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눅10:30-37)
본문
성경에 나타난 모든 비유 가운데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보다 더 많이 알려진 비유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의 중심 교훈은 그 이름이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강도 만난 사람을 구출해 주었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의 선행을 밝히고 그것을 본받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1. 강도 만난 사람입니다. 본문 30절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고리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왜 강도를 만났을까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1,110미터 고지에 위치하고 있는가 하면, 여리고는 지중해보다 낮은 해저 400미터 위치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 즉 종교 중심지이고, ‘여리고’는 전에 죄 값으로 하나님의 저주 받은 도시입니다(수 6:26). 이 사람은 성전 중심으로 살던 예루살렘 생활을 떠나서 자기 중심으로 세상 것을 얻으려고 내려 가다가 강도를 만나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빼앗기고 매를 많이 맞고 상처를 입고 거반 죽은 상태로 버림을 받았습니다. 내려 간다는 것, 그것은 영적으로는 신앙의 하향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갔던 그 사람의 행동은 교회와 주님을 떠나 세상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의 그림자입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내려가지 말고 올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제사장과 레위인입니다. 본문 31-32절에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라고 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 길로 지나가면서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으나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제사드리며 성전에서 봉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 강도 만난 사람을 구원해 줄 의무와 책임이 있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한 손가락으로도 도와 주지 않고, 그 신음하며 구원을 호소하는 소리를 못 들은 체하고 지나갔습니다. 이 제사장과 레위인은 의식주의적인 종교가들을 가리킵니다. 의식적인 종교 행사로는 마귀에게 받은 상처를 싸매 주지 못하고 죽어가는 심령을 살려내지 못합니다. 오늘날에도 의식주의로 나가는 교회와 종교인이 많이 있으나 그것으로서는 사람의 심령의 병을 고치지 못하고, 쓰러진 자를 일으키지 못하고, 심령이 죽어가는 자를 살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3.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본문 33-34절에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라고 했습니다. 자기 근족들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을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를 이방인으로 취급하여 멸시하는 유대인인 그 사람을 보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불쌍히 여겨 자기 생명을 돌보지 않고 그에게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으로 옮겨 잘 돌봐주고 그 다음날 떠나면서 데나리온 둘을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그 사람을 계속 돌봐주되 부비가 더 들면 돌아올때 갚겠다고 까지 했습니다. 그는 시간과 물질뿐 아니라 정성을 들였고 계속 끝까지 책임있게 돕고 있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사람입니까. 본문 27절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주님이 명령했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사랑을 베풀때 희생이 없이는 안됩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살려 주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리스도를 비유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여리고 골짜기에 강도 만나 쓰러진 나그네를 구원한 것 같이 오늘 교회와 성도들은 여리고 도상에 쓰러진 인생들을 구원하는 성도가 됩시다.
1. 강도 만난 사람입니다. 본문 30절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고리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왜 강도를 만났을까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1,110미터 고지에 위치하고 있는가 하면, 여리고는 지중해보다 낮은 해저 400미터 위치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 즉 종교 중심지이고, ‘여리고’는 전에 죄 값으로 하나님의 저주 받은 도시입니다(수 6:26). 이 사람은 성전 중심으로 살던 예루살렘 생활을 떠나서 자기 중심으로 세상 것을 얻으려고 내려 가다가 강도를 만나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빼앗기고 매를 많이 맞고 상처를 입고 거반 죽은 상태로 버림을 받았습니다. 내려 간다는 것, 그것은 영적으로는 신앙의 하향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갔던 그 사람의 행동은 교회와 주님을 떠나 세상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의 그림자입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내려가지 말고 올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제사장과 레위인입니다. 본문 31-32절에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라고 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 길로 지나가면서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으나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제사드리며 성전에서 봉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 강도 만난 사람을 구원해 줄 의무와 책임이 있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한 손가락으로도 도와 주지 않고, 그 신음하며 구원을 호소하는 소리를 못 들은 체하고 지나갔습니다. 이 제사장과 레위인은 의식주의적인 종교가들을 가리킵니다. 의식적인 종교 행사로는 마귀에게 받은 상처를 싸매 주지 못하고 죽어가는 심령을 살려내지 못합니다. 오늘날에도 의식주의로 나가는 교회와 종교인이 많이 있으나 그것으로서는 사람의 심령의 병을 고치지 못하고, 쓰러진 자를 일으키지 못하고, 심령이 죽어가는 자를 살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3.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본문 33-34절에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라고 했습니다. 자기 근족들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을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를 이방인으로 취급하여 멸시하는 유대인인 그 사람을 보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불쌍히 여겨 자기 생명을 돌보지 않고 그에게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으로 옮겨 잘 돌봐주고 그 다음날 떠나면서 데나리온 둘을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그 사람을 계속 돌봐주되 부비가 더 들면 돌아올때 갚겠다고 까지 했습니다. 그는 시간과 물질뿐 아니라 정성을 들였고 계속 끝까지 책임있게 돕고 있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사람입니까. 본문 27절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주님이 명령했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사랑을 베풀때 희생이 없이는 안됩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살려 주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리스도를 비유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여리고 골짜기에 강도 만나 쓰러진 나그네를 구원한 것 같이 오늘 교회와 성도들은 여리고 도상에 쓰러진 인생들을 구원하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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