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요17:17)
본문
거룩함과 진리는 연결되는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다시말하면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거룩해지려면 진리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뜻, 즉 진리를 발견해서 그것을 신자의 생활 속에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 설교만 듣는다고 신자는 거룩해질 수는 없다. 예배에 참석한다고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다.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다. 거룩해 지는 방법은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시119:9-10' 진리를 깨닫고 , 그것을 삶 속에 실천함으로 교회와 성도는 거룩해질 수 있다. 진리란 무엇인가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크게 두가지다.
1) 갈2:5,14에 나오는 복음이 진리다.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2:
5'2) 요14:6에 나오는 말씀대로 예수님 자신이 진리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성경은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복음의 말씀'이 바로 진리이이다.
왜냐하면 이 복음의 말씀 속에 인간에게 꼭 필요한 근본원리가 다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며, 그의 현재 위치가 무엇이며. 왜 인간이 살며, 불행해지는 이유는 무엇이며, 행복해지는 비결은 무엇인가‘하는 근본적인 문제와 그 해결책들이 성경 속에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죄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또 성경이 다른 책처럼 추상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역사속에서 구체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기록한 책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진리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바로 진리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는 계시이고, 히10:19-20의 말씀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을 우리 앞에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성경 안에서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예수님를 만나고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계시이다.
진리에 대한 교회와 성도의 태도. 먼저 교회와 성도들은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그 다음은 진리를 소유해야 하며, 그 다음은 진리를 따라 살아야하고, 그 다음은 진리를 나누어 주면서 살아야 한다. 진리를 깨닫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요18장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의 재판자리에서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묻는다. 이때 예수님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왔다고 답변한다. 그 때 빌라도가 38절에서 보듯 "진리가 무엇이냐"는 유명한 질문을 하지만 그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버린다. 문제는 사람들이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데 있다. 그 이유는 심각하게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또 심각하게 진리를 추구한다 해도 그것을 인내심을 가지고 찾지 않기 때문이다.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의 원리를 이해하려면 3년이나 걸린다고 합니다.
하물며 진리 중의 진리인 예수님을 깨닫고 추구하는데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과연 얼마만큼의 시간과 물질을 바치는가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는데는 시간만이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믿음이 더 중요하다. 믿음만 있으면 금방 깨달을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의 진리를 추구해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복음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을 가져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어야 한다. 신자는 믿음과 행실과 삶에 관한 모든 진리가 성경 안에 있는 것을 믿어야 한다. 바로 그 순간에 진리를 깨닫게 된다. 불교의 해탈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믿음으로 깨닫는 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진리이시고, 우리의 주님이시고,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전부인 것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내용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불교처럼 깨달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진리를 '소유해야'한다. 진리를 소유한다는 말은 진리안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이 진리안에 들어가는 일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전적으로내어맡길 때 성도는 이 진리의 사람이 된다. 다음은 진리를 실천하는 일이다. 성경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였다. 진리는 믿는 것이지만 또한 사는 것이다. 우리는 과학적 지식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을 생활에 적용한다. 전기불이 좋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을 이용해서 방도 밝히고, 공장도 돌아가게 하고, 텔레비젼도 보고, 에어콘도 돌아가게 한다. 이와같이 기독교의 진리는 믿는 것이요 또한 사는 것이다. 진리를 따라 사는 일 여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이 진리는 나누어 주어야 한다. 바로 그럴 때에 진리는 살아서 움직이고, 우리교회와 신자는 보람을 느끼고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1. 삶의 표준을 진리의 말씀, 즉 성경 위에 두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의 문제점은 가치관이 무너졌다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표준이 무너진 것이다. 따라서 우리 교회와 성도는 모든 표준을 진리인 말씀과 예수님께 두어야 한다.
2. 영적으로 산다는 것이다. 기독교적 문화를 창조해가면서, 하나님이 원하는 삶의 스타일대로 기독교의 문화를 창조할 때 교회와 신자는 참 기쁨을 소유할 수 있다. 거기에서 참 보람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은 세상의 표준과 가치를 따르고, 세상의 삶의 형식대로 살고 있다.
