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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 (시107:4-9)

본문

처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먼저 찾아 오는 것은 아깝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주일 헌금하기도 아깝고 감사 헌금 하기는 더더욱 아깝고 십일조 하기는 더더욱 한번 더 아깝고 거기다가 절기 헌금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예물이라 할 것입니다. 교회 가면 왜 그렇게 헌금도 많고 하라고 하는 것도 많은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감사하지도 않은데 왜 감사하라고 하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의 자녀에 관한 말입니다. 3학년이 된 둘째 아이가 자연 시간에 올챙이 알을 구해서 개구리가 되는 과정을 관찰해야 한다고 해서 교사인 친구가 봄나들이를 갔다가 알을 구해 보내 주었다. 실내에 두고 4-7일 사이에 투명한 막 속의 점에 불과 하던 알이 꼼지락거리더니 작은 꼬리가 나고 둘러싸인 막을 먹이로 해서 힘을 얻어 헤엄을 치는 아기 올챙이가 되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관찰 일기를 써야 하는 둘째뿐 아니라 온 가족이 시간 나는 대로 들여다보며 어린 날, 시골에서는 흔히 보았던 올챙이를 보석을 보듯이 신기해하며 자연의 향취에 흠뻑 취할 수 있었답니다. 점점 커 가면서 먹이를 뭘 주어야 할지 잘 몰라 밥알을 조금 주었더니 더워 오는 날씨 탓에 금새 물이 썩어 올챙이가 죽어 가는 것이었답니다. 그래도 몇 마리는 살아 남았기에 온도를 적당히 맞춘 맑은 물을 준비해 두고 옮겨 주려 하자 나의 의도를 모르는 올챙이가 얼마나 도망을 다니는지 쉽게 잡을 수가 없었답니다. 그때 나는 하나님 앞에서의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내 환경이나를 좀먹고 그대로 두었다가는 죽음에 이를 것을 아시고 물갈이를 하여 나를 살리시려는, 시련 뒤에 숨겨진 그 큰 은혜를 볼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숨고, 반항하고, 나를 이대로 내버려두시라고 내 뜻대로의 기도를 드리며 주께서 펴신 도움의 손길을 더디게 하며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적이 얼마나 많았던 가를 돌아보게 되었답니다. 그 사람이 미물인 올챙이를 위해서 쏟는 관심이나 정성과는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과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는 그 인자하심을 가슴 가득히 담아 충만함 중에 범사에 감사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우리가 이 올챙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할 때에는 어려운 일들에 불만과 불평만 늘어놓았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헌금 작정하라 하면 작정에 인색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1'본문 서두에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구속과 구원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 요셉때 이사가서 4백30년동안 애굽의 노예 생활의 구원과 세계적인 막강한 군대와 정치 능력을 가진 바벨론의 70년 포로 생활에서 구원함을 받음과 이웃나라 블레셋과 미디안, 암몬, 모압등 수많은 대적의 침략으로부터 구원받은 감격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일방적입니다. 내가 기도하고 원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로 거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우리 인류의 모든 사람들이 받아 누리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본문에 가장 먼저 말씀하고 있는 것은 “주 여호와께 감사하라” 입니다.
(1)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본문 서두에 (시107: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 하사
(3)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뿐 아니라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모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고 우리에게 삶에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감수하고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역사 속에 수많은 도우심과 보살피심을 알기에 아낌없이 드려야 할 것이고 그 백성들은 주님께 나와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1)주님은 선함이 영원한 하나님입니다. 선하다는 “아름다운 최선의 더 잘 , 풍부한 , 쾌활한 편한, 좋은 (상냥한 말) , 좋아하다, 반가운, 선한 자비롭게 기“쁘게 친절하게 친절 , 가장 좋아하다, 사랑하는, 최고로 , 기쁘다, 기뻐하다. 기쁨 , 값진 , 풍성, 준비된 , 달콤한, 재산 , 부귀, 잘되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은 참 선하심으로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비와 은혜를 일관하심은 바로 선하심입니다. 그리고 악한 사람에게 악하개 값으심도 선하신 하나님께서 주님을 믿고 의지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원수를 갚아 주심으로 선함을 나타내는것 입니다. 그러나 원수가 악하게 되는 것을 주님은원치 않고 주님께 회개 하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믿는자나 불신자나 모두가 구원 받는다면 믿고 의지 함을 인하여 고난받은 사람은 얼마나 억울 합니까. 그리고 주님께 감사 예물을 드리고 아까운 시간을 신앙에 허비한 사람은 얼마나 억울 합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믿는자와 믿지 않는자를 정확하게 구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선하게 하심도 악한 사람을 악하게 하는 것도 선하심의 연속입니다.

