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계단 (요6,53-57)
본문
요한복음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는 창조주가 되시며 곧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4이하에 보면 五餠二魚(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큰 무리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빌립은 이 사람들을 조금씩 먹인다고 해도 200데나리온을 가지고도 부족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계산이 아주 빠른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능력을 생각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때 안드레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진 어린이를 데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수께서 그것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에 나눠주시니 그곳에 있던 오천명 이상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무리들은 이 놀라운 일을 경험하고는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신앙의 몇 단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물질적 조건에 기인한 신앙 본문 26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른 까닭이 이적을 본 까닭이라면 차라리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배불리 먹은 까닭이었습니다. 신앙의 초보적 단계는 물질적 조건의 단계입니다. 어떤 사람은 상업을 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을 하기 위해 교회에 나옵니다. 군대에서 보면 지휘관이 신자이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2. 이적을 보고 믿는 신앙 하나님의 役事(역사)하심을 알고 믿는 신앙입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
2)라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이적을 행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重生(중생,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해하지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적은 대부분 사랑의 이적이었습니다. 주로 병자들을 고치는데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자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욕망 중심입니다. 열두 명의 문둥병자가 동시에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지만 그 중에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사마리아인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적 때문에 믿는 신앙은 아주 미흡한 신앙의 단계입니다. 우리는 이적 때문에 믿는 신앙의 단계에서 더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3. 영생의 말씀(성경)에 입각한 신앙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게 된 동기는 豊魚(풍어)의 이적을 보고 믿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밤이 맟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마리도 잡지 못한 채 아침을 맞았고 허탈하게 그물을 씻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던진 결과 엄청난 수확을 올렸고, 그 순간에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무서워 말라 네가 후로는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시며 그를 제자 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이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6:66168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 이 신앙은 혹 넘어질 수 있는 사람에 뿌리를 둔 것도 아니요 어떤 정신과학이나 자연과학의 가변적 지식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둔 신앙이올시다. 우리는 교회에 참석을 권면합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 중에 성경을 강론할 때 케리그마 즉 하나님의 산 현재의 말씀을 교회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즉 앉은뱅이가 일어남 같이, 벙어리가 말하고 귀머거리가 듣는 것 같이, 우리 심령의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에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의 산 말씀을 나타내는데 있습니다.
4. 말씀의 핵심을 體得(체득)하는 신앙 즉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데까지 들어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내가 죄 때문에 흘려야 할 피를 대신 흘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죄를 자각하고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듯이 義를 사모할 때 예수의 피는 참된 음료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도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5절)라고 말씀했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54절)라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능력을 나타내신 직후에 권위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一見 이 말씀은 끔찍한 것 같지마는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깊은 영적 관계를 표현함에 이 이상의 말을 가질 수 없다고 봅니다. 生에 있어서 피는 중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문 혹은 문벌은 인물을 평가할 때 중요시되는 것입니다. 특히 결혼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멘델의 유전법칙은 챨스 다윈의 진화론을 깨뜨리고 각각 종류대로 대를 잇게 하고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聖者(성자)와 훌륭한 인물을 내는 가문은 대개 다 좋은 인재로 구성되어 있고 범인과 죄인을 내는 가문은 선조 때부터 그 家系(가계) 즉 혈통이 대개 나쁜 사람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동물의 피를 먹는 것을 금한 것은 사람이 동물 같은 피의 성질을 닮을 것 같아서 경계한 것이라고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피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제가 잘 아는 어느 목사님은 6.25사변 때 교인들과 같이 한강 철교를 건너 피난하는데, 철교를 건너자마자 철교가 폭파되었습니다. 미처 건너지 못한 자기 아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아무개야!하고 자기 아들을 부르는데 너무도 크게 불렀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피가 통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뒤에 목사님은 신자들도 같은 그리스도의 피가 통한 형제인데 교우들이여!하고 부르지 못하고 육신의 혈육만을 불렀던 것에 대해 매우 부끄럽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장마가 지면 큰 소가 죽은 것등 가축들이 죽은 것이 떠내려오고 책상과 심지어는 집 대들보까지 떠내려옵니다. 