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다니엘의 믿음 (단1:8-9)
본문
청년 다니엘의 믿음에 대해 같이 상고 하고자 합니다. 다니엘은 유대 왕조 말기 여호야긴 3년(주전606년)에 바벨로 왕 느부갓넷살이 유대 예루살렘을 침공할 때 그의 세 친구(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함께 바벨론으로 잡혀갔던 포로중 한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벨론에 있으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어 고대중동의 삼대제국의 제상으로(느부갓네살,고레스,다리오왕 때까지) 70년을 지나면서 자기 민족을 해방시킨 업적을 남긴 위대한 신앙 청년이었습니다.
1.다니엘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하면 먼저 구약 시대의 믿음의 영웅이었든 아브라함, 모세, 다윗들과 함께 세상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인물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일관성 있고 용기 있는 믿음은 유대에 있을 때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이후에도 조금도 변질되지 않는 비타협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성경에 믿음을 금으로 비유한 대목이 있습니다. (벧전 1:7) 금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금은 불변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믿음은 금같은 믿음이었습니다. 불변하는 믿음이었고, 비타협적이었으며 일관성이 있고 용기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용기 있는 믿음이 왕명까지도 거절할 수 있는 터전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일관성 있는 믿음이어야만 합니다. 일관성 있는 믿음이란 생활 환경이나 여건이 변했다고 해도 믿음이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일관성 있게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엡6:24) 다니엘의 지금의 처지는 전에 예루살렘에 있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졌습니다. 옛날에는 자유스러운 신앙 생활이 가능한 신앙 왕국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인질로 끌려온 비참한 포로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지난날은 침략군의 위협을 받고 쫓기는 신세였지만 지금은 대제국의 어전에서 황실 교육을 받는 입장에 놓여있습니다. 왕의 진미와 왕이 마시는 포도주로 자신을 얼마든지 살찌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여건이 그에게 주어져 있었습니다. 구약의 모세도 애굽 궁중에 가만히 있기만 해도 저절로 대제국의 황태자가 능히 되고도 남을 수 있었지만 공주의 아들 됨을 거절하고 오히려 자기백성과 함께 고생하는 것을 잠시 애굽의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받은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제물로 여겼던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적 혼합주의와 권력주의가 점점 성행에 가고 있는 이때에 다니엘의 순수한 일관성 있는 신앙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2. 다니엘은 결심의 사람이었습니다. 8절에 의하면 다니엘은 자기의 성결을 위하여 뜻을 정하고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옛날 어느 목사님이 자전거를 타고 심방하고 돌아오는데 신작로 가에 깨진 소주독이 있었고 거기에 소주가 고여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깝다고 그 소주를 마시고 자전거를 타고 비틀비틀 오고 있는 교인을 보고 목사님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길에 쏟아진 소주가 아까워서 마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 집고 가야 할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다니엘의 지금의 신분의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지금 그는 종으로 끌려온 선택의 여유가 전혀 없는 대제국의 포로입니다. 잘 아는 바대로 포로와 노예는 아무 선택의 권한이 없는 존재입니다. 노예나 종은 생존권, 소유권,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유가 없습니다. 다니엘은 이러한 선택의 여유가 없는 포로였습니다. 감히 거기가 어디라고 일개 포로로 끌려온 종이 왕의 어명을 거절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성결을 위해 용감하게 왕명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둘째, 왕의 진미와 왕의 어주(御酒)를 거절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옛날 고대 왕국에서는 침략정책의 일환으로 유능한 인재를 잡아다가 창시계명을 시켰고 궁중의 교육을 시켰으며, 어전의 진미를 먹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은 각각 이름을 개명하였고 왕에 진미를 먹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의 진미를 거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음식이었고(레11:2-8), 부정한 동물이었으며(레11:10-12),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호9:3;고전10:27-29)이었기 때문입니다. 세계에서 우리 한국 민족만큼 적응성이 강한 민족이 흔치 않다고 합니다. 우리 민족은 어디서나 잘 견딜 수 있고 어떤 음식도 잘 먹습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못 먹는 음식이 없습니다. 또 우리 민족은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는 민족입니다. 그러나 생각없이 아무거나 먹는 문제는 좀 주의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왜 먹고 마시는 문제로 자기 몸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심했을까요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입은 만물의 영장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몸을 아무것에 던지거나 아무에게 내 맡기거나 아무 일이라도 무분별하게 하거나 아무것이나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몸은 성령님의 전이기 때문입니다(고전 6:19). 다시 말해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성별된 살아서 이동하는 하나님의 작은 성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의 몸은 깨끗하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로 우리의 몸은 값으로 산것이 되었으니 늘 성결하게 그리스도의 지체로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옛글에도 부모에게서 받은 몸 상하지 않고 잘 유지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보혈로 사신 우리의 몸을 상하지 않고 해하지 않는 것이 마땅한 도리입니다.
