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강림의 큰 뜻 (행1:4-8)
본문
성령님강림 주일은 부활 주일의 일곱 번째 주일입니다. 성령님강림일은 하나님의 새 역사창조의 주일로 우리의 삶에 새로운 의미가 들어있는 매우 뜻 깊은 주일입니다. 성령님강림주일이 주는 몇 가지 의미를 살펴봅시다.
첫째, 구약의 율법시대가 신약의 복음시대로 바뀌어짐을 뜻합니다.
둘째, 구약의 제사제도에서 신약의 예배제도로 예배의 새로운 기점이 생기는 날입니다.
셋째, 예루살렘의 성전 중심 생활에서 교회 중심 생활로 신앙사의 대전환의 기점이 생기는 날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약속된 성령님께서 선택된 그의 백성들에게 성취되고 성령님이 물 붓듯이 부어지는 날이 바로 성령님강림 주일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구약시대에는 우리 위에서 역사 하셨고(on us), 주님 당시에는 인간과 함께 역사 하셨으며(with us), 성령님 강림 이후에는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십니다(in us). 구약시대의 성령님의 역사는 특수한 경우에 특수한 사건에 한해 특수한 사람에게만(모세,엘리야,요한 등) 역사 하셨지만 우리 교회시대에는 우리 안에서 각자에게 특이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개인에게 임하는 변화의 운동, 기도의 운동, 선교의 운동 중에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성령님시대,교회시대,은혜의 시대,복음의 시대,선교의 시대라고 합니다.
1. 성령님강림주일의 배경은 사도행전 2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님강림으로 사람마다 권능을 받았습니다(행 1:8). 권능이란 ‘능력’(듀나미스,δυναμι)인데, 이는 다이나마이트란 말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이 위력은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힘을 말하는데 사도들이 이 성령님의 다이내믹한 능력을 받음으로써 태산보다 더 크고 바위보다 더 강한 저 완악한 죄인들의 마음을 쪼개고 부셔서 회개자가 되게 했습니다(행 2:37). 물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벙어리가 말하고 소경이 눈을 뜨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문둥이가 깨끗해지는 것 모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능력은 정으로도 깰 수 없는 화강암처럼 강하고, 풀무불로도 녹일 수 없는 무쇠보다 더 완악하고, 강철처럼 모진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 회개케 하는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바위는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할 수 있고 산은 불도저로 밀어붙일 수 있으며 병은 치료함으로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도 없이할 수 없고 화약으로도 폭파할 수 없는 사람들의 죄성은 무엇으로 깨뜨리며 무엇으로 부수며 무엇으로 없이할 수 없겠습니까 이것은 오직 성령님의 능력뿐입니다. 과거에 권력과 금력을 한 손에 쥐고 휘둘렀던 한 권력자의 아내가 남편이 죽자 두 아이를 데리고 미국에 왔습니다. 그 권력자의 아내는 자녀 때문에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심히 고민하였습니다.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지난 날에는 권좌에서 권력을 가지고 여론까지 바꾸곤 했는데 이제 내 자녀 마음 속의 죄악성은 무엇으로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라고 탄식했습니다. 자녀들은 눈만 뜨면 돈을 훔쳐다가 술,담배,마약을 먹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다니면 개도 사람이 된다는 말을 듣고, 아이들을 성경학교에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교회에 의지하여 그 자녀의 품성과 행동을 바꾸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안되는 일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만 쓸모 없는 사람이 쓸모 있는 사람으로 바뀌고, 사람의 영혼이 새로워지고 새 삶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41을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3천 명이 회개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강하고 능력 있는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 부서지고 깨어진 회개의 결과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가슴을 치며 회개한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사람들입니다(행 2:36).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지르고 가(可)표를 던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3천 명이나 되었던 것입니다. 오순절 이후의 교회의 공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나 국태민안(國泰民安)에 있지 않고 죄인을 회개시키고 새사람을 만드는데 있습니다.
