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경건 (약1:26-27)
본문
1. 남을 속이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자기 기만 속에 사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기만 속에 사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자기 기만 속에 살면서도 자기 기만 속에 사는 줄조차 모르는 사람입니다. 더욱이, 영원한 구원과 멸망이 걸려 있는 종교를 신봉하는 것과 관련된 자기 기만이란 너무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닌게아니라, 종교인들 중에는 교리를 알고 논하는 것으로 스스로 신앙심 깊은 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한편엔 실제로 종교적 교훈을 실행하는 참으로 종교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 안에서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제까지 목회를 해 오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반된 자기의 감정과 생각대로 하면서 스스로 신앙 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을 심심치 않게 보아 왔습니다. 심지어는 마귀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스스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수행한다고 생각하는 교인도 본 적이 있습니다.
2. 헛된 경건 주님의 동생인 야고보는,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의 경건하다는 트레스코스(θρσ-κο)로서, ‘종교적인’, ‘신앙심 깊은’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뒤의 경건은 트레스케이아(θρσκεα)로서, 기도나 금식 또는 헌금이나 예배 등의 종교 의식을 준수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의 취지는, 누구든지 스스로 종교적이라든가 신앙심이 깊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종교 의식을 열심히 준수하지만, 그 모든 종교 의식 준수가 헛것이 될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신앙심 깊다고 생각하는 종교인들은, 결국 자기 기만 가운데 빠져 있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을 많이 바치고, 금식하는 등 기독교의 모든 의식을 열심히 준수하면서 스스로 신앙심이 깊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인들이 다음의 두 가지 사항에 걸려 넘어지면,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헛것으로 여기시고 맙니다.
첫째는,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고 모든 종교 의식에 열심을 다한다 하더라도, 혀에 재갈을 먹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혀를 많이 부리면, 으레 실수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종교적이라는 미명 아래 말을 삼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내세워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아 왔습니다. 또, 교리를 내세워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그 많던 재산을 다 빼앗기고, 사랑하는 십남매를 한 순간에 잃어버리고, 그 엄청난 고통에 자신이 살아 있는 건지 죽은 것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욥은, 악창까지 생겨 잿더미에 앉아 기와 조각으로 쉴 새 없이 긁어 대야 했습니다. 아내마저도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고할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욥을 위로한답시고 믿음이 좋다고 자부하는 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자기들보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욥에게 아주 장황하게 논설을 폈습니다. 요지는 전통적인 종교 교리로 보나, 경험상으로 보나, 하나님의 속성으로 보나 욥의 불행은 죄의 값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욥의 죄가 아니면 욥의 자식들의 죄 값이라고 힐난함으로써, 가뜩이나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고통 중에 있는 욥에게 고통을 더욱 가중시켜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만 구원해 주시고, 이방인은 반드시 멸망시키신다는 교리에 사로잡혀 있던 요나는, 니느웨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셨다고 하나님을 원망한 적이 있습니다. 실상 믿는 사람들 중에는 자기 뜻대로, 자기 소원대로 해 주시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불평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혀는 많이 부리면 부릴수록 그만큼 더 실수가 많은 법이므로, 할 수 있는 한 혀를 아끼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블레이크는 “나는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힘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 나는 죽이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다. 나는 가정과 교회와 국가도 파괴할 수 있다. 나는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파괴하였다. 나는 바람의 날개를 타고 여행한다. 아무리 순결한 사람도 내게는 무력하다. 나는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경멸한다. 나는 나의 희생자를 전 역사와 전 세계에 갖고 있다. 나는 바다의 모래보다 더 많은 노예를 거느리고 있다. 나는 결코 망각하지 않으며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내 이름은 중상 모략이다.” 라고 혀의 엄청난 파괴력에 대해 썼습니다. 우리의 경건을 헛것이 되게 하는
둘째 요인은,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 자기 기만이란 혀를 재갈 먹이지 않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칼빈은 “자기 기만이란 위선자가 빠지는 독설의 근거이다.”라고 하였고, 웨슬레는 “남을 비판하고 힐난하는 것이 곧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독설과 비난을 퍼붓고, 원망과 정죄를 일삼는 것은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고, 더 나아가 신과 같은 존재로 인정하는 자기 기만인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적 의식이나 예전을 준수하면서 혀를 재갈 먹이지 않고, 또 자기 마음을 속이는 교인들의 모든 경건은 헛것입니다.