3. 다니엘은 경건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문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경건에 사람입니다(단6:10). 다니엘은 이와 같은 태도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지극한 신앙의 열정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이 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디서나 습관적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하루 세법씩 꼭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기도했습니다(왕상 8:33,35.48;시 5:7;18:6;55:17). 이런 습관은 신약시대에 와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행3:1-10) 성도가 세상에서 가장 크게 행사할 수 있는 힘은 기도의 힘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루 세번씩 규칙적으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의 간절한 기도로 인하여 그의 얼굴은 왕의 진미를 먹은 다른 청년들보다 윤택해 보였으며 지혜와 총명과 명철이 다른 동료들보다 10배나 더했습니다. 또 그와 같은 기도 때문에 자기를 시기하고 왕께 고발한 동료들을 무색해 했으며 그의 간절한 중보 기도로 인하여 자기의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평소보다 7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사나운 사자의 입이 열리지 않고 발톱이 펴지지 않았으며, 왕의 분노를 가라앉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70년 동안 삼대제국의 제상으로 생애를 살았습니다. 우리도 다니엘과 같은 기도의 능력을 받기 위해 기도합시다. 별로 보잘것없는 유대 청년의 기도의 무기가 얼마나 위력이 있었습니까 세상에서 우리가 당한 모든 문제의 해결은 무릎에 의한 해결입니다. 앞으로 우리 청년들이 추측이 되어 산 기도도 하고 철야 기도도 하고 금식 기도도 합시다. 중보 기도도 하고 총력 기도도 합시다. 사람은 한번밖에 못삽니다. 그리고 그 인생의 일생은 너무도 짧습니다. 게다가 젊음의 때는 잠깐 지나고 맙니다. 고로 전도자는 전도서 12:1에서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때가 가깝기 전에 너희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4.다니엘은 지혜와 총명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6:3절에 의하면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왕이 기억하지 못한 꿈을 찾아서 해몽하기까지 했습니다. 생각하면 남의 꿈을 해몽하기도 어려운데 그는 느부갓네살왕 본인도 꿈꾸고 기억 못한 꿈을 찾아냈고 게다가 해몽까지 했습니다. 느부갓네살왕이 꿈에 보았던 금신상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정금으로 된 머리는 바벨론 제국을 뜻하며 은으로 된 가슴과 두 팔은 메대와 바사를 뜻하며 허리와 넓적다리의 놋은 헬라제국을 의미합니다. 철로 된 다리는 로마제국이며 철과 진흙의 발은 장차 나타날 연방제국을 뜻합니다. 이상은 세상의 제국들을 뜻하는데 단 2:34절에 뜨인 돌이 난데없이 나타나 신상을 완전히 쳐서 부서뜨렸다고 했으니 뜨인 돌은 역사 종말에 나타날 메시아를 뜻합니다. 장차 메시아가 오시게 되면은 세상 왕국들은 멸망될 것임을 다니엘은 알았습니다. 다윗의 눈이 빼어났다고 했는데 다니엘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다니엘은 배워서 알게 되는 지식의 눈이 있었고 정신적인 눈인 혜안의 눈,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적인 영안(靈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인류 역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눈으로 볼 수 있는 통찰력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항상 미래를 바라보는 예언자적이고 선지자적인 눈을 가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5. 다니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자굴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느부갓네살 왕으로 하여금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했습니다. 왕은 명을 내려 다니엘을 참소하였던 자와 그의 처자를 사자굴에 던져 사자의 밥이 되게 했습니다(단6:24). 하나님께 함부로 말하는 자에 몸을 쪼개고 그 집은 거름터가 되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단3:29). 또 왕은 조서를 내려 전국민은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 떨며 두려워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변치 않으시며 그의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의 권세는 무궁하다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단6:26). 이처럼 다니엘 한사람의 영향이 얼마나 컸습니까 이때부터 벌써 중동에서는 메시야 사상의 영향을 받아 고레스왕은 유대인의 귀환령을 내리고 동방박사들은 만왕의 왕을 경배하기 위해 예물을 준비해 가지고 유대 땅까지 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일관성 있는 믿음을 가집시다. 청년들의 믿음이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또 먹고 마시는 문제로 몸을 부정하게 하지 말고 성결한 생활을 합시다. 하나님께 무릎꿇는 경건한 기도 생활을 하며 역사의 미래를 바라보는 민첩한 선지자적 시각을 가집시다. 왕을 승복시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승리의 믿음을 가집시다. 하나님께 영광! 주님 영광 받으소서!
