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찾는 자 (시63:1-11)
본문
이 시편은 유다광야에 있을 때 다윗이 지은 것이라는 부제가 달려있습니다. 이 유다광야에서의 일은 삼하16장과 17장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하여 가는 피난길에 있었던 일임을 보여줍니다. 특히 16장에서의 유다광야는 시므이의 계속되는 저주때문에 온 다윗을 따르는 무리가 피곤에 피곤을 더하여 있는 상황이었음을 성경은 말해줍니다. 이런 때가 우리 성도들에게도 있을 터인즉 다윗의 상황속에서의 믿음의 행위를 본받아야 합니다.
1. 믿음이 무엇입니까
1 믿음은 주를 간절히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출발이요, 가장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 중심사상이 바로 신앙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1절,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갈망한다는 말과 앙모한다는 말을 생각해 봅니다. 다윗은 곤고한 땅, 물없는 사막같은 광야 그 곳에 온 이유는 자기의 죄악때문임을 깨닫고, 진정 곤핍한 땅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자 애씀이 바로 신앙입니다. 성도와 불신자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려운 상황이 왔을 때에 성도는 하나님을 찾게 되고 자기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앞에 엎드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요, 이런 같은 상황에서 불신자는 실망과 좌절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리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 바로 차이점입니다. 먼저 다윗은 영혼이 갈망하고, 육체가 앙모한다는 고백을 합니다. 이 말은 시42편의 고라자손의 시와 유사한 모습을 보입니다. 즉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고 말하고,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망하나니 언제나 주님 앞에 뵈올꼬 한탄하고 있음과 같습니다. 이것이 출발입니다. 곤핍해도 주님때문에 참고, 곤비해도 주님때문에 견디고, 그 어려움속에도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찾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2 믿음은 주의 이름때문에 주님께 손을 드는 것입니다. 4절,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하셨습니다. 하나님중심 신앙이 있고, 성전중심 신앙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기도로 해결하고자 하는 신실함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 거하고 있는 곳이 유다광야와 같이 메마르고 빈핍하여 곤고한 곳이라 하더라도, 그 가운데를 기도의 장소로 삼아야 반드시 승리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시84편의 고라자손의 시중 5절에는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되다'고 했는데, 이런 사람은 눈물골짜기도 많은 기쁨의 샘이 되게 반전시킬 수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기도외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빈핍하고 곤핍하여 무엇인가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사람에게 없다고 할 때에, 우리가 해결할 수 없으니 그저 기도라도 해야되겠다는 최소한의 도전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도 기도하면, 더 좋은 해결책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요, 해결할 수 없을 때에는 당연히 그저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기도의 맛을 알고 그래서 신앙의 깊이가 생겨지게 됩니다.
3 주를 가까이 따르고자 함이 믿음입니다. 8절,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주를 가까이 따른다'는 말을 생각해 봅니다. 신자들이 '주님을 따르기를 회피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요, 오직 이론이요, 탁상공론일 뿐입니다. 계14장에 나오는 새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즉 땅에서 구속함받은 자들인데 그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간에 따라가는 자라고 설명합니다. '따른다'는 것은 인도자에게 의지와 감정과 지식을 모두 맡기는 것입니다. 인도자에 따라 기뻐함과 앎과 행함이 모두 결정되어야 함이니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사람이 누구에게 매인다고 하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입니다. 신앙을 아직 모르는 자들은 이런 이유에서 주님을 따르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이런 맡김이 얼마나 즐겁고 얼마나 편안하고 얼마나 좋으며 얼마나 안전한지를 아는 자들이야 말로 주를 따름에 지장이 없는 자입니다. 이런 신앙과정이 우리에게 넘치게 되길 바랍니다.