2. 성령님강림 이후 교회라고 하는 신령한 영적 공동체가 결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오순절은 교회의 탄생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회개한 자들에 의해서 구성되었고, 이러한 교회는 새 역사의 장을 열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교회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성령님의 선물을 받은 자들의 신령한 공동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42-47은 바로 초대교회 공동체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잘 받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였습니다. 떡을 떼었다는 것은 성찬을 뜻합니다. 그들은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이기를 힘썼으며,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을 찬미했고,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행 2:47). 오늘날 교회를 보면 많은 교회가 그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정당이나 사회단체 같은 조직체가 아닙니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세상의 힘과 세속적 리더십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헬,듀나미스,δυναμι)입니다. 초대교회와 현대교회를 풍자적으로 비교한 말이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혼자 있으면 기도했고, 둘이 있으면 간증했고, 셋이 있으면 찬송했고, 넷이 있으면 둘씩 짝지어 전도 나갔습니다. 현대교회는 혼자 있으면 고민하고, 둘이 있으면 남을 흉보고, 셋이 있으면 싸우고, 넷이 있으면 두 파로 나뉘어 당을 만들고 만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는 지금과 달랐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성도간에 서로 나누는 사랑에 놀라고 기이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사랑은 세상을 변화시켰고 사람들의 심령을 새롭게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참으로 신령한 영적 공동체였습니다.
3.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오순절 사건 이후 영적 공동체인 교회는 세계를 향해 날마다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주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행 2:47). 처음에는 예수님의 12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120문도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베드로의 설교로 3천 명이 늘어났습니다. 사도행전 6:7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道)에 복종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지역적으로 보면,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 땅으로, 사마리아에서 구브로로, 안디옥에서 소아시아로, 로마에서 땅끝(오늘날의 스페인)까지, 구스(이디오피아)에서 영국 땅까지, 그리고 미국을 거쳐 한국과 온 세계에 하나님의 교회의 확장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와 같이 수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공간적으로도 확장되었습니다. 유명한 교회사가인 케네스 라토렛 교수는 이와 같은 교회의 선교사(宣敎史)를 연구하여 대작(大作)을 썼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계교회의 확장사를 평생 연구하고 글을 썼다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복음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강림 주일을 맞는 우리는 이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헌신의 다짐을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지금도 지상에서 파죽지세로 계속 확산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과제는 “땅끝” 복음화입니다. 땅끝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지표상의 땅끝을 말합니다. 지금 주님의 제자들인 선교사들은 5대양 6대주 인적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갑니다. 동남아,중동,방글라데시,아프리카의 케냐,가봉,탄자니아 그리고 남태평양의 파푸아 뉴기니,도미니카 공화국 등 어느 지역이든지 찾아갑니다. 전혀 문자도 없는 지역에 가서 글자를 만들고 알파벳을 가르치며 평생을 바쳐 성경을 번역합니다. 그들은 원주민들의 무지와 미신, 그들이 믿고 있는 토속종교들과 싸우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프리카에서는 오일 달러를 타고 침투한 회교도와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회교도들은 그 풍부한 오일달러로 종교적 포교행위를 감행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아프리카는 오늘날과 달랐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는 탁월한 교회지도자가 배출되기도 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오리겐 그리고 히포의 어거스틴 등은 모두 아프리카 출신의 신학자요 교부들입니다. 과거에 이처럼 기독교가 왕성했던 지역이 20세기 초에는 모든 교파의 그리스도인의 수가 겨우 3%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수십년 동안에 아프리카의 기독교는 급성장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지에서 회교도들과 영적 싸움을 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정신적 영적 땅끝을 의미합니다. 지표상의 땅끝은 사람들이 찾아갈 수 잇는 곳이지만 정신적인 땅끝은 도저히 찾아갈 수 없는 곳입니다. 북극보다 멀고 이북보다 더 먼 땅끝은 어디입니까 이것은 그늘지고 어두움에 싸인 죄인들의 마음입니다. 인류역사가 시작되고 물질문명이 이처럼 밝게 빛나고 있지만 아직도 문명의 빛을 받지 못하는 곳을 지표상의 땅끝이라고 한다면 아직도 하나님의 복음이 닿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죄인의 마음은 바로 영적 땅끝입니다. 이 땅끝은 어떤 때는 내 마음 일 수도 있습니다. 이 땅끝은 성령님만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회개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분도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오, 성령님이여 오시옵소서! 아멘.
