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세우신 가정 (시127:1-5)
본문
오늘은 주님이 세우신 가정이란 제목으로 가정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시간에 우리 모두 엄숙한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가정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어 보았으면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선물을 두 가지 주셨습니다.
첫째는 교회라고 하는 선물이요 두 번째는 가정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천기창조 최초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교회란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시고 구속받은 인간이 있는 곳을 말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에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가정이란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고 장차 태어날 약속된 자녀가 있는 곳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교회와 가정은 우리 주님께서 세우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를 사전에 준비된 교회관없이 함부로 구멍가게 세우듯이 세워서는 안 될 것이요 가정도 가정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마치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전세내고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전세내 듯 서로 조건이 맞기만 하면 같이 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 모두 분명히 이해하고 지나가야 할 사실은 우리의 교회와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점입니다.
1. 주님이 세우신 우리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 법칙을 따라 그 법칙을 준수하며 살아갈 때 참 행복이 있습니다. 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담이 혼자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함으로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 주심으로 세워진 것이 인류 최초의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에 천지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니 좋았더라”란 말씀을 계속하셨습니다(창 1:4.10.12.18.21.25.31). 그러나 2:18절을 보면 아담이 독처하는 것만은 “좋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남자가 혼자 사는 것을 하나님도 딱하게 여기셨습니다. 옛날부터 인간이 가지는 4대 고독이 있다고 했습니다. 홀아비와 과부와 자녀없이 홀로 사는 것 그리고 부모없이 고아로 사는 것이 그 4대 고독에 해당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보시기도 민망스러운 아담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 즉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이때부터 남자는 역사의 집을 짓고 여자는 집을 꾸미는 배필이 되어 하나의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에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을 아담이라 하시고 여자를 만드신 후에 그 남자가 비로소 남자가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자가 있기 전에는 남자가 남자가 아니고 그냥 사람이고 아담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여자의 명칭도 돕는 배필 여자 하와로 달리 불리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남자는 ‘이쉬’ 여자는 ‘이솨’라고 하는데 이는 피차가 상대적 존재란 뜻입니다. 마치 한문 글자의 인(人)자와 같습니다. 남자는 여자없이 사람이 되지못하고 여자는 남자없이 사람 구실을 못한다는 뜻입니다. 부부는 서로 상관적이며 보완적인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남자는 집을 짓고 여자는 집을 가꾸는 것입니다. 어반 홈즈는 인간은 관계적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집을 세우신 하나님의 창조적인 원리입니다. 남편의 행복이 따로 있고 아내의 행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행복하면 아내도 행복하고 아내가 행복하면 남편도 행복합니다. 아내가 왕후가 되려면 남편을 임금님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2. 주님이 세우신 우리 가정은 매일 매일 아담이 하와를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깜짝 놀랄 사랑의 발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 인간에게 사랑의 속성을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는 사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속성이 대상이 없을 때는 잠재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잠재해 있다가 갑자기 대상이 나타날 때는 본능적으로 큰 충격과 함께 강하게 발동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23절에서는 아담이 이런 충격 때문에 전혀 꿈에도 보지 못했던 여자에게 “너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라고 사랑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하고 상상해 봅시다. 아담의 마음속에 잠재적으로 도사리고 있었던 사랑의 본능적 욕구가 갑자기 그 본능을 충족시킬 수있는 대상을 발견했을 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너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때 아담의 얼굴은 달아올랐을 것이요 굉장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사람의 발견, 사랑의 충격이라고 부릅니다. 한국 어느 교회에 노총각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결혼하라고 해도 결혼은 않고 선만 수십 번보고 결정을 못하였습니다. 하루는 어머니 집사님께서 목사님께 아들을 권면하여 결혼 좀 시켜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이 청년을 불러 결혼을 안 할거냐고 묻자 그 청년은 좋은 대상만 나타나면 결혼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어떤 대상이 좋은 대상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마음씨 좋고 인물 좋고 학벌 좋고 집안 좋고 믿음 좋으면 결혼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그것 참 안됐구먼, 그런 처녀가 딱하나 있었는데 그냥 놓치고 말았군.” 그러자 청년은 눈이 동그래지면서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 처녀는 벌써 결혼해 버렸어. 그 처녀는 OO년도에 나와 결혼했지.”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입니까 원래부터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상대자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예술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을 가지고 마음씨도 좋게 만들 수 있고 인물도 예쁘게 만들 수 있으며 학벌도 집안도 좋게 만들 수 있고 믿음 없는 것도 믿음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발견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우리 가정을 가장 이상적인 가정으로 유지해 가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사랑의 새 발견을 해야 합니다. 단점을 보지 말고 장점을 발견해야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벧전 4:8). 성경에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했는데 실로 눈의 작용은 신비합니다(마6:22). 사랑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천하가 다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입니다. 가정은 사랑이 공동체요, 사랑의 현장입니다.
