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낮추고 또 낮춰야 합니다 (사50:4-9,)
본문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존귀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잠언서에서겸손이 존귀의 앞잡이(15:33)라고 했습니다. 새번역에는 ‘영광’이라 했습니다. 원어를 살펴보니, 영화롭거나 풍부하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을 복되게 살려면, 겸손함이 필수인 것입니다. 반면에,교만은 멸망의 선봉(잠16:18)이라 했으니, 인생을 망치고자 원할 경우, 교만한 자세를 취하면 됩니다. ‘멸망’의 원어를 살펴보니, 팔다리가 부러져서 못쓰게 되는 것처럼,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서 기자는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21:24)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존귀하고 풍부한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면 더욱 겸손하게 살아가야 할 것이고, 인생을 망치고 싶으면 교만한 자세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겸손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풀어나가야 할 아주 중요한 과제입니다.
왜냐하면, 주의 겸손을 본받아 사는 것이, 믿는 자에게 꼭 필요한 삶의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께서 보여주신 자세를 본받아 한다(빌2:5)고 말했던 것입니다. 주께서 보여주신 것은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신 ‘겸손’입니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존귀한 분이셨지만, 그 높고 귀한 자리에 집착하지 않으시고, 이 낮은 땅 위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님은 훨씬 더 자기를 낮추셔서,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침을 뱉고 손가락질하면서 조롱했건만, 예수님은 그 온갖 모욕을 다 감내하셨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자존심이 하나도 없거나, 그만한 잘못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높이실 때까지 자신을 낮추면서 사는 것이, 우리 인간이 취할 바람직한 태도인 까닭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그 겸손한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처음부터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직접 담당했던 백부장은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하나님 아들이었다(마27:54)”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정말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셔서, 십자가를 지기까지 낮추셨습니다. 죄는 하나도 없었지만, 죄인의 모양을 취하셨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죄인인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실상 별 볼일 없는 존재요, 죄 많은 인간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뭐가 잘났다고 그토록 자신을 드러내려고 애쓰는지,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을, 우리는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맹꽁이한테 누가 말하기를, “야, 네 배가 대단히 크구나!”하고 칭찬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맹꽁이는 그 칭찬에 신이 나가지고, 자기 배를 더 크게 부풀리려고 하다가, 그만 배가 터져서 죽었다고 하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이처럼 자신의 멸망을 내다보지 못한 채, 주책없이 자신을 높이려고 하거나,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자 애쓰는 이가 많습니다.
1.우리는,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낮춰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존심을 높이고 그 지위를 향상시키려 하다보니,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게 됩니다. 그 결과, 서로 갈등을 빚고 다툼을 일으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그래서, 피차 막대한 손해와 상처를 입게 되고, 나중에는 파멸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김 대통령도 보신다는 ‘은실이’가 한창 인기입니다. 은실이 아버지 장낙도는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으로서, 트럭 운전부터 시작한 사업가입니다. 그리고, 사업이 잘 되어서, 그 지역의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부자로서 만족하지 못하고, 국회의원이 되려는 욕심을 갖습니다. 돈을 웬만큼 벌자, 명예에 관심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여당인 공화당에 돈을 잔뜩 갖다 바쳤지만, 공천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국회의원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합니다. 그 결과야, 작가 마음에 따라 좌우되겠지만, 우리는 그의 앞날을 점쳐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많은 돈을 쏟아 붓지만 낙선할 것입니다. 그 여파로, 그 가정은 더 깊은 수렁에 빠지거나, 파산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보건대, 그는 국회의원 자격이 없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했는데, 가정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국가를 운영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처자식도 잘 돌보지 못하면서, 무슨 애국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먼저 할 일은, 가정을 잘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서라도, 그동안 번 돈을 가지고 불우한 이웃을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당신이야말로 국회의원 감’이라고 적극 추천한다면, 그때쯤 정치에 한 번 뛰어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꾸로 행하고 있습니다. 자기 주변부터 잘 보살필 생각을 하지 않고, 엉뚱한 데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데, 본인이 나서서 자기가 적임자라고 떠벌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주를 섬기는 우리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춰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끌어올리실 때까지, 자신을 쳐서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존귀한 인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앙을 가진 이가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것은,