첫째, 구약의 율법시대가 신약의 복음시대로 바뀌어짐을 뜻합니다.
둘째, 구약의 제사제도에서 신약의 예배제도로 예배의 새로운 기점이 생기는 날입니다.
셋째, 예루살렘의 성전 중심 생활에서 교회 중심 생활로 신앙사의 대전환의 기점이 생기는 날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약속된 성령님께서 선택된 그의 백성들에게 성취되고 성령님이 물 붓듯이 부어지는 날이 바로 성령님강림 주일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구약시대에는 우리 위에서 역사 하셨고(on us), 주님 당시에는 인간과 함께 역사 하셨으며(with us), 성령님 강림 이후에는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십니다(in us). 구약시대의 성령님의 역사는 특수한 경우에 특수한 사건에 한해 특수한 사람에게만(모세,엘리야,요한 등) 역사 하셨지만 우리 교회시대에는 우리 안에서 각자에게 특이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개인에게 임하는 변화의 운동, 기도의 운동, 선교의 운동 중에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성령님시대,교회시대,은혜의 시대,복음의 시대,선교의 시대라고 합니다.
1. 성령님강림주일의 배경은 사도행전 2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님강림으로 사람마다 권능을 받았습니다(행 1:8). 권능이란 ‘능력’(듀나미스,δυναμι)인데, 이는 다이나마이트란 말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이 위력은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힘을 말하는데 사도들이 이 성령님의 다이내믹한 능력을 받음으로써 태산보다 더 크고 바위보다 더 강한 저 완악한 죄인들의 마음을 쪼개고 부셔서 회개자가 되게 했습니다(행 2:37). 물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벙어리가 말하고 소경이 눈을 뜨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문둥이가 깨끗해지는 것 모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능력은 정으로도 깰 수 없는 화강암처럼 강하고, 풀무불로도 녹일 수 없는 무쇠보다 더 완악하고, 강철처럼 모진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 회개케 하는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바위는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할 수 있고 산은 불도저로 밀어붙일 수 있으며 병은 치료함으로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도 없이할 수 없고 화약으로도 폭파할 수 없는 사람들의 죄성은 무엇으로 깨뜨리며 무엇으로 부수며 무엇으로 없이할 수 없겠습니까 이것은 오직 성령님의 능력뿐입니다. 과거에 권력과 금력을 한 손에 쥐고 휘둘렀던 한 권력자의 아내가 남편이 죽자 두 아이를 데리고 미국에 왔습니다. 그 권력자의 아내는 자녀 때문에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심히 고민하였습니다.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지난 날에는 권좌에서 권력을 가지고 여론까지 바꾸곤 했는데 이제 내 자녀 마음 속의 죄악성은 무엇으로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라고 탄식했습니다. 자녀들은 눈만 뜨면 돈을 훔쳐다가 술,담배,마약을 먹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다니면 개도 사람이 된다는 말을 듣고, 아이들을 성경학교에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교회에 의지하여 그 자녀의 품성과 행동을 바꾸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안되는 일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만 쓸모 없는 사람이 쓸모 있는 사람으로 바뀌고, 사람의 영혼이 새로워지고 새 삶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41을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3천 명이 회개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강하고 능력 있는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 부서지고 깨어진 회개의 결과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가슴을 치며 회개한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사람들입니다(행 2:36).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지르고 가(可)표를 던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3천 명이나 되었던 것입니다. 오순절 이후의 교회의 공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나 국태민안(國泰民安)에 있지 않고 죄인을 회개시키고 새사람을 만드는데 있습니다.