3. 주님이 세우신 가정은 조상들의 믿음이 일관성 있게 후손들에게 연결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여호와의 증거를 저희 후손에게 알게 하라고 하셨습니다(시 78:5). 이 말씀은 가장 이상적인 가정은 삼대 즉 할아버지, 아버지, 내가 한 가정에서 사는 가정을 뜻합니다. 성서에 나타난 히브리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들의 주체성을 말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가내 삼대를 말합니다(출 3:6;4:5). 이 말을 우리말로 바꾼다면 우리 할아버지의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인류 학자인 마가릿 미드는 말하기를 삼대가 함께 살면 조상의 문화, 조상의 역사가 후손들에게 잘 전승될 뿐 아니라 그 후손들에 의해서 월등히 뛰어난 새 역사가 창조된다고 했습니다. 옛 한문 글에도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예수를 잘 믿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장로님이고 아버지는 집사님이며 손자는 10세된 주일 학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10세된 손자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눈이 침침해 지더니 날이 갈수록 앞이 캄캄해진다고 합니다. 온 집안이 소동이 나고 교회까지 동원되어 기도를 합니다. 성도가 시험들 때는 온 교회가 합심하여 중보 기도를 해야 합니다(행 12:5). 목사님께서 기도하기 위해 한 밤중에 교회에 갔더니 벌써 누구인가가 강단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저희 가정이 삼대째 믿음의 가정이란 사실을 세상 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왜 하필이면 저 어린것이 눈을 잃어야 합니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 늙은 것의 눈을 가져가시고 어린것에게 눈을 다시 보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눈물 어린 애절한 기도였습니다. 장로님은 밤새 같은 기도를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집에 와서 조반을 먹는데 난데없이 어린것이 소리를 지릅니다. “할아버지! 내 눈이 보인다! 다시 보인다! 다 보인다!” 이 때 이 아이의 눈은 완전히 고쳐졌습니다. 누가 이 아이의 눈을 고쳐 주었습니까 약이 아닙니다. 병원도 아닙니다. 의사도 아닙니다. 누가 이 아이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까 할아버지의 기도, 할아버지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우리 할아버지의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4.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은 조상들의 복을 자손들이 받고 자손들의 받은 그 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정입니다. 성경의 역사를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복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에 천지와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을 다 창조해 주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리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 또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창 1:28). 그러나 섭섭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순종하지 못하고 거역함으로 그 복을 놓친 것뿐입니다(사 1:19,20). 신명기 28장과 시편 128:1 시편 133편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가정에는 복을 주시되 헐몬산의 이슬처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옛날 중국의 어느 임금님께서 민정을 살피기 위해 평복 차림으로 시골로 가셨습니다. 백발 노인이 과수원에서 손질을 하는 것을 보고 노인의 나이를 물었습니다. 노인이 세살이라고 답하자 왜 세살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노인이 대답하기를 철든지 3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세살이라고 답했습니다. 왕이 묻기를 노인이 집에서 편히 쉬지 않고 왜 이렇게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나는 나의 할아버지와 나의 아버지께서 심은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내가 심은 나무에서 먼 훗날 내 아들, 내 손자들이 열매를 따먹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왕은 그 대답이 너무도 좋아서 금덩이 하나를 노인에게 하사했습니다. 그리고서 또 묻기를 이 나무에서는 언제쯤 열매를 따먹게 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 나무로 인하여 이미 임금님으로부터 금덩어리를 받았으니 이 나무의 열매는 이미 따먹은 것이지요 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임금님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금덩이를 마저 노인에게 하사했습니다. 자손을 생각하고 후손을 위해서 믿음으로 사는 가정이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헐몬산의 새벽 이슬이 시온의 산에 넘치고 아론의 머리에 붓는 기름이 옷깃에 내려 흐른다는 말씀은 바로 이런 것을 뜻합니다. 조상들의 복을 후손들이 받는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가정을 하나님의 창조 법칙에 따라 살며 날마다 사랑을 재발견하는 가정으로 만듭시다. 또 우리의 믿음을 일관성 있게 자손들에게 물려주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하나님께 영광을!
