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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하는 교회 (마16: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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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순절이 끝나는 날이요 동시에 종려주일이며 앞으로 한 주간은 우리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고난 주간입니다. 언제나 종려 주일과 고난 주간은 서로 맞물려 있어서 기독교 신앙에 있어 고난이 먼저냐, 영광이 먼저냐를 혼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고난과 영광, 영광과 고난은 서로 불가분리의 깊은 함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누구나 종료 주일하며 먼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예루살렘 장안을 떠들썩하게 예수님의 지상 생활의 영광의 절정을 연상하며 고난 주간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고난과 영광의 양면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종교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믿음 생활을 하려면 예수님의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종려주일의 영광도 바라보아야 할 것이며 동시에 만 인류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며 고난을 당하셨던 면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1. 십자가를 볼 줄 아는 교회가 부흥됩니다. 먼저 우리는 이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영광의 주만 바라볼 뿐 아니라 그 영광 뒤에 가려진 십자가를 지신 고난의 주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에서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에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루살렘 장안이 떠들썩하게 사람마다 손과 손에 종려 나뭇가지를 들고 앞서고 뒤서면서 심지어는 겉옷을 벗어 나귀등에 안장을 만들고 길에 펴면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환호했던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때 예루살렘에 모였던 유대인들은 몇 가지 호기심을 가지고 모였었습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보길 원했고 죽은 나사로를 살린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들뜬 감정으로 행여나 예수님께서 지상에 다윗 왕국을 건설하셔서 유대인의 정치문제, 민생문제, 사회문제, 경제문제 등을 해결해 주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런 메시아로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요구를 예수님께서 거절하자 그들은 마음이 돌변하여 불과 몇 일 후에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는 죽이자라고 외치면서 노기를 발하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불공정한 사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사회나 죄인은 죽이고 의인은 살리는 법인데 유독히 유대인만은 죄인은 놓아주고 의인은 죽이자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이런 죄가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2000년동안 가는 곳마다 대학살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럼 왜 유대 군중이 주님께 이런 과오를 범했던가 이는 다른데 그 원인이 있지 않고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런 일면만 바라보고 그 영광 뒤에 가려진 십자가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고난 주간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영광에 가려진 주님의 고난을 생각해야 할 것이요, 종려 나무 가지에 가려진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따랐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영광스런 면만 보고 따랐던 것이며 그 영광의 배후에 숨어있는 고난과 십자가의 면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손에 떡을 얻어먹었던 사람도, 병 고침을 받았던 사람도,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도 모두다 이 두 가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20:20-22에서 세배대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보여준 태도를 살펴봅시다. 그 여인은 자기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주님 나라에서 한 아들은 주의 우편에 두어 우정승이 되게 하시고 다른 한 아들은 두 좌편에 두어 좌정승이 되게 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때에 주님은 침묵하시고 “나의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종려주일에 동원되었던 유대 군중도 예수의 영광스런 면만 보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환호하고 그 영광 뒤에 가려진 십자가는 보지 못했습니다. 누가복음 19:1-10까지에 나타난 여리고 세리장 삭개오의 사건을 생각해봅시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께 나아갔으나 그는 키가 작아 예수를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제자들에 의해 가리워져 있어서 볼 수가 없었고 또 군중들에 의해 가리워져 있어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종려주일의 예수의 십자가의 실체도 종려 나무에 의해 가려졌었고 군중들의 환호에 의해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실체는 더러는 황금에 의해 가리워져 있고 건물에 의해 가리워져 있으며 지식에 의해 가리워져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실체를 볼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며 부자가 된다거나 출세한다거나 병을 고치고 만사 형통한다고만 생각하고 그 실체를 보지 못합니다. 부활 주일 새벽에 여인들은 향유를 준비해 가지고 예수의 무덤에 갔습니다(마28:1;막16:1;눅24:1;요20:1) 이들은 삼일 전에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들은 죽은 예수를 보았으며 장사지내진 예수를 보았으며 그리고 지금쯤은 무덤 속에서 썩고 있을 예수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시체가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시체에 발을 향유를 준비했습니다. 믿음은 현실만 보는 것이 아니라 현실 뒤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우리도 오늘 영광스런 주님의 종려주일에 영광 뒤에 가려진 고난의 십자가까지 볼 수 있는 믿음들을 가집시다. 십자가를 바로 볼 줄 아는 교회가 부흥됩니다.