3. 주님이 오실 때까지 빛과 소금처럼 사는 것이다. 빛은 적극적, 소금은 소극적
1) 빛된 삶의 모델 가. 빛은 환하게 밝혀주고 드러내는 일을 한다. 물론 더러운 것도 드러낸다. 그래야 '씻어야겠구나, 소제해야지'하는 마음을 갖게 해서 깨끗하게 하도록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빛은 좋은 것을 드러내는 일을 한다.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거룩함을 드러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빛된 삶이다. 빛된 삶이란 어두움 속에서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여 참빛 되신 주님에게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나. 빛은 생명을 준다. 모든 생명은 빛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식물은 물론이고 동물도 빛이 없다면 살 수 없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사람이 영적으로 살려면 빛을 보아야하고, 빛속에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빛부터 창조하신 것도 빛 없이는 생명이 살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빛은 하나님의 상징이다. 빛은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열매도 맺게 합니다.다. 빛은 인생의 방향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무엇보다도 빛은 우리 인생으로 하여금 어디로 갈 것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바닷가에 가면 등대가 있다. 어쩌다 배가 지나가는 외진 곳에서 밤새도록 빛을 비쳐준다. 이 등대 때문에 배는 파선되지 않고 무사히 항해를 할 수 있다. 오늘 이 시대는 물질 문명은 한 없이 발달했지만 영적으로 보면 어두운 세상이다. 그 속에서 우리 성도들만이, 교회만이 참 빛을 던져 주는 것이다.
2) 소금된 삶의 모델 지금은 소금은 흔하지만 옛날에는 대단히 귀했다. 그래서 로마군인들은 소금으로 봉급을 주었다. 영어의 봉급(salary)이란 말은 소금(salt )이란 말에서 좀더 정확히 말하면 '살라리움'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 다시말하면 물물교환을 하던 시대에 소금은 화폐의 역활을 하였던 것이다. 또 어떤 곳에서는 소금 한 자루와 사람 한명을 맞바구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소금을 구하기 위해서 딸을 주고 소금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음식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어 짜게 먹기 때문에 고혈압환자가 많다. 그렇다고 소금을 전혀 먹지 않으면 오래 살 수 없다. 알라스카의 에스키모인들이 그런 예이다. 소금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소금의 용도는 14,000가지나 된다고 한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소금의 역활을 크게 두가지로 말하고 있다. 가. 부패를 방지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옛날부터 물건의 변질을 막고, 부패를 막기위해 소금을 사용했다. 나. 소금은 맛을 낸다. 아무리 좋은 쇠고기라도 그냥 먹으면 맛이 전혀 없다. 그러나 소금을 찍어서 먹으면 제맛이 난다. 뿐만 아니라 소금을 전혀 넣지 않으면 소화도 잘안된다고 한다. 즉 소금된 삶을 살지 않으면 인생의 참 맛을 모르며 사는 것이다. 소금 없는 음식처럼 싱겁게 사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교회와 성도로서의 참 맛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불신자들은 생명을 살리는 그 맛, 주님과 함께 인생길을 걸어가는 그 맛을 모른다. 이것을 우리는 간증을 통하여 보여주어야 한다. 진리를 따라 살 때 오는 축복
1. 진리는 교회와 성도에게 힘을 준다. 진리는 우리의 허리띠라고 하였다.(엡6:14)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사탄 마귀와 영적으로 전쟁을 하고 있다. 이 전쟁에서 가장 기본적인 무기가 바로 진리의 허리띠이다. 사람의 힘은 허리에서 나온다. 마찬가지로 진리는 우리에게 힘을 준다. 또 이 허리띠는 모든 것을 연결시켜주는 고리 역활을 한다. 군인들을 보면 허리띠에 수류탄을 달고, 칼을 꼽고, 수통을 달고, 모든 것을 붙들어 매는 역활을 한다. 바로 진리가 우리의 영적전쟁에서 이런 역활을 한다.
2. 진리를 따라 살면 교회와 성도가 거룩해진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수도처럼 냄새가 나지만 그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진리라는 '영혼의 거울'은 모든 허물을 보게 해준다. 그뿐 아니다. 이 진리의 말씀안에서 성령님께서 계셔서 역사하신다. 성령님은 거룩한 영이시며, 또한 거룩하게 하는 영이시다. 그가 진리인 성경안에서 성경과 함께 역사하신다.
3. 진리를 따라 살면 자유롭게 된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자유를 얻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래서 대학생과 경찰이 맞서기도 했고, 심지어는 그 고귀한 생명을 버리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자유는 고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토록 고귀한 자유를 얻는 비결이 성경에 나온다.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인류의 역사를 볼 때 인간이 과학적인 진리를 모를 때에는 산에는 산신이 있다고 절하고 돌에는 돌신이 있다고 절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이 이런 우상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이 무지함으로 종노릇하던 모든 것에서 진리를 깨닫게 됨으로 참 자유함을 얻었다.
4. 진리를 따라 살면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된다.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보람과 의미의 문제이다. 이것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알 때 생겨난다. 과학자들이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피땀 흘리며 연구하는 것을 볼 때가 종종 있다.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연구에 전념한다. 무엇 때문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이다. 진리를 발견할 때에 인생의 참 보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리를 농담으로 여긴다. 소돔성을 멸망시킬 때 하나님께서 롯에게 먼저 경고하셨다.