1.다니엘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하면 먼저 구약 시대의 믿음의 영웅이었든 아브라함, 모세, 다윗들과 함께 세상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인물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일관성 있고 용기 있는 믿음은 유대에 있을 때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이후에도 조금도 변질되지 않는 비타협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성경에 믿음을 금으로 비유한 대목이 있습니다. (벧전 1:7) 금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금은 불변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믿음은 금같은 믿음이었습니다. 불변하는 믿음이었고, 비타협적이었으며 일관성이 있고 용기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용기 있는 믿음이 왕명까지도 거절할 수 있는 터전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일관성 있는 믿음이어야만 합니다. 일관성 있는 믿음이란 생활 환경이나 여건이 변했다고 해도 믿음이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일관성 있게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엡6:24) 다니엘의 지금의 처지는 전에 예루살렘에 있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졌습니다. 옛날에는 자유스러운 신앙 생활이 가능한 신앙 왕국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인질로 끌려온 비참한 포로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지난날은 침략군의 위협을 받고 쫓기는 신세였지만 지금은 대제국의 어전에서 황실 교육을 받는 입장에 놓여있습니다. 왕의 진미와 왕이 마시는 포도주로 자신을 얼마든지 살찌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여건이 그에게 주어져 있었습니다. 구약의 모세도 애굽 궁중에 가만히 있기만 해도 저절로 대제국의 황태자가 능히 되고도 남을 수 있었지만 공주의 아들 됨을 거절하고 오히려 자기백성과 함께 고생하는 것을 잠시 애굽의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받은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제물로 여겼던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적 혼합주의와 권력주의가 점점 성행에 가고 있는 이때에 다니엘의 순수한 일관성 있는 신앙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2. 다니엘은 결심의 사람이었습니다. 8절에 의하면 다니엘은 자기의 성결을 위하여 뜻을 정하고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옛날 어느 목사님이 자전거를 타고 심방하고 돌아오는데 신작로 가에 깨진 소주독이 있었고 거기에 소주가 고여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깝다고 그 소주를 마시고 자전거를 타고 비틀비틀 오고 있는 교인을 보고 목사님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길에 쏟아진 소주가 아까워서 마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 집고 가야 할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다니엘의 지금의 신분의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지금 그는 종으로 끌려온 선택의 여유가 전혀 없는 대제국의 포로입니다. 잘 아는 바대로 포로와 노예는 아무 선택의 권한이 없는 존재입니다. 노예나 종은 생존권, 소유권,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유가 없습니다. 다니엘은 이러한 선택의 여유가 없는 포로였습니다. 감히 거기가 어디라고 일개 포로로 끌려온 종이 왕의 어명을 거절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성결을 위해 용감하게 왕명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둘째, 왕의 진미와 왕의 어주(御酒)를 거절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옛날 고대 왕국에서는 침략정책의 일환으로 유능한 인재를 잡아다가 창시계명을 시켰고 궁중의 교육을 시켰으며, 어전의 진미를 먹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은 각각 이름을 개명하였고 왕에 진미를 먹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의 진미를 거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음식이었고(레11:2-8), 부정한 동물이었으며(레11:10-12),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호9:3;고전10:27-29)이었기 때문입니다. 세계에서 우리 한국 민족만큼 적응성이 강한 민족이 흔치 않다고 합니다. 우리 민족은 어디서나 잘 견딜 수 있고 어떤 음식도 잘 먹습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못 먹는 음식이 없습니다. 또 우리 민족은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는 민족입니다. 그러나 생각없이 아무거나 먹는 문제는 좀 주의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왜 먹고 마시는 문제로 자기 몸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심했을까요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입은 만물의 영장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몸을 아무것에 던지거나 아무에게 내 맡기거나 아무 일이라도 무분별하게 하거나 아무것이나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몸은 성령님의 전이기 때문입니다(고전 6:19). 다시 말해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성별된 살아서 이동하는 하나님의 작은 성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의 몸은 깨끗하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로 우리의 몸은 값으로 산것이 되었으니 늘 성결하게 그리스도의 지체로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옛글에도 부모에게서 받은 몸 상하지 않고 잘 유지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보혈로 사신 우리의 몸을 상하지 않고 해하지 않는 것이 마땅한 도리입니다.
