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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노릇하려면 생기를 얻어야 한다 (겔37:1-14)

본문

한 성도가 담임자를 찾아와 하소연했습니다. “하나님은 도무지 제사정을 모르시는가 봅니다. 제 인생의 문은 모두 닫혀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제사정을 아신다면, 어떻게 모든 문을 닫히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 담임자는 이런 말로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탈리아 속담에, ‘하나님은 문을 닫으시되, 창문만은 열어두신다’고 했습니다. 형제님, 닫힌 문만 바라보며 절망하지 말고, 창문을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우리는, 그 열린 창문을 통하여, 주께로부터 삶의 기운(생기)을 얻어서,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바라건대, 부정적인 삶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항상 기쁘고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삶과 죽음, 이 낱말처럼 극단적인 대비를 이루는 것은 없으리라고 여겨집니다. 남자와 여자, 낮과 밤, 물과 불, 하늘과 땅처럼, 전혀 어울릴 수 없거나 상극을 이루는 것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거나 융화가 되어서, 통합된 단어와 개념을 탄생시키고 있습니다. 남녀는 사람으로, 낮과 밤은 하루, 하늘과 땅은 천지(세상)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물과 불은 서로 융화를 이뤄 온수(溫水)가 되기도 합니다. 거의 모든 것들이 다 이런 식으로 음양(陰陽)의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론, 삶과 죽음을 하나로 묶어, 인생이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삶과 죽음은, 결코 하나가 되거나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인생(人生)이라는 말 자체가 ‘살아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 어찌 죽음까지 통틀어 인생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한 번 죽으면, 그 인생은 완전히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세를 믿게 되면, 이야기는 180도로 달라집니다. 사람이 죽더라도, 그 인생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삶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그 삶이란 ‘영원한 인생’을 일컫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서도, 계시던 곳에서 더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야, 주께서는 베다니에 가셨습니다. 그것은, 나사로를 통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주께서 늦게 오신 것에 대해서,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주께서 여기 계셨으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불평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주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죽은 자를 일으키고, 그들에게 다시 생명을 주는 자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는다 해도 다시 살 것이다.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않을 것(요11:25-26)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랍고 위대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이신 예수는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고로, 그 예수를 믿고서 그의 가르침대로만 살면, 결코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사실, 육신의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육신은 흙에서 왔으니, 우리가 죽게 되면, 그 몸은 흙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정말 중요한 사실은 ‘성령님을 모시고 사느냐’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떠나서 살게 될 경우, 그 인생은 끝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을 떠나 살면, 사람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 구실을 못하면 ‘살아있는 송장’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젠가는 땅에 묻혀서 흙으로 돌아갈 육신만 남아 있을 뿐, 그 인생은 이미 끝장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님 따라 살면 생명과 평안을 누리지만, 육신 따라 살면 죽게 된다(롬8:6)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 인생은 ‘목숨이 붙어 있느냐’하는 것보다, ‘사람다운 삶을 살고 있는가’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죽고 사는 것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계명을 배워서 지켜 사는 것만이, 가장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고, 또한 그 말씀을 지켜 살아서, 사람다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성령님의 뜻을 거스르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육신의 욕망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있는 자아(自我)입니다. 이 자아가 죽어야,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육신의 뜻대로 살 경우,
1.사람 구실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스스로 생각할 때에, 어느 정도쯤이나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까 어느 초등학생 300명에게 ‘인생이란 무엇인가’하고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제일 많은 50명이 ‘매일 즐겁게 노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공부하러 학교에 다니는 것’이라고 했으며, 300명 가운데서 5명만이 ‘서로 도와주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대답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비록 초등학생들이기는 하지만, ‘즐겁게 노는 것’과 ‘서로 도와주며 사는 것’과의 차이는, 무려 10배나 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자라면 생각이 바뀌겠지만, 어린이가 어른들의 거울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오늘 우리 나라 사람들의 가치관을 짐작해 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바울은육신의 뜻대로 산 사람 중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 일도 없고, 또한 결코 지키려 하지도 않는다(롬8:7)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육신의 욕망대로 살면, 사람 구실을 하면서 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영적인 형상을, 에스겔 선지자가 보았습니다. 