그러나 떠내려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능히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주 작은 물고기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 속에는 생명의 피가 뛰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죄악이 범람할 때 왜곡된 사조와 유행에 모든 사람들이 흘러 내려가는 수가 있습니다. 사치, 정욕, 음란, 사기 등의 물결은 구비 치며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흘러내려 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약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피를 먹는 자는 죄를 이기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물질적 조건에 기인한 신앙 본문 26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른 까닭이 이적을 본 까닭이라면 차라리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배불리 먹은 까닭이었습니다. 신앙의 초보적 단계는 물질적 조건의 단계입니다. 어떤 사람은 상업을 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을 하기 위해 교회에 나옵니다. 군대에서 보면 지휘관이 신자이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2. 이적을 보고 믿는 신앙 하나님의 役事(역사)하심을 알고 믿는 신앙입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
2)라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이적을 행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重生(중생,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해하지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적은 대부분 사랑의 이적이었습니다. 주로 병자들을 고치는데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자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욕망 중심입니다. 열두 명의 문둥병자가 동시에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지만 그 중에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사마리아인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적 때문에 믿는 신앙은 아주 미흡한 신앙의 단계입니다. 우리는 이적 때문에 믿는 신앙의 단계에서 더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3. 영생의 말씀(성경)에 입각한 신앙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게 된 동기는 豊魚(풍어)의 이적을 보고 믿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밤이 맟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마리도 잡지 못한 채 아침을 맞았고 허탈하게 그물을 씻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던진 결과 엄청난 수확을 올렸고, 그 순간에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무서워 말라 네가 후로는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시며 그를 제자 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이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6:66168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 이 신앙은 혹 넘어질 수 있는 사람에 뿌리를 둔 것도 아니요 어떤 정신과학이나 자연과학의 가변적 지식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둔 신앙이올시다. 우리는 교회에 참석을 권면합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 중에 성경을 강론할 때 케리그마 즉 하나님의 산 현재의 말씀을 교회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즉 앉은뱅이가 일어남 같이, 벙어리가 말하고 귀머거리가 듣는 것 같이, 우리 심령의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에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의 산 말씀을 나타내는데 있습니다.
4. 말씀의 핵심을 體得(체득)하는 신앙 즉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데까지 들어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내가 죄 때문에 흘려야 할 피를 대신 흘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죄를 자각하고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듯이 義를 사모할 때 예수의 피는 참된 음료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도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5절)라고 말씀했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54절)라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능력을 나타내신 직후에 권위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一見 이 말씀은 끔찍한 것 같지마는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깊은 영적 관계를 표현함에 이 이상의 말을 가질 수 없다고 봅니다. 生에 있어서 피는 중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문 혹은 문벌은 인물을 평가할 때 중요시되는 것입니다. 특히 결혼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멘델의 유전법칙은 챨스 다윈의 진화론을 깨뜨리고 각각 종류대로 대를 잇게 하고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聖者(성자)와 훌륭한 인물을 내는 가문은 대개 다 좋은 인재로 구성되어 있고 범인과 죄인을 내는 가문은 선조 때부터 그 家系(가계) 즉 혈통이 대개 나쁜 사람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동물의 피를 먹는 것을 금한 것은 사람이 동물 같은 피의 성질을 닮을 것 같아서 경계한 것이라고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피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제가 잘 아는 어느 목사님은 6.25사변 때 교인들과 같이 한강 철교를 건너 피난하는데, 철교를 건너자마자 철교가 폭파되었습니다. 미처 건너지 못한 자기 아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아무개야!하고 자기 아들을 부르는데 너무도 크게 불렀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피가 통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뒤에 목사님은 신자들도 같은 그리스도의 피가 통한 형제인데 교우들이여!하고 부르지 못하고 육신의 혈육만을 불렀던 것에 대해 매우 부끄럽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장마가 지면 큰 소가 죽은 것등 가축들이 죽은 것이 떠내려오고 책상과 심지어는 집 대들보까지 떠내려옵니다. 그러나 떠내려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능히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주 작은 물고기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 속에는 생명의 피가 뛰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죄악이 범람할 때 왜곡된 사조와 유행에 모든 사람들이 흘러 내려가는 수가 있습니다. 사치, 정욕, 음란, 사기 등의 물결은 구비 치며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흘러내려 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약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피를 먹는 자는 죄를 이기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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