첫째는 교회라고 하는 선물이요 두 번째는 가정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천기창조 최초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교회란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시고 구속받은 인간이 있는 곳을 말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에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가정이란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고 장차 태어날 약속된 자녀가 있는 곳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교회와 가정은 우리 주님께서 세우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를 사전에 준비된 교회관없이 함부로 구멍가게 세우듯이 세워서는 안 될 것이요 가정도 가정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마치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전세내고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전세내 듯 서로 조건이 맞기만 하면 같이 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 모두 분명히 이해하고 지나가야 할 사실은 우리의 교회와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점입니다.
1. 주님이 세우신 우리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 법칙을 따라 그 법칙을 준수하며 살아갈 때 참 행복이 있습니다. 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담이 혼자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함으로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 주심으로 세워진 것이 인류 최초의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에 천지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니 좋았더라”란 말씀을 계속하셨습니다(창 1:4.10.12.18.21.25.31). 그러나 2:18절을 보면 아담이 독처하는 것만은 “좋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남자가 혼자 사는 것을 하나님도 딱하게 여기셨습니다. 옛날부터 인간이 가지는 4대 고독이 있다고 했습니다. 홀아비와 과부와 자녀없이 홀로 사는 것 그리고 부모없이 고아로 사는 것이 그 4대 고독에 해당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보시기도 민망스러운 아담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 즉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이때부터 남자는 역사의 집을 짓고 여자는 집을 꾸미는 배필이 되어 하나의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에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을 아담이라 하시고 여자를 만드신 후에 그 남자가 비로소 남자가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자가 있기 전에는 남자가 남자가 아니고 그냥 사람이고 아담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여자의 명칭도 돕는 배필 여자 하와로 달리 불리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남자는 ‘이쉬’ 여자는 ‘이솨’라고 하는데 이는 피차가 상대적 존재란 뜻입니다. 마치 한문 글자의 인(人)자와 같습니다. 남자는 여자없이 사람이 되지못하고 여자는 남자없이 사람 구실을 못한다는 뜻입니다. 부부는 서로 상관적이며 보완적인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남자는 집을 짓고 여자는 집을 가꾸는 것입니다. 어반 홈즈는 인간은 관계적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집을 세우신 하나님의 창조적인 원리입니다. 남편의 행복이 따로 있고 아내의 행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행복하면 아내도 행복하고 아내가 행복하면 남편도 행복합니다. 아내가 왕후가 되려면 남편을 임금님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2. 주님이 세우신 우리 가정은 매일 매일 아담이 하와를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깜짝 놀랄 사랑의 발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 인간에게 사랑의 속성을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는 사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속성이 대상이 없을 때는 잠재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잠재해 있다가 갑자기 대상이 나타날 때는 본능적으로 큰 충격과 함께 강하게 발동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23절에서는 아담이 이런 충격 때문에 전혀 꿈에도 보지 못했던 여자에게 “너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라고 사랑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하고 상상해 봅시다. 아담의 마음속에 잠재적으로 도사리고 있었던 사랑의 본능적 욕구가 갑자기 그 본능을 충족시킬 수있는 대상을 발견했을 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너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때 아담의 얼굴은 달아올랐을 것이요 굉장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사람의 발견, 사랑의 충격이라고 부릅니다. 한국 어느 교회에 노총각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결혼하라고 해도 결혼은 않고 선만 수십 번보고 결정을 못하였습니다. 하루는 어머니 집사님께서 목사님께 아들을 권면하여 결혼 좀 시켜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이 청년을 불러 결혼을 안 할거냐고 묻자 그 청년은 좋은 대상만 나타나면 결혼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어떤 대상이 좋은 대상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마음씨 좋고 인물 좋고 학벌 좋고 집안 좋고 믿음 좋으면 결혼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그것 참 안됐구먼, 그런 처녀가 딱하나 있었는데 그냥 놓치고 말았군.” 그러자 청년은 눈이 동그래지면서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 처녀는 벌써 결혼해 버렸어. 그 처녀는 OO년도에 나와 결혼했지.”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입니까 원래부터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상대자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예술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을 가지고 마음씨도 좋게 만들 수 있고 인물도 예쁘게 만들 수 있으며 학벌도 집안도 좋게 만들 수 있고 믿음 없는 것도 믿음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발견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우리 가정을 가장 이상적인 가정으로 유지해 가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사랑의 새 발견을 해야 합니다. 단점을 보지 말고 장점을 발견해야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벧전 4:8). 성경에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했는데 실로 눈의 작용은 신비합니다(마6:22). 사랑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천하가 다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입니다. 가정은 사랑이 공동체요, 사랑의 현장입니다.