2. 성숙함에 이르는 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세 가지 방향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모습 즉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2절, 성소에서 주를 바라본다는 말을 기억하며,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중요한 '성전중심 신앙'입니다. 언제고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향하여 그 성전에서 하나님을 뵈옵고자 하는 것을 봅니다. 성전을 사랑하다는 것 보다는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이 더 나을 것입니다. 요나도 물고기 뱃속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에 그랬고, 욘2:4,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주님도 그랬습니다.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을 그를 삼켰다고 했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중의 이스라엘백성이 그랬고, 그 가운데 다니엘과 느헤미야, 에스라가 심했습니다.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고자 하는 마음을 우리는 늘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고후10:15,믿음이 점점 더해 질수록,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위대해 지기를 바라는 사도 바울을 닮아가야 합니다. 교회를 늘 사모하는 것. 그것으로써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2 세상을 향한 신앙의 모습 즉 간절히 주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3절, 주의 인자가 나의 생명보다 큰 것이기에 입술로 찬양한다고 했습니다. 4절,
그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할 것이라 했습니다. 5절, 만족하게 하시오니 기쁜 입술로 찬양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찬양이라는 과정은 신앙의 대단히 중요한 제목입니다. 주를 찾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일이지만 주를 찬양하는 것은 그저 이 세상에서의 일로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은 물론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찬양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야 합니다. 찬양의 진정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내 영혼이 갈망하고 내 육체가 주님을 찾으며 이렇듯 갈급하게 주님앞에 기도하는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의 생명때문이 아닙니까 나의 육적 그리고 영적 생명을 위하여 이렇듯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찬양해야 할 이유는 그 모든 나의 생명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주의 인자하심 때문임을 다윗은 깨닫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나의 생명보다 나은 인자! 이것이 세상을 향한 나의 찬양제목입니다. 비록 자기가 기도의 응답을 얻지 못하여서 결국 유다광야 땅에서 죽게 된다하여도 주님의 인자하심을 분명히 알기때문에 찬양할 것이라고 고백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초월한 찬양이요, 생활 환경을 초월한 찬양이요, 또한 삶을 초월한 것이니 4절처럼 평생토록 해야 할 것이 찬양입니다.
예화) '살림'이라는 잡지 89년 9월호에 실린 연미어머니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어머니는 강서구 화곡동에 살던 어머니로 뇌성마비된 딸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어려운 삶속에서 그녀는 신앙에 힘에 의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몸이 불편한 자식을 주지않아요. 연미 어머니처럼 착하고, 인내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으며, 끝까지키울 능력이 있는 분에게 하나님은 이런 아이를 맡기신답니다' 목자의 말에 힘을 얻어 완전히 변화하는 그래서 지금은 온전히 감사와 찬양이 있는 삶을 산다는 이야기 속에서 많은 것을 느낍니다. 평생토록 이런 고통중에서 살아가는 연미! 그를 바라보는 어머니! 오늘도 연미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는 '연미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삶속에서 나오는 찬양이야 말로 진정한 찬양입니다. 자기의 생명보다 더 귀한 하나님이 인자하심을 발견했기에 기쁜 입술로써, 평생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바로 신앙성숙의 제 2 단계입니다.
3 자신과 가정을 향한 신앙의 모습 즉 조용히 묵상함이 필요합니다. 6절,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묵상없는 삶은 뒤죽박죽의 삶이요, 체계없는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6절, 나의 침상에서, 그리고 밤중에 주님을 묵상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침상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그것은 개인적인 가장 은밀한 장소를 말합니다. 잠을 자는 곳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비밀한 곳이요, 나아가서 누구의 방해도 물리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하기에 이런 장소에서 주님을 묵상한다는 것은 신앙의 반성과 계획과 그리고 좋은 전환점이 됩니다. 묵상없는 삶은 건조한 삶입니다. 내게 이루어 주신 하나님의 역사를 추억함이 바로 신앙의 윤활유가 되는 것이며, 한 번 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역사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대부분 묵상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아름다운 밤을 TV에 빼앗기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황금시간'이라고 해서 텔리비젼에서도 자기들의 최고 프로그램을 내어 보내니 시청률이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묵상의 좋은 시간을 뺏깁니다. 이 시간을 찾는 노력을 해 보십시요. 이는 신앙의 엄청난 활력을 주게 될 것이요,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하심을 되새기게 될 것입니다.
3. 신앙의 축복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1 사랑의 하나님을 만남은 축복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생명보다 나은 인자를 주시는 분이라고 3절은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이 얼마나 크시고 놀라운지! 애3:20-23,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아침마다 새로운 은혜를 생각하여 봅시다. 아침마다 새로운 사랑의 하나님을 만남은 축복입니다.
2 능력의 하나님을 만남은 축복입니다. 8절,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신다'고 말씀하고, 7절, 주는 나의 도움이시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로써 하나님은 능력으로 인생들을 먹이셔서 만족케하심을 압니다. 능력의 하나님의 역사를 본문에서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는데
첫째 5절,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먼저 육신의 만족을 주십니다. 시104:15,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다고 노래합니다. 행17:25,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라고 설교하는 바울을 보십시요.
둘째 5절, 같은 원리로써 영혼을 만족시켜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에 대하여 지극히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이요, 지금은 많이 상실한 대로 살아가기에 그 형상을 회복시키어 주시려고 우리의 영혼에 대한 관심은 대단하십니다. 영혼을 만족시키어 주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보내어 가르치심이며, 성령님으로 위로하심이며, 사건을 통하여 연단하심이며, 예배를 통하여 살찌우심입니다.