ㄱ. 선하심속에는 거짓이 없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속이지 않으면 잠이 않오는지 놀며 말하면서도 거짓말을하고 장사하면서도 거짖말을 밥먹듯이 하고 평소에 하는 것이 남을 속이는일이요 거짖을 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거짓을 말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모든 말씀은 믿고 의지 함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ㄴ. 선하심 속에는 말씀하신 모든 약속을 꼭 이행 하신다는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한번 약속한 내용은 주님이 꼭 지키십니다. 단지 우리가 이 복을 누릴 복이 준비 되지 못하여 줄수가 없는 뿐 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께 쓴 편지가 있습니다. 그중 일부를 읽으면 사랑하는 친구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네게 이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그저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을 표현하려는 것 뿐이야. 어제 난 네가 친구들과 함께 걷고있는 것을 보았단다. 난 어제 종일토록 네가 나에게도 말을 좀 걸어주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단다. 저녁이 가까워 왔을 때 나는 너를 좀 쉬게 하려고 시원한 미풍과 함께 장미빛 황혼을 선사하며 널 기다렸지.
그런데 넌 내게로 오지 않더구나. 아, 그것이 내 마음을 얼마나 상하게 했는지. 그러나 난 그래도 널 사랑한단다.
왜냐하면 너는 나의 벗이기에, 또 너는 나의 생명이기에. 어젯밤, 고이 잠든 너를 보며 나는 네 이마를 좀 쓰다듬어 주고 싶었어. 그래서 나는 달빛과 별빛을 네게 보내며 너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주었어. 그리고는 우리가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얼마나 바라고 기다렸는지. 나는 너를 위해 참으로 많은 선물을 준비해 놓고 있었단다.
그런데 너는 느즈막하게 일어나서는 허둥지둥 네일을 시작하더구나. 창밖에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나의 눈물이었던 것을 너는 아니 오는 너는 무척 슬프고 외로와 보이더구나. 너의 그런 모습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단다. 네 친구들도 날 여러번 속상하고 아프게 했단다.…….

ㄷ. 선하다는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편한 것 가장 귀한 것 가장 기쁜 것 가장 합당한 것이 들어 있고 최선의 아름다운 것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가장 합당하고 가장 아름답고 귀한 것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고 감사합시다.
2)그 다음 우리 주님은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인자하심에는 두 가지가 들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름다운 것의 은총 친절하게 인애 인자하심 연민 과 견책 책망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주님의 사랑을 받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견책하시고 책망하시고 우리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십니다. 마치 올챙이가 죽을 겉 같아서 맑은 물에 넣어 주려는 주인의 뜻을 모르듯 사람들은 고난 속의 주님의 엄청난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것을 성도로부터 뜯어 가려고만 하는 것같고 자꾸만 뭤을 요구하는 것 같으나 주님의 사랑을 받고 복을 누리기 합당한 사람이 되고 복 받기를 원하는 목회자마다 자꾸 주님을 바로 사랑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2)우리를 대적의 손에서 구속하셨으니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모든 대적에서 구속하셨습니다. (시107:2)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 하사 (시107:3)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시107:4)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시107:5)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시107:6)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시107:7)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그 결과 주님의 백성이 주께 나올 수 있었습니다.
1)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모든 원수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 고난과 고통 속에서 산다 해도 우리는 결국은 승리하게 되어 있고 성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우리 어린아이가 시간이 지나면 자라게 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ㄱ.
그러므로 사탄이 우리를 유혹해도 결과 적으로 고난에 헤매고 있어도 승리합니다.
ㄴ. 삶이 우리를 괴롭힌다 해도 우리의 결국은 승리입니다. (시107:4-7) 까지 보면 주님은 거할 성을 찾지 못하는 그 백성들에게와 목마름으로 피곤하여 쓰러질 때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시107:5)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2)주님은 큰 근심 중에 부르짖는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십니다. 본문 말씀에 (시107:6)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시107:7) 또 바른 길로 인도 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분명히 부르짖음에 그 고통에서 건지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르짖다는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르짖음에 유래된 말에 울음이 있습니다.