2. 성령님강림 이후 교회라고 하는 신령한 영적 공동체가 결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오순절은 교회의 탄생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회개한 자들에 의해서 구성되었고, 이러한 교회는 새 역사의 장을 열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교회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성령님의 선물을 받은 자들의 신령한 공동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42-47은 바로 초대교회 공동체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잘 받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였습니다. 떡을 떼었다는 것은 성찬을 뜻합니다. 그들은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이기를 힘썼으며,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을 찬미했고,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행 2:47). 오늘날 교회를 보면 많은 교회가 그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정당이나 사회단체 같은 조직체가 아닙니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세상의 힘과 세속적 리더십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헬,듀나미스,δυναμι)입니다. 초대교회와 현대교회를 풍자적으로 비교한 말이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혼자 있으면 기도했고, 둘이 있으면 간증했고, 셋이 있으면 찬송했고, 넷이 있으면 둘씩 짝지어 전도 나갔습니다. 현대교회는 혼자 있으면 고민하고, 둘이 있으면 남을 흉보고, 셋이 있으면 싸우고, 넷이 있으면 두 파로 나뉘어 당을 만들고 만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는 지금과 달랐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성도간에 서로 나누는 사랑에 놀라고 기이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사랑은 세상을 변화시켰고 사람들의 심령을 새롭게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참으로 신령한 영적 공동체였습니다.
3.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오순절 사건 이후 영적 공동체인 교회는 세계를 향해 날마다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주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행 2:47). 처음에는 예수님의 12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120문도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베드로의 설교로 3천 명이 늘어났습니다. 사도행전 6:7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道)에 복종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지역적으로 보면,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 땅으로, 사마리아에서 구브로로, 안디옥에서 소아시아로, 로마에서 땅끝(오늘날의 스페인)까지, 구스(이디오피아)에서 영국 땅까지, 그리고 미국을 거쳐 한국과 온 세계에 하나님의 교회의 확장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와 같이 수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공간적으로도 확장되었습니다. 유명한 교회사가인 케네스 라토렛 교수는 이와 같은 교회의 선교사(宣敎史)를 연구하여 대작(大作)을 썼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계교회의 확장사를 평생 연구하고 글을 썼다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복음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강림 주일을 맞는 우리는 이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헌신의 다짐을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지금도 지상에서 파죽지세로 계속 확산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과제는 “땅끝” 복음화입니다. 땅끝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지표상의 땅끝을 말합니다. 지금 주님의 제자들인 선교사들은 5대양 6대주 인적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갑니다. 동남아,중동,방글라데시,아프리카의 케냐,가봉,탄자니아 그리고 남태평양의 파푸아 뉴기니,도미니카 공화국 등 어느 지역이든지 찾아갑니다. 전혀 문자도 없는 지역에 가서 글자를 만들고 알파벳을 가르치며 평생을 바쳐 성경을 번역합니다. 그들은 원주민들의 무지와 미신, 그들이 믿고 있는 토속종교들과 싸우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프리카에서는 오일 달러를 타고 침투한 회교도와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회교도들은 그 풍부한 오일달러로 종교적 포교행위를 감행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아프리카는 오늘날과 달랐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는 탁월한 교회지도자가 배출되기도 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오리겐 그리고 히포의 어거스틴 등은 모두 아프리카 출신의 신학자요 교부들입니다. 과거에 이처럼 기독교가 왕성했던 지역이 20세기 초에는 모든 교파의 그리스도인의 수가 겨우 3%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수십년 동안에 아프리카의 기독교는 급성장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지에서 회교도들과 영적 싸움을 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정신적 영적 땅끝을 의미합니다. 지표상의 땅끝은 사람들이 찾아갈 수 잇는 곳이지만 정신적인 땅끝은 도저히 찾아갈 수 없는 곳입니다. 북극보다 멀고 이북보다 더 먼 땅끝은 어디입니까 이것은 그늘지고 어두움에 싸인 죄인들의 마음입니다. 인류역사가 시작되고 물질문명이 이처럼 밝게 빛나고 있지만 아직도 문명의 빛을 받지 못하는 곳을 지표상의 땅끝이라고 한다면 아직도 하나님의 복음이 닿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죄인의 마음은 바로 영적 땅끝입니다. 이 땅끝은 어떤 때는 내 마음 일 수도 있습니다. 이 땅끝은 성령님만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회개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분도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오, 성령님이여 오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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