3. 주님이 세우신 가정은 조상들의 믿음이 일관성 있게 후손들에게 연결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여호와의 증거를 저희 후손에게 알게 하라고 하셨습니다(시 78:5). 이 말씀은 가장 이상적인 가정은 삼대 즉 할아버지, 아버지, 내가 한 가정에서 사는 가정을 뜻합니다. 성서에 나타난 히브리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들의 주체성을 말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가내 삼대를 말합니다(출 3:6;4:5). 이 말을 우리말로 바꾼다면 우리 할아버지의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인류 학자인 마가릿 미드는 말하기를 삼대가 함께 살면 조상의 문화, 조상의 역사가 후손들에게 잘 전승될 뿐 아니라 그 후손들에 의해서 월등히 뛰어난 새 역사가 창조된다고 했습니다. 옛 한문 글에도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예수를 잘 믿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장로님이고 아버지는 집사님이며 손자는 10세된 주일 학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10세된 손자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눈이 침침해 지더니 날이 갈수록 앞이 캄캄해진다고 합니다. 온 집안이 소동이 나고 교회까지 동원되어 기도를 합니다. 성도가 시험들 때는 온 교회가 합심하여 중보 기도를 해야 합니다(행 12:5). 목사님께서 기도하기 위해 한 밤중에 교회에 갔더니 벌써 누구인가가 강단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저희 가정이 삼대째 믿음의 가정이란 사실을 세상 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왜 하필이면 저 어린것이 눈을 잃어야 합니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 늙은 것의 눈을 가져가시고 어린것에게 눈을 다시 보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눈물 어린 애절한 기도였습니다. 장로님은 밤새 같은 기도를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집에 와서 조반을 먹는데 난데없이 어린것이 소리를 지릅니다. “할아버지! 내 눈이 보인다! 다시 보인다! 다 보인다!” 이 때 이 아이의 눈은 완전히 고쳐졌습니다. 누가 이 아이의 눈을 고쳐 주었습니까 약이 아닙니다. 병원도 아닙니다. 의사도 아닙니다. 누가 이 아이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까 할아버지의 기도, 할아버지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우리 할아버지의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4.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은 조상들의 복을 자손들이 받고 자손들의 받은 그 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정입니다. 성경의 역사를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복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에 천지와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을 다 창조해 주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리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 또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창 1:28). 그러나 섭섭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순종하지 못하고 거역함으로 그 복을 놓친 것뿐입니다(사 1:19,20). 신명기 28장과 시편 128:1 시편 133편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가정에는 복을 주시되 헐몬산의 이슬처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옛날 중국의 어느 임금님께서 민정을 살피기 위해 평복 차림으로 시골로 가셨습니다. 백발 노인이 과수원에서 손질을 하는 것을 보고 노인의 나이를 물었습니다. 노인이 세살이라고 답하자 왜 세살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노인이 대답하기를 철든지 3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세살이라고 답했습니다. 왕이 묻기를 노인이 집에서 편히 쉬지 않고 왜 이렇게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나는 나의 할아버지와 나의 아버지께서 심은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내가 심은 나무에서 먼 훗날 내 아들, 내 손자들이 열매를 따먹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왕은 그 대답이 너무도 좋아서 금덩이 하나를 노인에게 하사했습니다. 그리고서 또 묻기를 이 나무에서는 언제쯤 열매를 따먹게 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 나무로 인하여 이미 임금님으로부터 금덩어리를 받았으니 이 나무의 열매는 이미 따먹은 것이지요 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임금님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금덩이를 마저 노인에게 하사했습니다. 자손을 생각하고 후손을 위해서 믿음으로 사는 가정이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헐몬산의 새벽 이슬이 시온의 산에 넘치고 아론의 머리에 붓는 기름이 옷깃에 내려 흐른다는 말씀은 바로 이런 것을 뜻합니다. 조상들의 복을 후손들이 받는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가정을 하나님의 창조 법칙에 따라 살며 날마다 사랑을 재발견하는 가정으로 만듭시다. 또 우리의 믿음을 일관성 있게 자손들에게 물려주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하나님께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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