3. 다니엘은 경건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문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경건에 사람입니다(단6:10). 다니엘은 이와 같은 태도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지극한 신앙의 열정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이 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디서나 습관적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하루 세법씩 꼭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기도했습니다(왕상 8:33,35.48;시 5:7;18:6;55:17). 이런 습관은 신약시대에 와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행3:1-10) 성도가 세상에서 가장 크게 행사할 수 있는 힘은 기도의 힘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루 세번씩 규칙적으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의 간절한 기도로 인하여 그의 얼굴은 왕의 진미를 먹은 다른 청년들보다 윤택해 보였으며 지혜와 총명과 명철이 다른 동료들보다 10배나 더했습니다. 또 그와 같은 기도 때문에 자기를 시기하고 왕께 고발한 동료들을 무색해 했으며 그의 간절한 중보 기도로 인하여 자기의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평소보다 7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사나운 사자의 입이 열리지 않고 발톱이 펴지지 않았으며, 왕의 분노를 가라앉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70년 동안 삼대제국의 제상으로 생애를 살았습니다. 우리도 다니엘과 같은 기도의 능력을 받기 위해 기도합시다. 별로 보잘것없는 유대 청년의 기도의 무기가 얼마나 위력이 있었습니까 세상에서 우리가 당한 모든 문제의 해결은 무릎에 의한 해결입니다. 앞으로 우리 청년들이 추측이 되어 산 기도도 하고 철야 기도도 하고 금식 기도도 합시다. 중보 기도도 하고 총력 기도도 합시다. 사람은 한번밖에 못삽니다. 그리고 그 인생의 일생은 너무도 짧습니다. 게다가 젊음의 때는 잠깐 지나고 맙니다. 고로 전도자는 전도서 12:1에서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때가 가깝기 전에 너희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4.다니엘은 지혜와 총명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6:3절에 의하면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왕이 기억하지 못한 꿈을 찾아서 해몽하기까지 했습니다. 생각하면 남의 꿈을 해몽하기도 어려운데 그는 느부갓네살왕 본인도 꿈꾸고 기억 못한 꿈을 찾아냈고 게다가 해몽까지 했습니다. 느부갓네살왕이 꿈에 보았던 금신상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정금으로 된 머리는 바벨론 제국을 뜻하며 은으로 된 가슴과 두 팔은 메대와 바사를 뜻하며 허리와 넓적다리의 놋은 헬라제국을 의미합니다. 철로 된 다리는 로마제국이며 철과 진흙의 발은 장차 나타날 연방제국을 뜻합니다. 이상은 세상의 제국들을 뜻하는데 단 2:34절에 뜨인 돌이 난데없이 나타나 신상을 완전히 쳐서 부서뜨렸다고 했으니 뜨인 돌은 역사 종말에 나타날 메시아를 뜻합니다. 장차 메시아가 오시게 되면은 세상 왕국들은 멸망될 것임을 다니엘은 알았습니다. 다윗의 눈이 빼어났다고 했는데 다니엘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다니엘은 배워서 알게 되는 지식의 눈이 있었고 정신적인 눈인 혜안의 눈,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적인 영안(靈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인류 역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눈으로 볼 수 있는 통찰력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항상 미래를 바라보는 예언자적이고 선지자적인 눈을 가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5. 다니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자굴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느부갓네살 왕으로 하여금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했습니다. 왕은 명을 내려 다니엘을 참소하였던 자와 그의 처자를 사자굴에 던져 사자의 밥이 되게 했습니다(단6:24). 하나님께 함부로 말하는 자에 몸을 쪼개고 그 집은 거름터가 되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단3:29). 또 왕은 조서를 내려 전국민은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 떨며 두려워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변치 않으시며 그의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의 권세는 무궁하다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단6:26). 이처럼 다니엘 한사람의 영향이 얼마나 컸습니까 이때부터 벌써 중동에서는 메시야 사상의 영향을 받아 고레스왕은 유대인의 귀환령을 내리고 동방박사들은 만왕의 왕을 경배하기 위해 예물을 준비해 가지고 유대 땅까지 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일관성 있는 믿음을 가집시다. 청년들의 믿음이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또 먹고 마시는 문제로 몸을 부정하게 하지 말고 성결한 생활을 합시다. 하나님께 무릎꿇는 경건한 기도 생활을 하며 역사의 미래를 바라보는 민첩한 선지자적 시각을 가집시다. 왕을 승복시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승리의 믿음을 가집시다. 하나님께 영광! 주님 영광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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