3. 참된 경건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경건이 무엇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은 어떤 교리나 윤리적 규범에 준하는 경건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어야 합니다. 이 참된 경건이란
첫째,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사랑과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종교 의식과 예전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순결한 사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실천이 종교적인 의식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즉, 강도 만난 사람이 다 죽게 되었을 때에, 그를 보고도 못 본 척하고 그냥 지난 간 사람들은 제사장과 레위인 곧 종교 지도자들인 반면에, 그를 돌보아 준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의 비유의 의도는 참 종교란 사랑의 실천이며, 그것이 바로 이웃이 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갈라디아서 5:6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라고 단언했습니다. 참된 경건의
둘째 요소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것입니다. 여기서 ‘세속’ 또는 ‘세상’이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인간 생활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온갖 수단 방법을 다하여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사단이 지배하는 생활 양식을 뜻하는 것입니다. 포티트는 “우리 주위에 있는 전 세계는 악으로 가득차 있다. 그 생활의 원칙이나 실제 행동이나 공상하는 이성 등이 거의 다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들에게 순종하는 순간, 순결한 영혼은 마비되며 죄로 물들여진다.”라고 하였습니다. 죄악 세상에 물들지 않고 믿음의 순결을 지켜 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4. 맺음말 인간의 지체 중에 가장 통제하기 어려운 것이 혀입니다. 혀를 재갈 먹이지 않거나 자기 기만에 빠지는 사람의 모든 경건은 헛것에 불과합니다.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나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죄악의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 헛된 경건 주님의 동생인 야고보는,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의 경건하다는 트레스코스(θρσ-κο)로서, ‘종교적인’, ‘신앙심 깊은’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뒤의 경건은 트레스케이아(θρσκεα)로서, 기도나 금식 또는 헌금이나 예배 등의 종교 의식을 준수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의 취지는, 누구든지 스스로 종교적이라든가 신앙심이 깊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종교 의식을 열심히 준수하지만, 그 모든 종교 의식 준수가 헛것이 될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신앙심 깊다고 생각하는 종교인들은, 결국 자기 기만 가운데 빠져 있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을 많이 바치고, 금식하는 등 기독교의 모든 의식을 열심히 준수하면서 스스로 신앙심이 깊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인들이 다음의 두 가지 사항에 걸려 넘어지면,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헛것으로 여기시고 맙니다.
첫째는,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고 모든 종교 의식에 열심을 다한다 하더라도, 혀에 재갈을 먹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혀를 많이 부리면, 으레 실수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종교적이라는 미명 아래 말을 삼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내세워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아 왔습니다. 또, 교리를 내세워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그 많던 재산을 다 빼앗기고, 사랑하는 십남매를 한 순간에 잃어버리고, 그 엄청난 고통에 자신이 살아 있는 건지 죽은 것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욥은, 악창까지 생겨 잿더미에 앉아 기와 조각으로 쉴 새 없이 긁어 대야 했습니다. 아내마저도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고할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욥을 위로한답시고 믿음이 좋다고 자부하는 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자기들보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욥에게 아주 장황하게 논설을 폈습니다. 요지는 전통적인 종교 교리로 보나, 경험상으로 보나, 하나님의 속성으로 보나 욥의 불행은 죄의 값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욥의 죄가 아니면 욥의 자식들의 죄 값이라고 힐난함으로써, 가뜩이나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고통 중에 있는 욥에게 고통을 더욱 가중시켜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만 구원해 주시고, 이방인은 반드시 멸망시키신다는 교리에 사로잡혀 있던 요나는, 니느웨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셨다고 하나님을 원망한 적이 있습니다. 실상 믿는 사람들 중에는 자기 뜻대로, 자기 소원대로 해 주시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불평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혀는 많이 부리면 부릴수록 그만큼 더 실수가 많은 법이므로, 할 수 있는 한 혀를 아끼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블레이크는 “나는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힘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 나는 죽이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다. 나는 가정과 교회와 국가도 파괴할 수 있다. 나는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파괴하였다. 나는 바람의 날개를 타고 여행한다. 아무리 순결한 사람도 내게는 무력하다. 나는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경멸한다. 나는 나의 희생자를 전 역사와 전 세계에 갖고 있다. 나는 바다의 모래보다 더 많은 노예를 거느리고 있다. 나는 결코 망각하지 않으며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내 이름은 중상 모략이다.” 라고 혀의 엄청난 파괴력에 대해 썼습니다. 우리의 경건을 헛것이 되게 하는
둘째 요인은,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 자기 기만이란 혀를 재갈 먹이지 않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칼빈은 “자기 기만이란 위선자가 빠지는 독설의 근거이다.”라고 하였고, 웨슬레는 “남을 비판하고 힐난하는 것이 곧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독설과 비난을 퍼붓고, 원망과 정죄를 일삼는 것은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고, 더 나아가 신과 같은 존재로 인정하는 자기 기만인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적 의식이나 예전을 준수하면서 혀를 재갈 먹이지 않고, 또 자기 마음을 속이는 교인들의 모든 경건은 헛것입니다.
3. 참된 경건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경건이 무엇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은 어떤 교리나 윤리적 규범에 준하는 경건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어야 합니다. 이 참된 경건이란
첫째,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사랑과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종교 의식과 예전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순결한 사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실천이 종교적인 의식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즉, 강도 만난 사람이 다 죽게 되었을 때에, 그를 보고도 못 본 척하고 그냥 지난 간 사람들은 제사장과 레위인 곧 종교 지도자들인 반면에, 그를 돌보아 준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의 비유의 의도는 참 종교란 사랑의 실천이며, 그것이 바로 이웃이 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갈라디아서 5:6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라고 단언했습니다. 참된 경건의
둘째 요소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것입니다. 여기서 ‘세속’ 또는 ‘세상’이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인간 생활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온갖 수단 방법을 다하여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사단이 지배하는 생활 양식을 뜻하는 것입니다. 포티트는 “우리 주위에 있는 전 세계는 악으로 가득차 있다. 그 생활의 원칙이나 실제 행동이나 공상하는 이성 등이 거의 다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들에게 순종하는 순간, 순결한 영혼은 마비되며 죄로 물들여진다.”라고 하였습니다. 죄악 세상에 물들지 않고 믿음의 순결을 지켜 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4. 맺음말 인간의 지체 중에 가장 통제하기 어려운 것이 혀입니다. 혀를 재갈 먹이지 않거나 자기 기만에 빠지는 사람의 모든 경건은 헛것에 불과합니다.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나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죄악의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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