에 가출한 자녀들을 찾아 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많은 어머니, 아버지들이 나와서 피켓을 들고 사진과 이름을 적어 “우리 아들, 딸을 찾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며 눈물로 호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방송을 보던 가출한 한 아들이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머니와 몇 달만에 통화를 하였고 감격적으로 방송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절망 속에 살던 그 가정에 희망과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어느 가출한 또 다른 아들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이 가정은 엄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 혼자서 어렵게 생활을 꾸려 나가는 집이었는데 이것을 비관한 아들이 집을 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울면서 전화를 걸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얼른 들어오너라 그 동안 얼마나 고생했니” 하면서 대화를 하는데 가슴이 찡했습니다. “아버지 잘못했어요. 지금 곧 방송국으로 달려가겠습니다”. 하니 곧 감격의 상봉을 하는가 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소리가 났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저는 궁금하기만 했습니다. 사회자가 “생방송이니 이런 사고가 있습니다” 하면서 양해를 구하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울면서 전화한 아이는 진짜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뻥이야, 뻥이야.” 하며 전화를 끊은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장난 전화를 한 것입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가출한 아들을 둔 아버지의 가슴에 다시 한번 못을 박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모면서 희망이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희망이 있다는 것은 ‘즐거울 때 같이 기뻐해 줄 줄 알고 슬플 때 같이 울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희망을 얻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합니다. 삶을 비관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야 말로 희망 없던 한 여인이 나옵니다.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으면서 고침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절망 가운데서 번민하며 괴로워했습니다. 혈루증은 부인병으로 쉬지 않고 계속 출혈하는 병입니다. 고칠 수가 없는 병입니다. 사람은 병들면 외롭고 서럽습니다. 몸만 아픈 것이 아닙니다. 마음도 괴롭습니다. 병은 자랑해야 된다는 말도 있지만 이 부인은 자기 병을 자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도 수치스럽고 고통을 주는 병이었습니다. 이 병 때문에 이 여인은 모든 것을 빼앗긴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도 빼앗겼습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몸은 아프고 괴로웠습니다. 건강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물질도 잃었습니다. 막5:25에 보면 “의원에게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레15:19-32절에 보면 혈루증을 가진 사람은 성전에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당시 혈루증이나 문등병자 같은 사람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우고 ‘부정하오, 나는 부정하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피하여 갑니다. 그러니 얼마나 부끄럽고 처량한 삶입니까 너무도 절망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나 같은 것이 살아서 무엇해’ 하며 비관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그런 절망을 극복하고 기쁨과 희망을 얻게 된 것입니다. 희망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심정으로 헤집고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낳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모두들 놀랐습니다. 이 여인은 더욱 놀랐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말합니다. “예수님 신경 쓰지 마세요.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보세요. 이런 와중에 밀리고 밀려서 그런 것일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니다. 내게서 능력이 나갔느니라”. 할렐루야! 아멘.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가만 만져도 구원 얻으리라는 믿음가지고서 예수님께 나아갔다가 이런 축복을 받았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동안 너무도 고독했습니다. 남편의 사랑도 잃어버렸습니다. 물질도 다 허비했습니다. 건강은 아예 포기하고 살 정도로 모든 것에 희망이 없고 절망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던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놀라운 기쁨을 얻은 것입니다. 기쁨의 날 즉 광명의 날이 온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안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 있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운명도 바꿔집니다. 그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사람에게 만남이란 참으로 소중합니다. 어릴 때 부모님을 잘 만나야 합니다. 학교에서 공부할 때 스승을 잘 만나야 합니다. 청년 시절 배우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세상 살아가는 데도 잘 만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이 이 혈루병 걸린 여자에게 해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나 봐야 소용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새로운 기쁨을 얻었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시고 생명의 구주 되시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여인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이유는 잘못 듣고 잘못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잘 전하고, 잘 듣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롬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자꾸 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설교를 듣습니다. 은혜로운 간증을 듣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며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좋은 소문을 들어야 합니다. 은혜로운 말을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슨 말을 듣고 계십니까 어떤 사람이 다란 사람을 비판합니다. 처음 들을 때는 ‘그렇지 않아’ 하지만 두 번 들을 때는 ‘그럴 수 있나’ 하는 의심이 생깁니다. 세 번 들으면 ‘그래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더라’ 하게 됩니다. 여러분! 은혜로운 말을 들으면 희망이 넘칩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하늘의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함께 하시며 고쳐 주신다는 소문을 들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인이 이런 소문을 듣고서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가져 보세요. 모든 것이 다 밉게 보입니다. 좋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다 좋게 보입니다.
