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따르는 삶 (막8:31-38)
본문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는 물음과 그 유명한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 뒤에 이어지는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가장 뛰어난 신앙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곧 사단이 들어간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고난받고, 죽고, 부활할 것을 가르치자 베드로는 금방 예수님를 붙들고 예수님의 그 일을 말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어리석은 신앙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를 따르는 삶,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삶에 대해 말씀을 증거합니다.
I. 자기를 부인하고-예수를 따르는 삶은 먼저 자기를 부인. 이것은 단지 자기의 욕망을 절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집착, 나의 안일함, 나의 이기심, 나의 자랑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제자들의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자기의 배를 버리고(생계수단), 자기의 부친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나섰습니다. 세리 마태는 그 돈 잘버는 직업을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서 바로 그의 본토, 친척, 고향집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사람이 가장 집착하는 것이 바로 직업과 그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직업을 몇 대씩 대를 물려가며 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일에 집착을 가지고 자기의 자녀도 그 일을 했으면 바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은 그의 가족과 고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향은 사람들이 가장 크게 집착하는 것입니다. 사할린 이나 연변에서 사는 우리의 동포들의 소원이 죽기전에 고향 땅을 밟아보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를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가 집착하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다가 병들어 누운 장모를 찾아가지도 못했으며, 예수님은 어떤 제자에게 죽은 자에게 가지 말고(장례를 치르러 가지 말고, 죽은 자의 시신을 보러 가지 말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곧 자기 부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 슈바이처 박사는 예수님를 따르기 위해 그의 자랑(박사학위-신학,의학,음악)를 버리고 아프리카 오지에서 예수님를 따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가말리엘문하, 로마의 시민권을 자랑하지 않고 예수님만 따르는 주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삶과 행동의 목표가 자기가 아니고 하나님 (예수님)이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자기는 없고 예수님이 있는 것입니니다.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말과 자기의 뜻과 자기의 행동은 없고 예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말과 예수님의 뜻과 예수님의 행동만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말로는 놀라운 고백을 했지만 그 자신을 부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는 길을 가로막으려 했습니다. 그 결과 책망듣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나를 부인하고 내 안에 예수님만 모시고 그만 따르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Ⅱ.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우리는 흔히 오해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생활 고, 근심을 우리는 자기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 십자가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자기의 삶에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성도의 문제는 십자가를 지려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생겨났습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지시고 영광은 제가 받겠습니다. 요즈음은 개척교회가 많이 문을 닫는 것이 현실입니다. 십자가를 지지않고 영광만을, 축복만을 받으려는 성도들이 대교회들의 교인들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대교회가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는 성도들 대교회로 몰려들어 잠자는 교인이 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성도 때문에 자기가 눈에 안띠고 그러니 봉사를 조금 덜해도 되고, 교회를 조금씩 빠져도 귀찮게 하는 사람 없어 편안함을 추구하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도 3D 현상이 있다고 합니다. 궂은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방일을 하지 않고, 나타나지 않는 교회학교 교사는 하지 않으려 합니다. 아니 이제 교회에 헌금만 많이하면 되지 하는 황금만능 사상이 판치고 있습니다. 비가 와서 교회 지하실에 물이 차도 어느 누구하나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지셨던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오늘 우리가 지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가 되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무엇인가 바로 인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사명이다. 예수님의 사명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일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당신이 사명의 십자가를 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바로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며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로, 권사, 집사, 교사, 회장, 임원, 재정담당, 선교담당.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며 예수님를 따라야 합니다. 또 성도에게 맡겨진 기본적인 사명(복음전파, 구제, 봉사)을 감당하며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오늘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주님이 지신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Ⅲ. 목숨을 바쳐서 (35)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님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그 목숨을 바치는 자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살리는 역사가 있습니다. 예화 ) '어느 어리석은 승객' 런던을 출발하여 뉴욕까지 가는 한 증기선이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우와 더불어 기관 고장으로 바다에 가라앉을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선장은 어떻게든 승객들을 살려보려고 애를 썼으나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저 구조대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배는 점점 밑으로 가라앉고 승객들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하얗게 질려가고 있을 때에, 유독 한 승객 만은 승객들 틈을 비집고 선실로 내려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선장이 그의 앞을 가로 막으며 "선실로 내려가면 위험합니다. 이 배는 점점 가라앉고 있어요. 구조대가 올테니 어서 갑판 위로 올라가세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승객은 선장의 만류에도 아랑곳 없이 막무가내였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비껴요. 나의 선실에는 내 전 재산을 담은 트렁크가 있어요. 난 그걸 버릴 수가 없어요. 그것은 내 생명만큼 귀한 것입니다." 승객은 선장을 밀쳐 버리고는 물이 들어오는 선실로 내려갔습니다. 잠시 후, 기적적으로 구조대가 도착하였습니다. 지나가던 배가 이 증기선의 구조요청 신호를 들었던 것입니다. 승객들은 구사 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것을 기뻐하며 부둥켜 안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잠시 후 모든 승객이 구조대의 보트로 건너갔습니다. 따라서 이제 어서 빨리 안전한 배로 옮겨 타는 일만 남았습니다. 선장은 선실로 트렁크를 가지러 간 승객을 위해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사정하였으나 휘몰아치는 폭풍우 때문에 도저히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이들이 탄 보우트가 안전한 곳까지 갔을 무렵, 선장은 아까 그 승객이 안간힘을 써가며 트렁크를 메고 갑판위로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배가 거의 가라앉을 무렵이었습니다. 삼상 12:21 “돌이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좇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 생명 없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 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돈을 위해, 명예를 위해, 권력을 위해, 쾌락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으므로 이 땅에서 생명이 길며, 사후에 영생의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바로 목숨을 아끼지 않는 길이며, 스데반, 바울, 베드로, 주의 다른 제자들, 또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이 그 길을 갔습니다. 우리 또한 그 길을 가는 성도가 되야 합니다.