셋째 10-11절, 우리의 원수를 '땅 깊은 곳' 즉 음부에 멸하시며, 칼의 세력에 주어서 시랑의 밥이 되게 하심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능력의 하나님, 이는 우리가 믿는 대로 그리고 하나님앞에 우리가 진실한 대로, 갚아 주시는 놀라우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1절,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면서 사십시요. 11절, 하나님을 자랑할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사십시요.
1. 믿음이 무엇입니까
1 믿음은 주를 간절히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출발이요, 가장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 중심사상이 바로 신앙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1절,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갈망한다는 말과 앙모한다는 말을 생각해 봅니다. 다윗은 곤고한 땅, 물없는 사막같은 광야 그 곳에 온 이유는 자기의 죄악때문임을 깨닫고, 진정 곤핍한 땅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자 애씀이 바로 신앙입니다. 성도와 불신자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려운 상황이 왔을 때에 성도는 하나님을 찾게 되고 자기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앞에 엎드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요, 이런 같은 상황에서 불신자는 실망과 좌절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리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 바로 차이점입니다. 먼저 다윗은 영혼이 갈망하고, 육체가 앙모한다는 고백을 합니다. 이 말은 시42편의 고라자손의 시와 유사한 모습을 보입니다. 즉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고 말하고,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망하나니 언제나 주님 앞에 뵈올꼬 한탄하고 있음과 같습니다. 이것이 출발입니다. 곤핍해도 주님때문에 참고, 곤비해도 주님때문에 견디고, 그 어려움속에도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찾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2 믿음은 주의 이름때문에 주님께 손을 드는 것입니다. 4절,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하셨습니다. 하나님중심 신앙이 있고, 성전중심 신앙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기도로 해결하고자 하는 신실함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 거하고 있는 곳이 유다광야와 같이 메마르고 빈핍하여 곤고한 곳이라 하더라도, 그 가운데를 기도의 장소로 삼아야 반드시 승리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시84편의 고라자손의 시중 5절에는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되다'고 했는데, 이런 사람은 눈물골짜기도 많은 기쁨의 샘이 되게 반전시킬 수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기도외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빈핍하고 곤핍하여 무엇인가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사람에게 없다고 할 때에, 우리가 해결할 수 없으니 그저 기도라도 해야되겠다는 최소한의 도전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도 기도하면, 더 좋은 해결책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요, 해결할 수 없을 때에는 당연히 그저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기도의 맛을 알고 그래서 신앙의 깊이가 생겨지게 됩니다.
3 주를 가까이 따르고자 함이 믿음입니다. 8절,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주를 가까이 따른다'는 말을 생각해 봅니다. 신자들이 '주님을 따르기를 회피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요, 오직 이론이요, 탁상공론일 뿐입니다. 계14장에 나오는 새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즉 땅에서 구속함받은 자들인데 그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간에 따라가는 자라고 설명합니다. '따른다'는 것은 인도자에게 의지와 감정과 지식을 모두 맡기는 것입니다. 인도자에 따라 기뻐함과 앎과 행함이 모두 결정되어야 함이니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사람이 누구에게 매인다고 하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입니다. 신앙을 아직 모르는 자들은 이런 이유에서 주님을 따르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이런 맡김이 얼마나 즐겁고 얼마나 편안하고 얼마나 좋으며 얼마나 안전한지를 아는 자들이야 말로 주를 따름에 지장이 없는 자입니다. 이런 신앙과정이 우리에게 넘치게 되길 바랍니다.
2. 성숙함에 이르는 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세 가지 방향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모습 즉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2절, 성소에서 주를 바라본다는 말을 기억하며,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중요한 '성전중심 신앙'입니다. 언제고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향하여 그 성전에서 하나님을 뵈옵고자 하는 것을 봅니다. 성전을 사랑하다는 것 보다는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이 더 나을 것입니다. 요나도 물고기 뱃속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에 그랬고, 욘2:4,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주님도 그랬습니다.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을 그를 삼켰다고 했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중의 이스라엘백성이 그랬고, 그 가운데 다니엘과 느헤미야, 에스라가 심했습니다.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고자 하는 마음을 우리는 늘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고후10:15,믿음이 점점 더해 질수록,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위대해 지기를 바라는 사도 바울을 닮아가야 합니다. 교회를 늘 사모하는 것. 그것으로써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2 세상을 향한 신앙의 모습 즉 간절히 주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3절, 주의 인자가 나의 생명보다 큰 것이기에 입술로 찬양한다고 했습니다. 4절,
그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할 것이라 했습니다. 5절, 만족하게 하시오니 기쁜 입술로 찬양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찬양이라는 과정은 신앙의 대단히 중요한 제목입니다. 주를 찾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일이지만 주를 찬양하는 것은 그저 이 세상에서의 일로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은 물론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찬양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야 합니다. 찬양의 진정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내 영혼이 갈망하고 내 육체가 주님을 찾으며 이렇듯 갈급하게 주님앞에 기도하는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의 생명때문이 아닙니까 나의 육적 그리고 영적 생명을 위하여 이렇듯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찬양해야 할 이유는 그 모든 나의 생명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주의 인자하심 때문임을 다윗은 깨닫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나의 생명보다 나은 인자! 이것이 세상을 향한 나의 찬양제목입니다. 비록 자기가 기도의 응답을 얻지 못하여서 결국 유다광야 땅에서 죽게 된다하여도 주님의 인자하심을 분명히 알기때문에 찬양할 것이라고 고백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초월한 찬양이요, 생활 환경을 초월한 찬양이요, 또한 삶을 초월한 것이니 4절처럼 평생토록 해야 할 것이 찬양입니다.
