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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잔을 마실 자 (마20:20-23)

본문

기독교의 절기는 성탄절과 부활절을 중심한 양대 절기로 나뉘어 성탄절 전 40일 기간을 강림절이라고 하고, 부활절 전 40일을 사순절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이요 다음 주일은 종려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절은 종려주일부터 한 주간을 말합니다. 수난절의 금요일은 성금요일(聖金曜日)이라 하여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각가지 행사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세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베드로의 신앙고백 직후에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 16:21).
둘째로 변화산 사건 후에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마 17:22,23).
셋째로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마 20:18,19).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마 20:28). 지금 한국에서는 소위 국민의 공복이라 자처한 고관들의 재산공개로 인한 공직자들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들이 날이 갈수록 팽배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썩고 부패한 부분을 보는 국민은 분노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사회는 극단의 냉소주의가 번지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권위는 무너지고 있고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말도 냉소적으로 받아들이고, 가정에서는 부모의 말씀에 대해 냉소적으로 반응하고, 부부간에도 친구간에도 이런 냉소주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말씀에 대해서도 불신과 냉소의 반응을 보입니다. 지도자들의 부도덕과 부패를 보면서 사람들은 이러한 냉소적 분위기에 휩싸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풍토 속에서 누가 어떤 말을 해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겠습니까 성경에도 종종 사람들의 냉소를 받을만한 일들이 있습니다. 바로 본문의 내용이 그렇습니다. 세배대의 두 아들의 어머니인 요한과 야고보의 모친이 바로 그런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고하시고, 무거운 심정에 젖어 있을 때 세배대의 아내는 자기의 아들들인 요한과 야고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두 아들의 출세를 청탁한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제자들이 얼마나 비난하고 냉소했겠습니까 요한의 어머니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자매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일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혈연이나 지연관계로 그런 청탁을 했다면 얼마나 많은 세상 사람들의 냉소를 받아야 했겠습니까 오늘날 한국사회의 타락 가운데 어떤 부분은 바로 이런 혈연,지연,학연 그리고 권력관계로 얽히고 설켜있는 데서 온 것입니다.
1. 이 여인에게는 자기의 두 아들을 출세시켜 예수님의 좌우 재상이 되게 하여 예수님과 천국을 독점하려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사람이 시험을 받아 욕심에 이끌리면 미혹된다고 했습니다(약 1:14).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에 이른다고 했으니 욕심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약 1:15). 인간의 본성에 욕망이 있습니다. 욕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욕망을 잘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욕망을 승화시켜 거룩하게 발전시키면 신령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망을 저속하게 발전시키면 육에 속한 세속적 사람이 됩니다. 욕망을 위로 발전시키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품을 갖게 되지만, 이 욕망이 세상과 땅에 속한 것으로 향하면 탐욕주의가 됩니다. 이 욕망을 주님을 위해 승화시키면 주님이 쓰시는 의(義)의 병기가 되지만, 자기를 위해 키우면 정욕과 불의의 병기가 됩니다. 이 욕망을 사용함에 따라 사람은,파스칼이 말한 바와 같이 천사도 되고 악마도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잔에 참여할 자는 이 땅의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2. 요한과 야고보는 주님의 잔을 마실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22절). 요한과 야고보는 땅의 욕망을 버릴 때 주님의 잔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이 두 사람은 모두 주님의 잔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세 사람의 순교자가 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막 6:27-29)과 스데반(행 7:59,60)과 요한의 형제 야고보(행 12:2)입니다. 세례 요한은 선지자의 대표요, 스데반은 평신도의 대표요, 야고보는 사도의 대표입니다. 이 야고보는 사도의 대표로서 사도들 중 최초의 순교의 잔을 마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사도들 중 최후의 생존자로 남아 요한계시록을 남기고(계 1장) 주님의 고난의 잔을 마셨습니다.
3. 그러면 주님이 마신 잔은 어떤 잔입니까 적어도 우리 주님이 마시는 잔에는 여섯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1) 주님의 잔은 순종의 잔입니다 “조금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이것이 겟세마네에서 주님께서 드리신 기도의 요점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종의 잔입니다.
2) 이 잔은 고난의 잔입니다. 주님은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히 13:12). 마태복음 27:27-50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고난받으시는 장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총독의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우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손에 갈대를 드리우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희롱하였습니다. 군병들은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찌어다”하며 예수님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주님의 머리를 쳤습니다(마 27:29,30). 희롱을 다한 후에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났습니다. 골고다에 이르러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지옥의 고통까지 맛보셨습니다.
3) 주님의 잔은 십자가의 죽음의 잔입니다(마 27:35) 십자가의 사형은 인간 최악의 처형입니다.
그러므로 살인자와 강도와 국가반역자를 십자가형으로 처형했습니다. 죽은 후에는 장사 지내지도 않고 처형한 그대로 방치하여 짐승의 밥이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골고다의 독수리를 가장 잔인한 날짐승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의 잔을 마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4) 이 잔은 헌신의 잔입니다(요 3;16:롬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5) 이 잔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려고 흘리신 피의 잔입니다. 피가 뿌려 곳에는 생명이 생겨나는 법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여 성찬식 때 잔을 받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그 잔을 마십니다(고전 11:26).
6) 이 잔은 축복의 잔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옛말에도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했습니다. 이 약속된 마지막 잔을 생각하면서 순종의 잔, 고난의 잔, 십자가의 죽음의 잔, 헌신의 잔 그리고 피의 잔도 믿음으로 받고 인내할 때 축복의 잔이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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