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의 기도 (약5:13-18)
본문
성경에 의하면 인간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재앙은 인간들의 죄때문에 온다고 했다. 국가적으로 큰 죄를 범하면 전쟁이 일어나고, 국민들이 방자히 행하고 사회악이 성행하면 흉년이 들고, 개인적으로 타락한 생활을 하여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사람들이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하게 되면 반드시 유행병이 성행하는 법이다. 아합 왕 때에 전 이스라엘에 3년 반 동안 흉년이 들었었다. 아합 왕을 위시해서 전 국민이 하나님을 떠나 바알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숭배하고 사회의 도덕이 땅에 떨어진 죄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이때에 선지자 엘리야는 두 번 기도했다. 첫 번째는 비가 오지 않게 기도했고 두 번째는 비가 오게 기도했다.
그런데 이 기도는 두번 다 응답되었다. 엘리야의 두 가지 기도를 통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교훈을 생각해 봅시다.
1.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다. 엘리야는 두번 다 기도 응답을 받은 후 더욱 더 유명해지고 위인처럼 되었지만 본문을 자세히 보면,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다. 엘리야가 우리가 성정이 같았다는 말은 그가 보통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만일 엘리야가 우리 시대에 우리처럼 한국에 태어났다면,시골(디십 사람)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지방도시에 있는 단과대학 정도나 다녔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가 유명한 선지자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신학은 일류 신학교에서 공부하지 않았겠나 생각됩니다. 기도는 이런 보통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기쁠 때 웃을 수 있는 사람, 슬플 때 울 줄 아는 사람, 배고프고 목이 마를 때 먹고 싶고 마시고 싶은 사람, 괴로울 때 고민하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또 백성들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날 때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는 사람, 임금이 우상을 섬길 때 고민하는 사람, 그리고 백성들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 올 때는 기뻐하며 감사할 줄 아는 그런 보통 사람이 기도를 할 자격이 있습니다. 기도란 굉장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전혀 없는 유대나라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과 같이 무흠한 그런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나처럼 죄가 많고 흠이 많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밀린 봉급 때문에 고민하고 잃어버린 일자리 때문에 염려하고, 빗나간 자녀들의 문제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 기울어져가는 사업을 안고 안타까워하는 사람, 세상 유혹을 받고 갈등을 느끼는 사람, 사람들에게서 시비와 원망을 듣는 사람, 어렸을 때 부모에게서 꾸중도 들어본 사람, 학교에서 선생님의 칭찬도 들어본 사람, 또 군대에 가서는 기압도 받아본 그런 사람이 기도할 자격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2. 엘리야는 기도하기 위해서 올라갔습니다. 엘리야는 어떤 복잡한 일을 하기 전에 갈멜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갈멜산에는 하나님께 제사 드렸던 제단이 있었습니다. 다윗 왕가의 전성시대 때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제단이 있었습니다. 그 제단을 찾아 갈멜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우리도 교회를 향해 이곳까지 온 이유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에는 두 가지 믿음이 있습니다. 올라가는 믿음과 내려가는 믿음이 있습니다. 먼저 올라가는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모리아산으로 올라가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은 헌신적인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헌신할 때 올라갑니다(창 22장). 모세가 아말렉과 싸울 때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이 믿음은 기도하는 믿음입니다. 기도할 때 믿음이 올라갑니다(출 17:10). 모세가 산에 올라가 손들고 기도할 때 모세를 돕기 위해 홀과 아론이 산에 올라가 모세의 양손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이 믿음은 협동하는 믿음입니다. 서로 협동할 때 믿음이 올라갑니다(출 17:12). 이스라엘 백성이 아침 일찍 산 꼭대기로 올라가 하나님께 회개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라고 회개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은 참회의 믿음입니다. 회개하는 믿음이 올라가는 믿음입니다(민 14:39,40). 그러면 내려가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을 때 엘리멜렉은 자기 고향 베들레헴에서 모압 땅 이방 지대로 내려갔습니다. 다같이 당하는 흉년이었는데 그는 그 어려움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곳에 내려가서 인간 최대의 비애를 당했습니다. 자기 자신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었습니다. 나오미는 두 자부만 데리고 있다가 큰 자부는 자기 친가로 돌아가고 작은 자부 룻은 시모 나오미를 잘 모셔서 다윗 왕 가의 증조모가 되었습니다(룻기). 요나의 믿음도 내려가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셨으나 요나는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다시 배 밑창으로, 바다 밑바닥으로, 또다시 큰 물고기 뱃속까지 내려갔습니다(요나서 1장).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던 사람도 내려가다가 강도까지 만나는 불행을 겪게 되었습니다(눅 10:30). 올라가는 믿음은 하나처럼 잘되는 믿음이지만 내려가는 믿음은 하나처럼 불행한 결과만 가져왔습니다.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같이….” 이 시간 우리는 내 믿음이 올라가는 믿음인지 내려가고 있는 믿음인지 자문자답해 봅시다.