예화) '살림'이라는 잡지 89년 9월호에 실린 연미어머니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어머니는 강서구 화곡동에 살던 어머니로 뇌성마비된 딸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어려운 삶속에서 그녀는 신앙에 힘에 의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몸이 불편한 자식을 주지않아요. 연미 어머니처럼 착하고, 인내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으며, 끝까지키울 능력이 있는 분에게 하나님은 이런 아이를 맡기신답니다' 목자의 말에 힘을 얻어 완전히 변화하는 그래서 지금은 온전히 감사와 찬양이 있는 삶을 산다는 이야기 속에서 많은 것을 느낍니다. 평생토록 이런 고통중에서 살아가는 연미! 그를 바라보는 어머니! 오늘도 연미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는 '연미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삶속에서 나오는 찬양이야 말로 진정한 찬양입니다. 자기의 생명보다 더 귀한 하나님이 인자하심을 발견했기에 기쁜 입술로써, 평생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바로 신앙성숙의 제 2 단계입니다.
3 자신과 가정을 향한 신앙의 모습 즉 조용히 묵상함이 필요합니다. 6절,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묵상없는 삶은 뒤죽박죽의 삶이요, 체계없는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6절, 나의 침상에서, 그리고 밤중에 주님을 묵상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침상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그것은 개인적인 가장 은밀한 장소를 말합니다. 잠을 자는 곳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비밀한 곳이요, 나아가서 누구의 방해도 물리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하기에 이런 장소에서 주님을 묵상한다는 것은 신앙의 반성과 계획과 그리고 좋은 전환점이 됩니다. 묵상없는 삶은 건조한 삶입니다. 내게 이루어 주신 하나님의 역사를 추억함이 바로 신앙의 윤활유가 되는 것이며, 한 번 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역사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대부분 묵상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아름다운 밤을 TV에 빼앗기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황금시간'이라고 해서 텔리비젼에서도 자기들의 최고 프로그램을 내어 보내니 시청률이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묵상의 좋은 시간을 뺏깁니다. 이 시간을 찾는 노력을 해 보십시요. 이는 신앙의 엄청난 활력을 주게 될 것이요,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하심을 되새기게 될 것입니다.
3. 신앙의 축복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1 사랑의 하나님을 만남은 축복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생명보다 나은 인자를 주시는 분이라고 3절은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이 얼마나 크시고 놀라운지! 애3:20-23,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아침마다 새로운 은혜를 생각하여 봅시다. 아침마다 새로운 사랑의 하나님을 만남은 축복입니다.
2 능력의 하나님을 만남은 축복입니다. 8절,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신다'고 말씀하고, 7절, 주는 나의 도움이시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로써 하나님은 능력으로 인생들을 먹이셔서 만족케하심을 압니다. 능력의 하나님의 역사를 본문에서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는데
첫째 5절,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먼저 육신의 만족을 주십니다. 시104:15,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다고 노래합니다. 행17:25,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라고 설교하는 바울을 보십시요.
둘째 5절, 같은 원리로써 영혼을 만족시켜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에 대하여 지극히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이요, 지금은 많이 상실한 대로 살아가기에 그 형상을 회복시키어 주시려고 우리의 영혼에 대한 관심은 대단하십니다. 영혼을 만족시키어 주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보내어 가르치심이며, 성령님으로 위로하심이며, 사건을 통하여 연단하심이며, 예배를 통하여 살찌우심입니다.
셋째 10-11절, 우리의 원수를 '땅 깊은 곳' 즉 음부에 멸하시며, 칼의 세력에 주어서 시랑의 밥이 되게 하심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능력의 하나님, 이는 우리가 믿는 대로 그리고 하나님앞에 우리가 진실한 대로, 갚아 주시는 놀라우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1절,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면서 사십시요. 11절, 하나님을 자랑할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사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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