그런데 창19:14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기더라"고 하였다. 이것이 문제이다. 진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농담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5. 진리는 인간을 거듭나게 한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 베소서 4:2
4' 다시 말하면 인간은 진리를 통하여 새롭게 거듭난다는 말이다. 그렇다 인간은 복음의 진리를 통하여 은혜의 세계에 살게 된다. 복음의 진리를 모르면 그 사람은 어두움과 죄악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다.
1) 갈2:5,14에 나오는 복음이 진리다.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2:
5'2) 요14:6에 나오는 말씀대로 예수님 자신이 진리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성경은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복음의 말씀'이 바로 진리이이다.
왜냐하면 이 복음의 말씀 속에 인간에게 꼭 필요한 근본원리가 다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며, 그의 현재 위치가 무엇이며. 왜 인간이 살며, 불행해지는 이유는 무엇이며, 행복해지는 비결은 무엇인가‘하는 근본적인 문제와 그 해결책들이 성경 속에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죄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또 성경이 다른 책처럼 추상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역사속에서 구체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기록한 책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진리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바로 진리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는 계시이고, 히10:19-20의 말씀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을 우리 앞에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성경 안에서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예수님를 만나고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계시이다.
진리에 대한 교회와 성도의 태도. 먼저 교회와 성도들은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그 다음은 진리를 소유해야 하며, 그 다음은 진리를 따라 살아야하고, 그 다음은 진리를 나누어 주면서 살아야 한다. 진리를 깨닫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요18장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의 재판자리에서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묻는다. 이때 예수님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왔다고 답변한다. 그 때 빌라도가 38절에서 보듯 "진리가 무엇이냐"는 유명한 질문을 하지만 그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버린다. 문제는 사람들이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데 있다. 그 이유는 심각하게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또 심각하게 진리를 추구한다 해도 그것을 인내심을 가지고 찾지 않기 때문이다.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의 원리를 이해하려면 3년이나 걸린다고 합니다.
하물며 진리 중의 진리인 예수님을 깨닫고 추구하는데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과연 얼마만큼의 시간과 물질을 바치는가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는데는 시간만이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믿음이 더 중요하다. 믿음만 있으면 금방 깨달을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의 진리를 추구해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복음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을 가져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어야 한다. 신자는 믿음과 행실과 삶에 관한 모든 진리가 성경 안에 있는 것을 믿어야 한다. 바로 그 순간에 진리를 깨닫게 된다. 불교의 해탈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믿음으로 깨닫는 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진리이시고, 우리의 주님이시고,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전부인 것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내용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불교처럼 깨달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진리를 '소유해야'한다. 진리를 소유한다는 말은 진리안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이 진리안에 들어가는 일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전적으로내어맡길 때 성도는 이 진리의 사람이 된다. 다음은 진리를 실천하는 일이다. 성경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였다. 진리는 믿는 것이지만 또한 사는 것이다. 우리는 과학적 지식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을 생활에 적용한다. 전기불이 좋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을 이용해서 방도 밝히고, 공장도 돌아가게 하고, 텔레비젼도 보고, 에어콘도 돌아가게 한다. 이와같이 기독교의 진리는 믿는 것이요 또한 사는 것이다. 진리를 따라 사는 일 여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이 진리는 나누어 주어야 한다. 바로 그럴 때에 진리는 살아서 움직이고, 우리교회와 신자는 보람을 느끼고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1. 삶의 표준을 진리의 말씀, 즉 성경 위에 두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의 문제점은 가치관이 무너졌다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표준이 무너진 것이다. 따라서 우리 교회와 성도는 모든 표준을 진리인 말씀과 예수님께 두어야 한다.
2. 영적으로 산다는 것이다. 기독교적 문화를 창조해가면서, 하나님이 원하는 삶의 스타일대로 기독교의 문화를 창조할 때 교회와 신자는 참 기쁨을 소유할 수 있다. 거기에서 참 보람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은 세상의 표준과 가치를 따르고, 세상의 삶의 형식대로 살고 있다.
3. 주님이 오실 때까지 빛과 소금처럼 사는 것이다. 빛은 적극적, 소금은 소극적
1) 빛된 삶의 모델 가. 빛은 환하게 밝혀주고 드러내는 일을 한다. 물론 더러운 것도 드러낸다. 그래야 '씻어야겠구나, 소제해야지'하는 마음을 갖게 해서 깨끗하게 하도록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빛은 좋은 것을 드러내는 일을 한다.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거룩함을 드러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빛된 삶이다. 빛된 삶이란 어두움 속에서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여 참빛 되신 주님에게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나. 빛은 생명을 준다. 모든 생명은 빛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식물은 물론이고 동물도 빛이 없다면 살 수 없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사람이 영적으로 살려면 빛을 보아야하고, 빛속에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빛부터 창조하신 것도 빛 없이는 생명이 살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빛은 하나님의 상징이다. 빛은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열매도 맺게 합니다.다. 빛은 인생의 방향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무엇보다도 빛은 우리 인생으로 하여금 어디로 갈 것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바닷가에 가면 등대가 있다. 어쩌다 배가 지나가는 외진 곳에서 밤새도록 빛을 비쳐준다. 이 등대 때문에 배는 파선되지 않고 무사히 항해를 할 수 있다. 오늘 이 시대는 물질 문명은 한 없이 발달했지만 영적으로 보면 어두운 세상이다. 그 속에서 우리 성도들만이, 교회만이 참 빛을 던져 주는 것이다.
