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애통하는 자의 축복 (마5:4)

본문

사람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기준에 의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서로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가치관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명예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혹자는 자신의 감정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까 성경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신앙인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해 그리스도를 자신의 인생에 가장 소중한 위치에 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인생의 기쁨과 슬픔 더 나가서 자신의 존재 가치 까지도 그리스도적 삶을 살고 있는가에서 평가를 가지며 그 삶에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그리스도를 떠나서 기쁨과 슬픔을 혹은 인생의 가치를 생각해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시작은 신앙 밖에서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의 삶은 신앙안에서 시작된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팔복 중 하나의 비밀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이제 우리는 애통하는 자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위로가 무슨 축복이 되는지 생각해 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I.애통하는 자는 누구인가 어떻게 인생에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상식은 이 사실에 대해서 결코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면 기쁨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며 그렇게 사는 것을 인생에 복이라고 받아 들이지 애통하는 인생을 축복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왜 이런 상식을 넘어서는 말씀을 주셨을까요 우리는 이제 이 비밀을 풀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인생의 가치를 배워야 하는 겸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여기서 말하는 애통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애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이 애통이라는 단어를 풀어보면 ‘상실에서 오는 심각한 아픔’ 이라는 말로 번역이 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직역하면 ‘죽음으로부터 오는 상실로 인한 심각한 아픔’ 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애통은 종말론적인 것으로 여겨야 되는 것입니다. 현 세대에서 고통을 받는 자들은 다음 세대 즉, 천국에서 평안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신앙적인 시각에서 이 애통함을 풀어 본다면 이 말은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만의 아픔이 아니라 이 세대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없고, 이 세대에서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의 아픔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인들은 삶의 가치를 세상사람들의 가치관에서 기쁨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아픔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의 욕망이 성취되지 못한데서 오는 애통함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애통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경멸합니다. 사람들은 아무런 가치 없는 것들로 고통하고 슬퍼하며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신앙으로 기뻐하고 그 안에서 인생의 가치를 누리며 그 신앙을 실현하기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의 참된 가치라고 증명할 수 있는 삶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도 역시 많은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모순처럼 입술로는 신앙을 말하면서 세상의 욕심을 누리지 못하는 아픔으로 애통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더 나가서 그 욕망을 채워달라고 하나님께 하소연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애통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결코 거짓일 수 없습니다. 애통하는 자들의 삶에는 놀라운 경험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도덕적 성결함이 자신의 생활을 지배하게 되는 거룩함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애통함이 없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는 교만인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인생은 가치가 있는 것이며 살만한 기쁨이 있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결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축복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Ⅱ.위로 받는 축복 이 세상에서 가치를 느끼지 못해 애통하는 자들을 위한 축복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위로” 라고 말씀 하십니다. 우리는 위로라는 단어로는 이 비밀을 이해하기가 조금은 어려울 것입니다. 헬라어로 이 단어를 풀어서 해석하게 되면 이러한 말로 직역이 됩니다. ‘응원하다.상쾌하게 하다.충격을 달래다.모순을 해소시키다.설명하다.평화롭게 하다.보상하다.’ 이러한 의미가 우리말로 “위로” 라는 말로 번역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의미를 생각해 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런 의미와 가치를 경험할 수 없는 신앙인들에게는 하나님이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시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모순을 풀어주며 이 세상에 혼란함으로 아무런 불안을 가지지 않도록 평화를 주실 것이며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에게 그 모든 것에 대한 보상을 주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으로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위로가 되는 축복이 임한다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신앙을 말하면서도 신앙을 모르는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앞에 겸손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 땅에서 이러한 이유로 어려움을 당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확인되는 축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이 세상에 요구되는 많은 욕망이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고 산다면 그것은 신앙을 상실했기 때문에 오는 절망인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주님의 말씀 가운데 내어놓을 용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어디에 문제가 있었는지를 정직하게 발견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은 약속을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분의 풍성함을 경험하지 못하는 신앙으로 산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앞에 나오지 않은 어떤 형태의 교만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좀 더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변화를 기대한다면 용기있게 자신을 부인하는 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묶은 사람은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풀 수 있는 사람도 자신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말씀 앞에 겸손하게 내어놓을 때 여러분은 계시록 3장20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르니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은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야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문을 열지 못하는 어리석음! 더나가서는 문을 열어 본적이 한번도 없기에 열고 싶어도 여는 법을 잃어 버린 사람들! 우리는어떤 사람들입니까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의 인격속에 정중히 받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그리고 우리의 부족함을 주님께 시인하며 자신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수치도 비겁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주님을 경험하는 은혜의 순간인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참으로 이 세상에 대해서 애통하는 사람이 되기를 권면하며 주님이 약속하신 위로의 축복을 경험하시기를 우리 함께 이 시간에 자신의 인생을 다시한번 말씀 가운데서 결단하는 시간이 되도록 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935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