3. 엘리야는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기도의 자세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오만한 태도로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오병이어의 기도를 드렸고(마 14:19), 얼굴을 땅에 대고도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 바울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고(행 20:36), 세리는 죄를 원통히 여기며 가슴을 치고 기도하였습니다(눅 18:13). 이처럼 기도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태도 역시 중요합니다. 눈을 뜨고 발을 꼬고 껌을 씹으면서 하는 기도는 고쳐야 합니다.
1) 엘리야는 땅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이같은 태도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서 취할 수 있는 최대의 겸손의 표시입니다. 동방박사는 아기 예수께 드리기 위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드리면서 엎드려 경배했습니다(마 2:11).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주인에게 와서 사정할 때도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사정했습니다(마 18:26).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눅 5:8). 심지어 마귀도 예수님께 땅에 엎드려 자기에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허풍을 떨었습니다(마 4:9).
2) 엘리야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했습니다. 근 얼굴을 자기의 두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습니다. 제가 한 번 해보았지만 흉내도 낼 수 없었습니다. 엘리야와 야고보는 모두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고, 야고보는 무릎이 낙타 무릎처럼 공이가 박힐 정도로 기도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특징 있는 기도꾼들이었습니다. 엘리야의 이런 기도를 야고보서 5:17에서는 간절한 기도라고 했습니다. 간절한 기도란 ‘기도로 기도한다’ 또는 ‘기도 속에서 기도한다’라는 뜻입니다.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눈으로 앞을 볼 수 없고 귀로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소리도 없고 말도 없는 기도, 즉 전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기도입니다.
3) 엘리야는 믿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는 비 오기 전에 이미 비 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믿음이 우리의 믿음과 달랐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눈으로 보는 것도 믿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또 도마처럼 손으로 만져보고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비올만한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는데도 비오는 소리가 난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1에서는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신앙은 보지 않고 믿는 신앙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모사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엘리야는 사환을 여섯 번이나 보내어 비오는 흔적을 확인하려 했으나 그 흔적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곱번 째에 이르러 저 수평선 멀리서 떠오르는 손바닥만한 구름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의 비가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귀를 가지고 엘리야처럼 축복의 빗소리를 들어야겠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아니 오던 비가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 땅에 흡족히 내림으로써 땅은 아름다운 열매를 냈습니다. 우리도 엘리야처럼 결심하는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이 내리시는 축복의 빗소리를 들을 수 있음을 믿읍시다. 성경에서 비는 모두 하나님의 좋은 축복의 징조입니다.
금년 봄에 L. A.에 많은 비가 내려서 7년간의 가뭄이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합니다. 이같은 해갈의 소식이 우리에게 임할 축복의 예시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산업이 곤핍할 때에 견고케 하셨고 주의 회중으로 그 가운데 거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시 68:9,10).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 비를 내리리라”(겔 34:26). 엘리야는 위대한 기도의 사람입니다. 아합왕의 하나님을 떠난 죄, 백성들의 우상숭배 죄, 이세벨의 음해하는 간교한 죄 때문에 3년 6개월 동안 굳게 닫힌 하늘의 문이 엘리야의 기도로 드디어 열리게 되었습니다. “주여! 우리에게도 빗문이 열리게 하소서! 하나님의 축복의 빗문이 열리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마당에도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포도주와 기름이 넘치게 하옵소서! 아멘!”