2. 십자가를 전하는 교회가 부흥됩니다. 고전 1:23절과 갈 6:14절을 보면 바울이 전한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
4).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노라(갈6:14)” 바울은 십자가만을 전하되 결코 그의 지식이나 능력이나 기사나 이적이나 할례나 율법이나 종교적 우월성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얼마나 많은 이적과 기사가 행해졌었습니다 주님은 눈먼 자를 보게 하시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셨습니다. 문둥병을 깨끗하게 하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로 5천명을 먹이셨고 베드로를 물위로 걷게 하시고 풍랑을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와 같은 예수님의 표적을 전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님의 고난과 나무에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만을 전했던 것입니다. 물론 바울도 전도할 때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발을 쓰지 못하는 앉은뱅이를 고쳤고(행14:8)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점쟁이를 고쳤으며(행16:16) 바울의 능력이 절정에 이를 때에는 그의 손수건과 앞치마에 손을 갖다 대기만 해도 병이 낫고 귀신이 떠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행19:12). 그러나 그와 같은 기사나 이적이나 표적이나 능력을 전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려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고난의 주님만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번 고난 주간에 고난의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고난의 주님을 전합시다. 이번 한 주간을 지나면서 우리 모두는 오늘 불렀던 예배 찬송을 부르시고 성경 마태복음26:27절을 묵상하시면서 성금요일에는 찬송가136장을 부르시면서 정오를 지내시기 바랍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오! 그 때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3. 십자가를 지는 교회가 부흥됩니다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10:38절의 말씀과 마태복음 16:24절의 말씀을 보면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를 따를 때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합니다. 왜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까 십자가 없이 주님을 따르면 편하고 힘들지 않고 좋을텐데 왜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까 십자가를 지지 않고 맨 몸으로 주님을 따르면 기쁨이 없습니다.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주님을 따르면 능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했는데 십자가 없이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어떻게 능력이 있겠습니까 (고전1:18) 어떤 분이 말하기를 성도가 지는 십자가의 짐과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정비례한다고 했습니다. 등에 지는 십자가의 짐이 무거울수록 사람의 몸의 자세는 앞으로 숙여지는 법입니다. 그러다가 그 짐이 너무 무겁게 되면 주님 앞에 두 무릎을 꿇고 말게 됩니다. 주님께 무릎을 꿇는 자에게 주님이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10:38절과 마태복음 16:24절 등에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던 말씀이나 고전1:18절에서 나타난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란 말씀은 모두가 다 같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스펄젼은 “새의 두 날개가 새에게는 거추장스러운 것이나 새의 날개가 없이는 날 수가 없다. 배의 돛대도 배에게는 한갓 거추장스러운 연장이지만 배의 돛대가 없으면 항해를 할 수 없다. 이처럼 성도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나 성도에게 십자가가 없으면 하나님의 능력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없이 주님을 따르는 자는 행복에 보이지 않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자가 행복하게 보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십자가를 지는 가정 서로 십자가를 지는 교회가 행복합니다. 우리도 이 고난 주간에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릅시다. 그것이 곧 한 알의 밀이 될 것입니다. 늘 십자가를 생각하며 십자가를 전하는 교회가 부흥됩니다. 영광만 바라보지 말고 영광 뒤에 있는 십자가를 보는 교회가 부흥됩니다. 십자가를 지는 교회가 능력 받아 부흥된다는 사실을 믿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큰 은혜와 위로와 힘과 능력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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