ㄱ. 우리가 주님을 믿고 의지 한 다면서도 우리는 안타까움을 주님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르짖어라 했는데 많은 사람이 속으로 기도하기를 좋아하고 많은 사람이 조용히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뭤을 그리 생각하는지 기도하면서 별 생각을 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도 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라 나의 문제를 주님께 아뢰는 것이고 아뢸 때 조용히 하는 것도 좋으나 우리는 분명한 것은 나의 마음이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공부할 때 선생님이 문제를 칠판에 쓰고 풀 사람 손을 들으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조용히 그리고 살짝 드는 아이가 있고 어떤 학생은 손을 높이 들고 큰 소리로 저요 하고 얼른 드는 학생이 있습니다. 머리 속에 온갖 생각을 다 하며 손을 드는 사람과 조용히 살짝 손을 드는 사람보다는 열성적으로 손을 들고 큰 소리를 지르는 학생을 선생님은 시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학생이 공부도 잘 합니다.

ㄴ. 주님은 응답하기를 원하고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요구하심에 응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린아이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부모가 해 주지 않으면 이 아이는 막무가내로 웁니다. 그러면 그 부모는 그 우는 아이를 보고 어쩔 수 없어서 그 요구에 응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용히 이것저것 다 따지고 말을 하는 아이는 부모가 하는 말에 넘어가 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착한 아이 이지요 그러나 오늘 기도하는 것에 관해 말하는 이 시점에서는 그 요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응답을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ㄷ. 눈물을 흘리고 기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앓이를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이앓이 하는 사람의 아픔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신앙 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40일금식을 무사히 마치고 하나님 앞에 신앙 관리를 잘하여 많은 은사를 잘 관리하고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집사 님에게 어느 목사님이 목회를 같이 하자고 제안을 했답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이 하신 말씀은 당신이 40일금 식을 하면 같이 하겠노라고 했답니다. 이 말은 기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심정을 알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약한 그 목사님과 같이 있으면 결과적으로 엄청난 영적 손해를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물 흘리고 기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눈물 흘리고 기도해도 몇 차례 기도 한 사람이 이제 눈물을 흘린 적이 까마득한 사람은 신앙 초창기에 은혜 주려고 눈물 흘린 그런 눈물 외에 흘린 적이 별로 없는 사람은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에게 말할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바로 눈물 흘리면 몸부림치며 부르짖는 기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3)주님은 그 백성에게 거할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고 헤매 일 때 주님은 그들에게 거할 성을 주셨습니다. (시107:6)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시107:7) 또 바른 길로 인도 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이들이 무엇인가 없어서 근심 중에 주님을 향하여 부르짖을 때에 주님은 나 몰라라 한 것이 아니라 응답하셔서 요구하심에 합당하고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전하고 견고한 성을 주셨습니다.
1)주님이 이스라엘에게 성을 주듯이 우리에게도 영적인 성을 주십니다. 주님께 아낌없이 심기고 의지하는 그 백성을 향해 모든 손해를 보고 그냥 말아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풍성한 삶이 여야 합니다. 내가 믿고 그냥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고 의지함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그 사람에게 합당한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2)주님께 감사하는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살전5: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살전5:16) 항상 기뻐하라 (살전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향하여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악한 처지에서도 감사하고 아름다우면 삶이 아름다움을 인하여 감사하고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룬다는 주님의 말씀 앞에 우리는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님께 감사함으로 드릴 줄 아는 아름다운 성도가 되십시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나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릴 수 있는 믿음입니다. 창 22장 에 아브라함에게 시험한 것은 과연 독자 이삭을 아낌없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 하는 것을 시험 한 것입니다. 이 독자 이삭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릴 때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축복을 하셨고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더 사랑하고 그 자식도 죽이지 않고 그 도 축복을 했습니다. 이것은 뭤을 말합니까 바로 우리가 주님께 아낌없이 드릴 때 주님은 그것을 그냥 내버려두는 분이 결코 아니고 그것보다 몇 배 계산해 값아 주시는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독자 예수님까지도 아낌없는 주님의 사람 앞에 우리도 아낌없는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한 것을 다 채워 주십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행복의 조건을 해결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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