그런데 이 기도는 두번 다 응답되었다. 엘리야의 두 가지 기도를 통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교훈을 생각해 봅시다.
1.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다. 엘리야는 두번 다 기도 응답을 받은 후 더욱 더 유명해지고 위인처럼 되었지만 본문을 자세히 보면,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다. 엘리야가 우리가 성정이 같았다는 말은 그가 보통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만일 엘리야가 우리 시대에 우리처럼 한국에 태어났다면,시골(디십 사람)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지방도시에 있는 단과대학 정도나 다녔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가 유명한 선지자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신학은 일류 신학교에서 공부하지 않았겠나 생각됩니다. 기도는 이런 보통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기쁠 때 웃을 수 있는 사람, 슬플 때 울 줄 아는 사람, 배고프고 목이 마를 때 먹고 싶고 마시고 싶은 사람, 괴로울 때 고민하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또 백성들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날 때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는 사람, 임금이 우상을 섬길 때 고민하는 사람, 그리고 백성들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 올 때는 기뻐하며 감사할 줄 아는 그런 보통 사람이 기도를 할 자격이 있습니다. 기도란 굉장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전혀 없는 유대나라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과 같이 무흠한 그런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나처럼 죄가 많고 흠이 많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밀린 봉급 때문에 고민하고 잃어버린 일자리 때문에 염려하고, 빗나간 자녀들의 문제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 기울어져가는 사업을 안고 안타까워하는 사람, 세상 유혹을 받고 갈등을 느끼는 사람, 사람들에게서 시비와 원망을 듣는 사람, 어렸을 때 부모에게서 꾸중도 들어본 사람, 학교에서 선생님의 칭찬도 들어본 사람, 또 군대에 가서는 기압도 받아본 그런 사람이 기도할 자격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2. 엘리야는 기도하기 위해서 올라갔습니다. 엘리야는 어떤 복잡한 일을 하기 전에 갈멜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갈멜산에는 하나님께 제사 드렸던 제단이 있었습니다. 다윗 왕가의 전성시대 때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제단이 있었습니다. 그 제단을 찾아 갈멜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우리도 교회를 향해 이곳까지 온 이유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에는 두 가지 믿음이 있습니다. 올라가는 믿음과 내려가는 믿음이 있습니다. 먼저 올라가는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모리아산으로 올라가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은 헌신적인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헌신할 때 올라갑니다(창 22장). 모세가 아말렉과 싸울 때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이 믿음은 기도하는 믿음입니다. 기도할 때 믿음이 올라갑니다(출 17:10). 모세가 산에 올라가 손들고 기도할 때 모세를 돕기 위해 홀과 아론이 산에 올라가 모세의 양손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이 믿음은 협동하는 믿음입니다. 서로 협동할 때 믿음이 올라갑니다(출 17:12). 이스라엘 백성이 아침 일찍 산 꼭대기로 올라가 하나님께 회개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라고 회개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은 참회의 믿음입니다. 회개하는 믿음이 올라가는 믿음입니다(민 14:39,40). 그러면 내려가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을 때 엘리멜렉은 자기 고향 베들레헴에서 모압 땅 이방 지대로 내려갔습니다. 다같이 당하는 흉년이었는데 그는 그 어려움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곳에 내려가서 인간 최대의 비애를 당했습니다. 자기 자신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었습니다. 나오미는 두 자부만 데리고 있다가 큰 자부는 자기 친가로 돌아가고 작은 자부 룻은 시모 나오미를 잘 모셔서 다윗 왕 가의 증조모가 되었습니다(룻기). 요나의 믿음도 내려가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셨으나 요나는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다시 배 밑창으로, 바다 밑바닥으로, 또다시 큰 물고기 뱃속까지 내려갔습니다(요나서 1장).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던 사람도 내려가다가 강도까지 만나는 불행을 겪게 되었습니다(눅 10:30). 올라가는 믿음은 하나처럼 잘되는 믿음이지만 내려가는 믿음은 하나처럼 불행한 결과만 가져왔습니다.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같이….” 이 시간 우리는 내 믿음이 올라가는 믿음인지 내려가고 있는 믿음인지 자문자답해 봅시다.