Ⅳ. 나와 나의 말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자랑하며.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를 부끄러워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판자리에까지 갔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비자 하나가 당신도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 아니냐고 하자 예수님를 부인하고 도망하였습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를 판것은 예수님를 부끄럽게 여겨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자랑하기를 무척 좋아한다.
예화) 어느 변호사의 자랑 한 젊은 변호사가 개업을 하였다. 개업을 한 날 아침에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그러자 이 젊은 변호사는 재빨리 전화를 들고 “예. 회장님 그런 일이라면 저에게 맡기셔야죠”하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변호사는 지기에게는 많은 일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전화를 들고 한동안 신나게 말을 하더니마치고 자기를 찾아온 사람에게 “왜 오셨는냐”고 묻자 그는 말하기를 “오늘 전화를 연결하여 왔는데 전화를 연결하지 않고도 통화를 그렇게 잘하시냐”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랑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을 잘 그리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옷을 사면 자랑.-싸구려 옷은 부끄러워서 내놓지도 못함. 차-보석-자녀의 성적-집-조금만 좋은 것이 있으면 마구 자랑한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어도 싸고, 형편 없는 것 가짜면 부끄러워서 자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짜일 때 우리는 자랑을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바로 예수님와 그의 말을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차와 옷과 보석과 어느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좋은 것이다. 그분은 진리이며, 생명이며, 참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를 자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과 그의 말을 자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며, 예수님을 가짜라고, 싸구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신앙인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기쁘게 여기며 예수님을 만방에 알리며, 자랑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 성도의 삶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나의 중심으로 삼으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위해 어떤 고통도 이기며,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므로 영생의 축복의 누리며 만방에 예수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I. 자기를 부인하고-예수를 따르는 삶은 먼저 자기를 부인. 이것은 단지 자기의 욕망을 절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집착, 나의 안일함, 나의 이기심, 나의 자랑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제자들의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자기의 배를 버리고(생계수단), 자기의 부친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나섰습니다. 세리 마태는 그 돈 잘버는 직업을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서 바로 그의 본토, 친척, 고향집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사람이 가장 집착하는 것이 바로 직업과 그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직업을 몇 대씩 대를 물려가며 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일에 집착을 가지고 자기의 자녀도 그 일을 했으면 바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은 그의 가족과 고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향은 사람들이 가장 크게 집착하는 것입니다. 사할린 이나 연변에서 사는 우리의 동포들의 소원이 죽기전에 고향 땅을 밟아보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를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가 집착하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다가 병들어 누운 장모를 찾아가지도 못했으며, 예수님은 어떤 제자에게 죽은 자에게 가지 말고(장례를 치르러 가지 말고, 죽은 자의 시신을 보러 가지 말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곧 자기 부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 슈바이처 박사는 예수님를 따르기 위해 그의 자랑(박사학위-신학,의학,음악)를 버리고 아프리카 오지에서 예수님를 따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가말리엘문하, 로마의 시민권을 자랑하지 않고 예수님만 따르는 주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삶과 행동의 목표가 자기가 아니고 하나님 (예수님)이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자기는 없고 예수님이 있는 것입니니다.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말과 자기의 뜻과 자기의 행동은 없고 예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말과 예수님의 뜻과 예수님의 행동만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말로는 놀라운 고백을 했지만 그 자신을 부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는 길을 가로막으려 했습니다. 그 결과 책망듣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나를 부인하고 내 안에 예수님만 모시고 그만 따르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Ⅱ.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우리는 흔히 오해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생활 고, 근심을 우리는 자기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 십자가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자기의 삶에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성도의 문제는 십자가를 지려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생겨났습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지시고 영광은 제가 받겠습니다. 요즈음은 개척교회가 많이 문을 닫는 것이 현실입니다. 십자가를 지지않고 영광만을, 축복만을 받으려는 성도들이 대교회들의 교인들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대교회가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는 성도들 대교회로 몰려들어 잠자는 교인이 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성도 때문에 자기가 눈에 안띠고 그러니 봉사를 조금 덜해도 되고, 교회를 조금씩 빠져도 귀찮게 하는 사람 없어 편안함을 추구하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도 3D 현상이 있다고 합니다. 궂은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방일을 하지 않고, 나타나지 않는 교회학교 교사는 하지 않으려 합니다. 아니 이제 교회에 헌금만 많이하면 되지 하는 황금만능 사상이 판치고 있습니다. 