2) 소금된 삶의 모델 지금은 소금은 흔하지만 옛날에는 대단히 귀했다. 그래서 로마군인들은 소금으로 봉급을 주었다. 영어의 봉급(salary)이란 말은 소금(salt )이란 말에서 좀더 정확히 말하면 '살라리움'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 다시말하면 물물교환을 하던 시대에 소금은 화폐의 역활을 하였던 것이다. 또 어떤 곳에서는 소금 한 자루와 사람 한명을 맞바구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소금을 구하기 위해서 딸을 주고 소금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음식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어 짜게 먹기 때문에 고혈압환자가 많다. 그렇다고 소금을 전혀 먹지 않으면 오래 살 수 없다. 알라스카의 에스키모인들이 그런 예이다. 소금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소금의 용도는 14,000가지나 된다고 한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소금의 역활을 크게 두가지로 말하고 있다. 가. 부패를 방지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옛날부터 물건의 변질을 막고, 부패를 막기위해 소금을 사용했다. 나. 소금은 맛을 낸다. 아무리 좋은 쇠고기라도 그냥 먹으면 맛이 전혀 없다. 그러나 소금을 찍어서 먹으면 제맛이 난다. 뿐만 아니라 소금을 전혀 넣지 않으면 소화도 잘안된다고 한다. 즉 소금된 삶을 살지 않으면 인생의 참 맛을 모르며 사는 것이다. 소금 없는 음식처럼 싱겁게 사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교회와 성도로서의 참 맛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불신자들은 생명을 살리는 그 맛, 주님과 함께 인생길을 걸어가는 그 맛을 모른다. 이것을 우리는 간증을 통하여 보여주어야 한다. 진리를 따라 살 때 오는 축복
1. 진리는 교회와 성도에게 힘을 준다. 진리는 우리의 허리띠라고 하였다.(엡6:14)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사탄 마귀와 영적으로 전쟁을 하고 있다. 이 전쟁에서 가장 기본적인 무기가 바로 진리의 허리띠이다. 사람의 힘은 허리에서 나온다. 마찬가지로 진리는 우리에게 힘을 준다. 또 이 허리띠는 모든 것을 연결시켜주는 고리 역활을 한다. 군인들을 보면 허리띠에 수류탄을 달고, 칼을 꼽고, 수통을 달고, 모든 것을 붙들어 매는 역활을 한다. 바로 진리가 우리의 영적전쟁에서 이런 역활을 한다.
2. 진리를 따라 살면 교회와 성도가 거룩해진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수도처럼 냄새가 나지만 그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진리라는 '영혼의 거울'은 모든 허물을 보게 해준다. 그뿐 아니다. 이 진리의 말씀안에서 성령님께서 계셔서 역사하신다. 성령님은 거룩한 영이시며, 또한 거룩하게 하는 영이시다. 그가 진리인 성경안에서 성경과 함께 역사하신다.
3. 진리를 따라 살면 자유롭게 된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자유를 얻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래서 대학생과 경찰이 맞서기도 했고, 심지어는 그 고귀한 생명을 버리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자유는 고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토록 고귀한 자유를 얻는 비결이 성경에 나온다.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인류의 역사를 볼 때 인간이 과학적인 진리를 모를 때에는 산에는 산신이 있다고 절하고 돌에는 돌신이 있다고 절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이 이런 우상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이 무지함으로 종노릇하던 모든 것에서 진리를 깨닫게 됨으로 참 자유함을 얻었다.
4. 진리를 따라 살면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된다.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보람과 의미의 문제이다. 이것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알 때 생겨난다. 과학자들이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피땀 흘리며 연구하는 것을 볼 때가 종종 있다.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연구에 전념한다. 무엇 때문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이다. 진리를 발견할 때에 인생의 참 보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리를 농담으로 여긴다. 소돔성을 멸망시킬 때 하나님께서 롯에게 먼저 경고하셨다.
그런데 창19:14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기더라"고 하였다. 이것이 문제이다. 진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농담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5. 진리는 인간을 거듭나게 한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 베소서 4:2
4' 다시 말하면 인간은 진리를 통하여 새롭게 거듭난다는 말이다. 그렇다 인간은 복음의 진리를 통하여 은혜의 세계에 살게 된다. 복음의 진리를 모르면 그 사람은 어두움과 죄악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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