주의 영이 인도하는 대로 가봤더니, 마른 뼈들이 골짜기에 가득 널려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이 뼈들과 마찬가지니, 그들은 지금 생명력도 없고 희망도 사라졌다(롬37:11)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보시는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겠습니까 에스겔 선지자가 살던 이스라엘과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 마음에 들도록 살기 위하여 힘쓰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골짜기마다 교회가 없는 곳이 없는 우리 나라지만, 1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를 확실히 믿고 사는 이가 얼마나 될까 의심스럽습니다. 주께서는, 사람들이 믿고 따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림으로써, 당신이 죽은 자를 일으키는 ‘생명의 주’가 되신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좀처럼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주의 이름을 열심히 부르기는 하지만, 주의 말씀과 권능을 두려워하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생명력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2육신의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육신 따라 살면 죽게 된다(롬8:6)는 말씀을 수없이 들었건만,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것은 곧 주의 명령을 거역하는 일이며, 그 결과로써 주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육신이 편한 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히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를 일으키며 생명을 주시는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평안함과 기쁨을 갖고 살게 된다는 것을, 아직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가 본 골짜기의 마른 뼈들처럼, 3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자기 속에 예수의 영(靈)이 계시지 않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롬8:8)고 했습니다. 우리 속에 성령님이 살아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이 없는 사람이란, 계명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보다는, 육신의 즐거움과 편안함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살과 힘줄이 없어서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성령님이 그 속에서 떠나버림으로 말미암아, 신앙의 생명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바로 그런 형상을 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는, 육신의 정욕을 못박고 성령님으로 거듭나는, 삶의 전환점입니다. 주께서 그 전환점의 표지판을 세워주셨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후예(後裔)들입니다. 이제, 예수를 다시 살리신 그 부활의 생기(生氣)를, 우리가 듬뿍 받아야 하겠습니다.
2.그래서, 인간답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죄에 물든 자아(自我)가 시키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로 하여금,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성령님의 지시를 받아서 살아가야 합니다. 1그래야만, 사람의 온전한 모습을 회복할 수가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마른 뼈들을 향하여 말씀을 전하니, 마른 뼈들이 연결되고 살이 붙었습니다. 그리고, 주의 명령대로 숨을 쉬기 시작하니, 그들도 숨을 쉬고 다시 살아나서, 군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먼저 우리가 할 일은, 성령님께서 일러주시는 말씀대로 철저하게 사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주께서 일러주신 말씀을 사실 그대로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결코 타협의 여지를 둬서는 안 됩니다.
2사람의 모습을 회복했으면, 이제는 사람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라고 하면서 성도답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도다운 모습을 지니려면, 다시 말해서 인간 본래의 모습대로 살아가려면, 육신의 욕망을 이겨내고 성령님께서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는 이상한 예배가 드려졌습니다. 예배에 참석한 이들은 강단을 향해 줄서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강단에 놓여 있는 관을 들여다봐야 했습니다. 그 관에는 큰 거울이 하나 있어서, 사람들이 관을 들여다볼 때,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관속에 죽은 시체로 놓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얼굴 모습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요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확실해서, 평안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그 영혼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면서 죽은, 그런 표정을 하고 있을까요 육신의 욕망을 이겨내고, 성령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래서,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그래야만, 천국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증거를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오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서, 생명이 있는 신앙을 지니고 3주가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예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것은, 당신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물론, 믿는다는 말은, 행동이 포함된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생명의 주가 되셔서,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살면,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한순간의 육적인 만족을 추구하기보다는, 영생을 주시는 주님의 뒤를 따라가도록 합시다. 그러면, 잠시 주를 따르는 고통이 있겠으나, 그 고통 다음에는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마른 뼈의 형상을 벗어버리고, 생기가 넘치는 성령님의 사람이 되어, 사람다운 모습을 지니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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