비가 와서 교회 지하실에 물이 차도 어느 누구하나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지셨던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오늘 우리가 지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가 되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무엇인가 바로 인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사명이다. 예수님의 사명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일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당신이 사명의 십자가를 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바로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며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로, 권사, 집사, 교사, 회장, 임원, 재정담당, 선교담당.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며 예수님를 따라야 합니다. 또 성도에게 맡겨진 기본적인 사명(복음전파, 구제, 봉사)을 감당하며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오늘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주님이 지신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Ⅲ. 목숨을 바쳐서 (35)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님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그 목숨을 바치는 자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살리는 역사가 있습니다. 예화 ) '어느 어리석은 승객' 런던을 출발하여 뉴욕까지 가는 한 증기선이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우와 더불어 기관 고장으로 바다에 가라앉을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선장은 어떻게든 승객들을 살려보려고 애를 썼으나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저 구조대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배는 점점 밑으로 가라앉고 승객들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하얗게 질려가고 있을 때에, 유독 한 승객 만은 승객들 틈을 비집고 선실로 내려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선장이 그의 앞을 가로 막으며 "선실로 내려가면 위험합니다. 이 배는 점점 가라앉고 있어요. 구조대가 올테니 어서 갑판 위로 올라가세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승객은 선장의 만류에도 아랑곳 없이 막무가내였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비껴요. 나의 선실에는 내 전 재산을 담은 트렁크가 있어요. 난 그걸 버릴 수가 없어요. 그것은 내 생명만큼 귀한 것입니다." 승객은 선장을 밀쳐 버리고는 물이 들어오는 선실로 내려갔습니다. 잠시 후, 기적적으로 구조대가 도착하였습니다. 지나가던 배가 이 증기선의 구조요청 신호를 들었던 것입니다. 승객들은 구사 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것을 기뻐하며 부둥켜 안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잠시 후 모든 승객이 구조대의 보트로 건너갔습니다. 따라서 이제 어서 빨리 안전한 배로 옮겨 타는 일만 남았습니다. 선장은 선실로 트렁크를 가지러 간 승객을 위해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사정하였으나 휘몰아치는 폭풍우 때문에 도저히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이들이 탄 보우트가 안전한 곳까지 갔을 무렵, 선장은 아까 그 승객이 안간힘을 써가며 트렁크를 메고 갑판위로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배가 거의 가라앉을 무렵이었습니다. 삼상 12:21 “돌이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좇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 생명 없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 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돈을 위해, 명예를 위해, 권력을 위해, 쾌락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으므로 이 땅에서 생명이 길며, 사후에 영생의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바로 목숨을 아끼지 않는 길이며, 스데반, 바울, 베드로, 주의 다른 제자들, 또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이 그 길을 갔습니다. 우리 또한 그 길을 가는 성도가 되야 합니다.
Ⅳ. 나와 나의 말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자랑하며.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를 부끄러워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판자리에까지 갔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비자 하나가 당신도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 아니냐고 하자 예수님를 부인하고 도망하였습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를 판것은 예수님를 부끄럽게 여겨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자랑하기를 무척 좋아한다.
예화) 어느 변호사의 자랑 한 젊은 변호사가 개업을 하였다. 개업을 한 날 아침에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그러자 이 젊은 변호사는 재빨리 전화를 들고 “예. 회장님 그런 일이라면 저에게 맡기셔야죠”하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변호사는 지기에게는 많은 일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전화를 들고 한동안 신나게 말을 하더니마치고 자기를 찾아온 사람에게 “왜 오셨는냐”고 묻자 그는 말하기를 “오늘 전화를 연결하여 왔는데 전화를 연결하지 않고도 통화를 그렇게 잘하시냐”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랑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을 잘 그리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옷을 사면 자랑.-싸구려 옷은 부끄러워서 내놓지도 못함. 차-보석-자녀의 성적-집-조금만 좋은 것이 있으면 마구 자랑한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어도 싸고, 형편 없는 것 가짜면 부끄러워서 자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짜일 때 우리는 자랑을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바로 예수님와 그의 말을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차와 옷과 보석과 어느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좋은 것이다. 그분은 진리이며, 생명이며, 참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를 자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과 그의 말을 자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며, 예수님을 가짜라고, 싸구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신앙인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기쁘게 여기며 예수님을 만방에 알리며, 자랑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 성도의 삶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나의 중심으로 삼으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위해 어떤 고통도 이기며,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므로 영생의 축복의 누리며 만방에 예수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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