1죽기까지 겸손히 자신을 낮추신 주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임을 받게 될 것(마23:12)이라는 주의 말씀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교회 지도자들까지도 스스로 높아지고자 애쓰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인 것은, 주께서 자기들보다 대중들의 인기가 높아서 더 존중을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기 질투심 때문에,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하늘에 있었지, 땅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지, 이 땅에서 명예와 부귀를 얻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물론, 주님은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2그러나, 우리는 부활의 영광을 믿지 못하고 있는 까닭에, 십자가의 고난을 멀리하거나 회피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영광은 십자가를 진 다음에나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괴로운 십자가를 지지 않고 부활의 영광만 누리려 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명과 책임은 외면하고서,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의 명예와 이익만을 탐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인이 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3그런 사람들은 서로 상대방을 미워하고 헐뜯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들이 다투는 모습을 보면 가관이 아닙니다.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고, 서로 상대방만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아무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지셨건만, 우리는 분명히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 잘못이 없노라고 강변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지는 사람이 드뭅니다. 내가 잘못했노라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책임질 생각을 하지 않고, 서로 상대방에게만 그 책임을 떠넘기려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함께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서로가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서로가 상대방에게 굴복하고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한 번, 우리가 본받고 따라가야 할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셨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변명도 없이 십자가를 달게 지셨습니다. 물론, 예수가 바보 천치는 아니셨습니다.
그런데, 왜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아무 잘못도 없이, 그 숱한 모욕을 다 당하셨을까요 공명정대하신 하나님께서 바르게 판단하여 주실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0:8에 있는 말씀입니다. 내게는 내 무죄를 증명해 주실 분이 계신다. 그분이 나를 변호하러 나에게 가까이 오셨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려야 합니다. 물론, 그때까지는 억울하고 속상한 일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 당하신 것처럼, 온갖 모욕을 다 감당해야 합니다. 변명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과는 차원이 다르니, 어떤 이야기를 해도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주께서 끌어올리실 때까지, 우리는 자신을 낮추며 살아야 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야말로,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십자가를 지면, 많은 사람이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한 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온 인류를 구원하셨듯이, 희생하는 한 사람이 있으면, 그가 속한 단체나 주변 사람들은 복을 누립니다. 노르웨이의 어느 도시에 커다란 건물이 하나 있는데, 그 건물에는 시계탑이 붙어 있습니다. 이 시계탑 밑에는 한 마리의 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건물을 지을 때, 한 일꾼이 잘못하여 높은 데서 미끄러졌습니다. 바로 그때, 양떼들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양떼 위에 ‘퍽’하고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자, 일꾼은 벌떡 일어났습니다. 아무 데도 다친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쌍하게도, 한 마리 양이 그 밑에 깔려 죽어 있었습니다. 그 일꾼은, 자기 대신 죽은 양을 기념하기 위해서, 시계탑 밑에다 양의 조각을 세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양처럼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살리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속한 사회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이미 주께서 죄의 문제는 해결하셨으니,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가볍습니다. 주의 뜻만 바로 알면, 기쁜 마음으로 질 수 있는 아름다운 십자가입니다.
1주께서 보여주신 삶의 자세를 바로 배워서, 그대로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기까지 자신을 낮추신 예수를 본받아야 합니다. 물론, 십자가를 지려면, 고난이 따릅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확신하고,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누가 무슨 흉을 보더라도, 끝까지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2자신을 낮추고 주만을 높여야 합니다. 일을 하다보면, 자신이 한 일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생깁니다. 이때, 이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영광은 주께만 돌려야 합니다. 이 땅에서 영광을 받으면, 하늘에서 받을 상급이 없습니다. 그러니, 내게 주어진 책임을 잘 감당하되, 계속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3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하늘로 끌어올리시리라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헛된 세상 명예를 추구하지 말고, 하늘의 영광만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을 낮출 수 있습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회와 단체는 더욱 밝아지게 될 것입니다. 은혜와 사랑이 넘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까지, 주님의 모습을 더욱 본받아서,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잠언서에서겸손이 존귀의 앞잡이(15:33)라고 했습니다. 새번역에는 ‘영광’이라 했습니다. 원어를 살펴보니, 영화롭거나 풍부하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을 복되게 살려면, 겸손함이 필수인 것입니다. 반면에,교만은 멸망의 선봉(잠16:18)이라 했으니, 인생을 망치고자 원할 경우, 교만한 자세를 취하면 됩니다. ‘멸망’의 원어를 살펴보니, 팔다리가 부러져서 못쓰게 되는 것처럼,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서 기자는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21:24)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존귀하고 풍부한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면 더욱 겸손하게 살아가야 할 것이고, 인생을 망치고 싶으면 교만한 자세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겸손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풀어나가야 할 아주 중요한 과제입니다.