3. 엘리야는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기도의 자세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오만한 태도로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오병이어의 기도를 드렸고(마 14:19), 얼굴을 땅에 대고도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 바울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고(행 20:36), 세리는 죄를 원통히 여기며 가슴을 치고 기도하였습니다(눅 18:13). 이처럼 기도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태도 역시 중요합니다. 눈을 뜨고 발을 꼬고 껌을 씹으면서 하는 기도는 고쳐야 합니다.
1) 엘리야는 땅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이같은 태도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서 취할 수 있는 최대의 겸손의 표시입니다. 동방박사는 아기 예수께 드리기 위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드리면서 엎드려 경배했습니다(마 2:11).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주인에게 와서 사정할 때도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사정했습니다(마 18:26).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눅 5:8). 심지어 마귀도 예수님께 땅에 엎드려 자기에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허풍을 떨었습니다(마 4:9).
2) 엘리야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했습니다. 근 얼굴을 자기의 두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습니다. 제가 한 번 해보았지만 흉내도 낼 수 없었습니다. 엘리야와 야고보는 모두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고, 야고보는 무릎이 낙타 무릎처럼 공이가 박힐 정도로 기도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특징 있는 기도꾼들이었습니다. 엘리야의 이런 기도를 야고보서 5:17에서는 간절한 기도라고 했습니다. 간절한 기도란 ‘기도로 기도한다’ 또는 ‘기도 속에서 기도한다’라는 뜻입니다.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눈으로 앞을 볼 수 없고 귀로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소리도 없고 말도 없는 기도, 즉 전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기도입니다.
3) 엘리야는 믿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는 비 오기 전에 이미 비 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믿음이 우리의 믿음과 달랐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눈으로 보는 것도 믿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또 도마처럼 손으로 만져보고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비올만한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는데도 비오는 소리가 난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1에서는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신앙은 보지 않고 믿는 신앙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모사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엘리야는 사환을 여섯 번이나 보내어 비오는 흔적을 확인하려 했으나 그 흔적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곱번 째에 이르러 저 수평선 멀리서 떠오르는 손바닥만한 구름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의 비가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귀를 가지고 엘리야처럼 축복의 빗소리를 들어야겠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아니 오던 비가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 땅에 흡족히 내림으로써 땅은 아름다운 열매를 냈습니다. 우리도 엘리야처럼 결심하는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이 내리시는 축복의 빗소리를 들을 수 있음을 믿읍시다. 성경에서 비는 모두 하나님의 좋은 축복의 징조입니다.
금년 봄에 L. A.에 많은 비가 내려서 7년간의 가뭄이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합니다. 이같은 해갈의 소식이 우리에게 임할 축복의 예시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산업이 곤핍할 때에 견고케 하셨고 주의 회중으로 그 가운데 거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시 68:9,10).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 비를 내리리라”(겔 34:26). 엘리야는 위대한 기도의 사람입니다. 아합왕의 하나님을 떠난 죄, 백성들의 우상숭배 죄, 이세벨의 음해하는 간교한 죄 때문에 3년 6개월 동안 굳게 닫힌 하늘의 문이 엘리야의 기도로 드디어 열리게 되었습니다. “주여! 우리에게도 빗문이 열리게 하소서! 하나님의 축복의 빗문이 열리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마당에도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포도주와 기름이 넘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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