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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이르는 병 (막5:25-34)

본문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의 전도생활 중 유대 각지에 다니시며 전도하시다가 가버나움에 가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병을 고치려고 가버나움으로 가시는 도중에 발생한 우발적 사건입니다. 특별히 이 시간에는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의 병고침 받는 사건을 배경으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모든 사람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생은 죽음에로의 실존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인간은 매일 죽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본문에 언급된 십이년을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인의 처절한 모습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인생의 절망적인 사건이 희망적인 사건으로 변했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의 실존이 구원에로의 실존이 되었다. 본문을 통해 몇 가지 사실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1. 이 여인은 절망적인 실존 앞에 서있습니다. 이 여인이 앓고 있는 병 자체가 절망적인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혈루병은 그 자체가 죽을 수 박에 없는 난치병으로서 아직도 의학적으로 잘 규명되지 않은 병입니다. 인체내의 혈액이 유출되어 마지막에는 피가 말라 창백하게 죽는 병입니다. 살아있지만 벌써 죽음이 판명되어있는 시한부 인생입니다. 고로 레위기 15;25-30에서는 이런 사람은 성전에 출입도 금하고 부정하다하여 그를 만지지도 못하게 했고 회중 앞에 나서지도 못하게 했으며 누구도 그를 만나기를 꺼리고 남편에게서는 이혼을 당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망이 전혀 없는 시한부 인생이었습니다. 12년 동안 고생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12년이란 매우 오랜 기간을 의미합니다. 유대의 만수(滿數)를 상징한 것으로 이제는 병에 지쳐서 죽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그 여인은 많은 의원에게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예로부터 악한 병일수록 고치는 방법이 고생스럽고 미신적입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이 병을 고치는 데에는 여섯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는데, 그 여인에게는 이 모든 방법들이 총동원된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학질을 앓으면 깜짝 놀라게 하거나, 무섭게 하거나, 가마니에 말아 소가 지나가게 하거나, 잠 잘 때 수건에 물을 묻혀 뱀처럼 지나가게 하는 방법을 썼습니다. 그 여인은 있는 재산도 다 허비했습니다. 몸이 약한 사람일 수록 삶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의 건강을 위해서는 아까운 것도 없습니다. 아마 이 여인은 이 병에 걸리자 남편에게 이혼을 당했고 그 남편에게서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 재산들은 남편 대신 받은 소중한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께 올 때 뒤로 와서 옷깃을 만진 사실로 보아 본래는 가풍이 있는 좋은 집안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편도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상당한 재산을 여인에게 주어 병도 고치고 평생을 먹고살라고 재산을 나누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재산을 다 탕진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효험이 없었습니다. 백약이 무효라는 말은 바로 이 여인을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지상에서 제일 불행한 것은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려 있는 상태일 것입니다. 약이 없는 병이란 난치병이 아니라 불치의 병입니다. 인공심장을 가슴 속에 넣고 살아가는 어느 여집사님이 제게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나는 얼마 못살고 죽을 거예요. 내 심장이 점점 멎어가고 있어요. 내 남편이 불쌍하고 내 자식들이 불쌍해요” 이 불쌍한 인생들의 병을 처방하고 이 죽음에 이르는 무서운 병을 고쳐줄 자가 누구입니까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2.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최악의 상태를 최선의 기회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특수은총이라고 합니다. 어두움을 빛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환난을 축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태양의 그림자를 바꾸시고, 지계(地界)의 한계를 바꾸시고, 역사의 표면과 이면을 바꾸시는 하나님은 죽어 가는 한 여인의 죽음을 생명으로 바꿔 놓으시고 절망적인 한 여인의 비애와 슬픔을 환희와 기쁨과 찬송과 희망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한기처럼 몰아치는 쓰라린 인생고를 안고 이 절박한 절망적인 극한 상황 속에서 내 자신의 상황을 바꿔 놓으신 주님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주님, 내가 환난을 당하지 않았다면 주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게 가난이 없었더라면 나는 주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슬픔과 고독이 없었더라면 나는 끝내 주님을 찾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한 불쌍한 여인의 구원에 이른 과정을 통하여 믿음의 새 진리를 발견해 봅시다.
1)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오늘날 신앙유형을 살펴보면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보고 믿는 신앙형태와 듣고 믿는 신앙형태가 그것입니다. 보고 믿는 신앙은 이방종교나 원시종교에서 성행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물체를 만들고 우상을 만들고 부적을 써서 붙이고 어떤 시각적 표징을 보입니다. 심지어 속죄표를 팔고 냄새를 맡기도 하고 사진을 붙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듣고 믿는 종교입니다. 로마서 10:17에서는 “그러므로 믿음에서 나며…”라고 했고, 요한복음 20:29에서는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라고 하셨으며, 베드로전서 1:8에서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 드린 것처럼 예수를 보고 믿던 사람은 다 떠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은 사람들 중에 구원받은 성도가 있었습니다. 니고데모의 신앙이 잘못 되었던 점은 그가 예수의 행하시는 표적을 인하여 예수님을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으로 믿었다는 점입니다(요 3:2).
2) 찾아가는 자에게 구원에 이르는 은혜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신 종교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셨고(창 3:9), 성자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으며(요 1:14), 성령님이 회중에 오셨습니다(행 2:2). 또한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의 손으로 받는 종교입니다. 루터는 말하기를, 신앙은 인간이 구원받고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복음)을 통해서만 옵니다. 신앙을 일으키는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말씀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이지 인간의 능력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능력을 공유합니다. 인간 편에서 보면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이 여인에게는 인생의 겸허와 겸손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주님의 옷에 손을 댔습니다. 그 여인은 앞으로 오지 않고 뒤로 왔습니다. 이것은 이 여인에게,병들고 가련한 이 여인에게 진정한 겸손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당돌하게 많은 사람들을 밀치고 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감히 우러러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이 여인의 겸손과 겸허와 진심이 있는 것입니다.
4) 이 여인에게는 절대능력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의 옷가만 만져도 병이 낫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 여인이 단순히 주님의 옷을 만졌기 때문에 병이 나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병이 나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접촉신학,감각적 신학,입신(入神)신학 그리고 주술신학 등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3. 붙잡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흔히 믿음에 세 가지 형태가 있다고 합니다. 배도 하는 믿음이 있습니다(마 26:48). 베드로와 같이 위급할 때는 멀리서 관망하는 신앙이 있습니다(마 26:58). 이것은 눈치를 보며 믿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굳게 붙잡고 믿는 신앙이 있습니다. 이것은 룻과 같은 태도입니다(룻 1: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6,17). 룻은 시모 나오미를 붙좇았습니다(룻 1:14).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낙심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는 최악의 상태를 최선의 상태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굳게 붙들고 전진하는 신앙생활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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