왜냐하면, 주의 겸손을 본받아 사는 것이, 믿는 자에게 꼭 필요한 삶의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께서 보여주신 자세를 본받아 한다(빌2:5)고 말했던 것입니다. 주께서 보여주신 것은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신 ‘겸손’입니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존귀한 분이셨지만, 그 높고 귀한 자리에 집착하지 않으시고, 이 낮은 땅 위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님은 훨씬 더 자기를 낮추셔서,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침을 뱉고 손가락질하면서 조롱했건만, 예수님은 그 온갖 모욕을 다 감내하셨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자존심이 하나도 없거나, 그만한 잘못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높이실 때까지 자신을 낮추면서 사는 것이, 우리 인간이 취할 바람직한 태도인 까닭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그 겸손한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처음부터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직접 담당했던 백부장은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하나님 아들이었다(마27:54)”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정말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셔서, 십자가를 지기까지 낮추셨습니다. 죄는 하나도 없었지만, 죄인의 모양을 취하셨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죄인인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실상 별 볼일 없는 존재요, 죄 많은 인간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뭐가 잘났다고 그토록 자신을 드러내려고 애쓰는지,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을, 우리는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맹꽁이한테 누가 말하기를, “야, 네 배가 대단히 크구나!”하고 칭찬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맹꽁이는 그 칭찬에 신이 나가지고, 자기 배를 더 크게 부풀리려고 하다가, 그만 배가 터져서 죽었다고 하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이처럼 자신의 멸망을 내다보지 못한 채, 주책없이 자신을 높이려고 하거나,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자 애쓰는 이가 많습니다.
1.우리는,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낮춰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존심을 높이고 그 지위를 향상시키려 하다보니,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게 됩니다. 그 결과, 서로 갈등을 빚고 다툼을 일으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그래서, 피차 막대한 손해와 상처를 입게 되고, 나중에는 파멸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김 대통령도 보신다는 ‘은실이’가 한창 인기입니다. 은실이 아버지 장낙도는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으로서, 트럭 운전부터 시작한 사업가입니다. 그리고, 사업이 잘 되어서, 그 지역의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부자로서 만족하지 못하고, 국회의원이 되려는 욕심을 갖습니다. 돈을 웬만큼 벌자, 명예에 관심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여당인 공화당에 돈을 잔뜩 갖다 바쳤지만, 공천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국회의원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합니다. 그 결과야, 작가 마음에 따라 좌우되겠지만, 우리는 그의 앞날을 점쳐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많은 돈을 쏟아 붓지만 낙선할 것입니다. 그 여파로, 그 가정은 더 깊은 수렁에 빠지거나, 파산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보건대, 그는 국회의원 자격이 없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했는데, 가정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국가를 운영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처자식도 잘 돌보지 못하면서, 무슨 애국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먼저 할 일은, 가정을 잘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서라도, 그동안 번 돈을 가지고 불우한 이웃을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당신이야말로 국회의원 감’이라고 적극 추천한다면, 그때쯤 정치에 한 번 뛰어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꾸로 행하고 있습니다. 자기 주변부터 잘 보살필 생각을 하지 않고, 엉뚱한 데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데, 본인이 나서서 자기가 적임자라고 떠벌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주를 섬기는 우리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춰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끌어올리실 때까지, 자신을 쳐서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존귀한 인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앙을 가진 이가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것은,