혈루증 여인은 그 동안 절망적인 생각이 예수님을 만나면 나으리라는 희망의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나도 행복할 수 있다. 나는 행복하다’하고 열 번씩 고백해 보세요. 반대로 ‘나는 왜이래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하루에 세 번씩 말해 보세요. 그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병도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이 병들면 육체도 병듭니다. 희망 있는 삶을 살아가려면 마음의 자세 생각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실패하는 사람을 보세요. 얼굴에 근심이 있습니다. 자신감이 없어 보입니다. 이것을 기(氣)가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 기를 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기를 살릴 수 있는 길은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생각하며 살아가십시오. 날마다 예수님을 생각하며 살게 되면 기가 살아납니다. 세상 사람 다 나를 버려도 예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알아주신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잘못된 것이 많았지만 이제는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잘하려고 생각해야 합니다. 삶에 대한 새로운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예수 안에서 건강하게 살면서 보람있게 살리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으면 새로운 희망이 넘칠 것입니다. 어느 날 노만 빈센트 필 박사가 골프장에 갔더니 잔디를 깎고 있는 한 청년을 보았습니다. 이 청년에게 “자네, 새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가” 했더니, “글쎄요, 아무도 나에게 새로운 일을 시키는 이가 없네요.”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자네는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하고 물었더니, “저는 공장에서 일하고 싶으며 제품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머리로 하는 일보다 손으로 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구체적으로 말하며, 열심히 일하고 싶음을 말한 것입니다. 그는 후에 플라스틱 공장 공장장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삶에 대한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이런 삶이 희망 있는 삶을 살게 합니다.
2. 확신 있는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군중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를 구경하려고 온 이들이 있었습니다. 구경꾼은 원래 말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는 비판하려고 온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비판하는 이들은 모든 것을 좋게 보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좋지 않은 것만 봅니다. 예배도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본다는 것은 설교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보는 것이요, 성가대가 은혜롭게 잘 부르는지 보는 것입니다. 또한 누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통하여 병고침을 받으려고 왔습니다. 예수님을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왔습니다. 구경꾼은 예수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비판하는 사람은 약점만을 찾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통하여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절박한 상황에서 예수님 앞으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실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은 것입니다. 옷자락만 붙잡으면 내 병이 낫겠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 여인의 신앙 접촉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
리에게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면, 이에 대한 확신 있는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믿음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나의 생명의 구주시오, 성령님은 우리를 복되게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겐 아무런 역사가 없습니까 믿음의 접촉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행함 없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여기에 전화기가 있습니다. 전화할 수 있다. 국제전화도 가능하다 하고 말하고 믿으면 전화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실을 믿었다면 전화 다이얼을 눌러 실제로 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무한한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다면 접촉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럼 이 접촉점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기도요, 믿음의 확신 속에서 나오는 행위입니다. 확신과 실천이라는 양 바퀴가 맞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나의 구주로 믿어지십니까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행복한 분들이십니다. 희망 있는 삶을 사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접촉점이 여러분에게 있어야 합니다. 어느 분은 말씀을 접촉점으로 사용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감동시켰던 백부장이 있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어떤 병도 나을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만일 그가 확신을 갖고 집에 가만히 있었다면 하인은 병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확신 있는 행함은 예수님께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만 하옵소서’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분에게는 ‘말씀만 하옵소서’ 라고 말하는 것이 접촉점이었습니다. 행함이라는 접촉점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어떤 것이 복된 것이라고 생각했으면 그것을 꼭 해야 합니다. “사랑해야겠다, 선교해야 하겠다, 섬겨야 하겠다”, 이런 것들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분명히 확신했다면 실행해야 합니다. 움직이는 기도, 생활하는 믿음이 바로 희망을 솟게 하는 것입니다. 삶에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3. 기회를 잘 잡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십니다. 그 기회가 이 여인에게는 일생에 있어서 다시없는 기회 일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찬스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불행해지는 것은 좋은 기회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때를 만나야 합니다. 이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학생은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성공도, 보람도, 가치도 기회를 잘 붙잡을 때 얻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예수를 붙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은혜를 붙잡아야 합니다. 능력을 붙잡아야 합니다. 요5:10절을 보면 베데스다 못가에서 수많은 환자가 모여 왔습니다. 물이 동할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물이 동할 때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던지 나음을 얻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물이 동하는 기회를 잊어버린 이가 있었습니다. 38년 된 병자였는데 그는 기회를 놓쳤어도 예수님을 만나는 기회가 있었기에 육도 고침 받고 영이 구원받는 놀라운 복을 얻었습니다. 세상에서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하는 분이 계십니까 이 기회보다도 예수님 만날 기회를 더욱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내일이 아닙니다. 지금이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 만나고 예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1871년 10월 18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무디가 시카고에서 설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당신을 부를 때에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라는 설교였습니다. 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설교를 한 다음에 결신을 시켰습니다. “여러분!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결단하시던지 아니면 다음 주일까지 결단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되기 전에 대화제가 시카고에서 발생했습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무디는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때 오늘 꼭 결신 하도록 했어야 했는데 다음에 라고 한 것이 너무도 후회가 되었습니다. 무디는 그 뒤로부터는 ‘다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지금”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 잘 믿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을 만나시고 지금 예수님께 붙들려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복된 것이요, 희망 있는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불행하다’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은 소망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히윗트가 부른 찬송대로 “너 주님과 사귀어 살면 새 생명이 넘치리라”는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잊어버렸습니까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마음에 확신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마음을 바꾸고 예수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지금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우리의 운명을 바꾸십니다. 불행을 행복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은혜를 받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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