1죽기까지 겸손히 자신을 낮추신 주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임을 받게 될 것(마23:12)이라는 주의 말씀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교회 지도자들까지도 스스로 높아지고자 애쓰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인 것은, 주께서 자기들보다 대중들의 인기가 높아서 더 존중을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기 질투심 때문에,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하늘에 있었지, 땅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지, 이 땅에서 명예와 부귀를 얻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물론, 주님은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2그러나, 우리는 부활의 영광을 믿지 못하고 있는 까닭에, 십자가의 고난을 멀리하거나 회피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영광은 십자가를 진 다음에나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괴로운 십자가를 지지 않고 부활의 영광만 누리려 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명과 책임은 외면하고서,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의 명예와 이익만을 탐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인이 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3그런 사람들은 서로 상대방을 미워하고 헐뜯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들이 다투는 모습을 보면 가관이 아닙니다.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고, 서로 상대방만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아무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지셨건만, 우리는 분명히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 잘못이 없노라고 강변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지는 사람이 드뭅니다. 내가 잘못했노라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책임질 생각을 하지 않고, 서로 상대방에게만 그 책임을 떠넘기려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함께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서로가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서로가 상대방에게 굴복하고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한 번, 우리가 본받고 따라가야 할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셨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변명도 없이 십자가를 달게 지셨습니다. 물론, 예수가 바보 천치는 아니셨습니다.
그런데, 왜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아무 잘못도 없이, 그 숱한 모욕을 다 당하셨을까요 공명정대하신 하나님께서 바르게 판단하여 주실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0:8에 있는 말씀입니다. 내게는 내 무죄를 증명해 주실 분이 계신다. 그분이 나를 변호하러 나에게 가까이 오셨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려야 합니다. 물론, 그때까지는 억울하고 속상한 일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 당하신 것처럼, 온갖 모욕을 다 감당해야 합니다. 변명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과는 차원이 다르니, 어떤 이야기를 해도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주께서 끌어올리실 때까지, 우리는 자신을 낮추며 살아야 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야말로,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십자가를 지면, 많은 사람이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한 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온 인류를 구원하셨듯이, 희생하는 한 사람이 있으면, 그가 속한 단체나 주변 사람들은 복을 누립니다. 노르웨이의 어느 도시에 커다란 건물이 하나 있는데, 그 건물에는 시계탑이 붙어 있습니다. 이 시계탑 밑에는 한 마리의 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건물을 지을 때, 한 일꾼이 잘못하여 높은 데서 미끄러졌습니다. 바로 그때, 양떼들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양떼 위에 ‘퍽’하고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자, 일꾼은 벌떡 일어났습니다. 아무 데도 다친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쌍하게도, 한 마리 양이 그 밑에 깔려 죽어 있었습니다. 그 일꾼은, 자기 대신 죽은 양을 기념하기 위해서, 시계탑 밑에다 양의 조각을 세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양처럼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살리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속한 사회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이미 주께서 죄의 문제는 해결하셨으니,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가볍습니다. 주의 뜻만 바로 알면, 기쁜 마음으로 질 수 있는 아름다운 십자가입니다.
1주께서 보여주신 삶의 자세를 바로 배워서, 그대로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기까지 자신을 낮추신 예수를 본받아야 합니다. 물론, 십자가를 지려면, 고난이 따릅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확신하고,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누가 무슨 흉을 보더라도, 끝까지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2자신을 낮추고 주만을 높여야 합니다. 일을 하다보면, 자신이 한 일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생깁니다. 이때, 이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영광은 주께만 돌려야 합니다. 이 땅에서 영광을 받으면, 하늘에서 받을 상급이 없습니다. 그러니, 내게 주어진 책임을 잘 감당하되, 계속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3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하늘로 끌어올리시리라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헛된 세상 명예를 추구하지 말고, 하늘의 영광만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을 낮출 수 있습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회와 단체는 더욱 밝아지게 될 것입니다. 은혜와 사랑이 넘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까지, 주님의 모습을 더욱 본받아서,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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