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의 것으로 그 생각을 바꿔라 (행10:34-43,)
본문
지난 해 여름, 아내가 교회 꽃밭에 있는 꽃을 가리키면서 ‘이 꽃 좀 한 번 보라’고 하기에, 그 꽃을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꽃의 모양이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아마 보신 분들은 그 아름답고 신기한 모습에 절로 감탄했을 것입니다. 그 꽃은 풍란의 일종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약 7년 전쯤, 김포로 간 최 권사가 시장 상인에게서 얻어다가 심은 것입니다. 그 난초는, 모양도 볼품없고 꽃도 피지 않아서, 교회 꽃밭에서 별로 그 존재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여름, 그처럼 아름답고 신기한 꽃을 피웠던 것입니다. 꽃이 오래가지 않아서 좀 아쉽기는 했지만, 난초는 오랜만에 그 존재 의미를 한껏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예상치 못했던 신기한 꽃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손길에 다시 한 번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생명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죽어 없어진 줄 알았던 난초가 7년만에 그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우다니, 생명이란 진정신기하고 놀라운 것입니다. 무익한 것인 줄 알았는데, 그토록 아름다운 꽃을 피워 보임으로써, 생명의 존귀함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세상 사람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언젠가는 그 인생을 끝마치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이 가는 길에는 두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누구나 가게 되는 ‘죽음의 길’이 아닌, 또 다른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께서 열어놓으신 ‘생명의 길’입니다. 누구나 갈 수밖에 없는 ‘죽음의 길’을,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께서는 거부하셨습니다. 요 1:4에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말하기를여러분의 참생명은 예수와 하나님 안에 있다(골3:3)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 참생명이 있어서, 인류 최대의 적인 죽음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 떨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봤을 때, 사람들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던 예수님도, 별 수 없이 우리네 보통 사람들처럼, 그렇게 죽어가는구나!’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무덤에서 사흘 동안이나 계시다가, 그 죽음의 문을 열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죽음 때문에 두려워하던 사람들에게 새 소망과 기쁨을 안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죽으면 아무 것도 소용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허무와 좌절에 빠져있던 사람들에게, 사람이 살아야 할 충분한 가치와 이유를 제공해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 꽃밭의 풍란이, 지난해 여름에 꽃을 피우기 전까지는, 그 존재 가치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7년만에 아름다운 꽃을 피움으로써, 그 풍란이 얼마나 귀한 난초인지 알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인생의 존재 가치를 회복해주었습니다. 죽으면 그뿐이라는 생각을 하면,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 염려가 많습니다. 불교계서 살아있는 부처라 소문날 정도로 유명했던 성철 스님이, 마지막 죽을 때에는 ‘이제까지 인생을 헛살았노라’고 후회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생토록 성불(成佛)하기 위해 도(道)를 닦았던 스님이 그런 말을 할 정도이니, 부활을 알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런고로, 부활의 참된 의미를 알고, 그 부활의 삶을 살아가게 될 때,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고, 또한 바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즉, 살아있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참 아름답고 보기 좋은 삶’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요컨대, 부활의 소망을 갖고 살아가게 될 때에, 이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1.부활에 대한 소망을 갖지 못한 채, 슬프고 괴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께서 비극적으로 돌아가시자, 그만 인생의 살맛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쓰레기만도 못한 아주 천한 창녀였던 그녀가, 예수를 알면서부터 180도로 바뀐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에게 있어서, 예수는 그 인생의 전부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허무하게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도,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에다가 향료를 바르기 위하여, 주께서 묻히신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무덤 문이 열린 채,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훔쳐갔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슬픈 마음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 누군가가 “왜 울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누가 우리 주님을 모셔갔습니다”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주께서 다시금 “마리아야!”하고 부르시니, 그제서야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신실하게 예수님을 따랐던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여러 차례 주님께로부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부활은 신비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부활에 관한 말씀을 하셨을 때에도, 그녀를 비롯한 제자들은 귀담아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행하신 기적과 치유의 현장을 직접 목도했던 제자들조차 부활을 믿지 못했으니, 그런 경험이 없는 오늘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1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듯 싶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성경을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라(사26:19)고 한 구약 성경 말씀을 믿지 못했고, 오늘날의 사람들은 부활한 예수님을 뵌 제자들의 직접적인 증언을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믿는다면, 7년만에 꽃이 핀 난초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생명은 신비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활도 신비스러운 사건입니다. 이 신비를 믿는 사람들만이 부활의 신비로운 사건을 직접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기쁘고 소망스러운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은,
2그 생각과 마음이 세상에 치우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관심이 갖고,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어서 좋은 곳에 가기를 소망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땅의 일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하늘에 있는 풍부한 보화와 기쁨에다가 눈을 돌려야 한다(골3:1-4)고 하면서, 마치 죽은 자가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것처럼, 부활을 믿는 사람도 이 세상에 조금도 미련을 두지 말라(골3:3)고 했습니다. 만일 세상에 미련을 두고 살면, 이 세상일을 염려하느라고,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게 된다(골3:2)고 했습니다. 즉, 인생을 허송세월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세상에 대한 미련과 애착이 대단히 강합니다. 언젠가는 두 손에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빈손으로 떠나게 될 인생인데도,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못하고, 세상일에만 관심을 갖게 될 경우,
3어쩔 수 없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인생을 어둡게 합니다. 허무한 생각을 갖게 하고, 인생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 생각을 하늘나라의 것으로 바꿔야 한다
(2)고 했던 것입니다. 땅을 흙이라고 말합니다. 흙은 흑(黑)입니다. 곧, ‘검다’는 뜻입니다. 검은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죄악을 뜻하기도 합니다. 결국, 이 세상 검은 대지는 잠시 우리가 머물다가 갈 곳은 되지만,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이 있는 하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뭔가 소원하면서 빌 때에는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막상 살아갈 때에는 땅만 보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는어느 나라 사람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다 받아주신다(35)고 했습니다. 부활의 삶이란, 땅만 보고 살던 사람이 하늘을 바라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일로 걱정하고 염려하며 살던 사람이, 천국에 갈 소망을 갖고서 주의 뜻대로 살고자 애쓰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는 ‘인생의 전환점(轉換點)’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땅만 보고 죽음의 길로 달려가던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의 보화를 바라보고 그 가던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반환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는 세상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죽음’을 뜻하지만, 하늘에 대해서는 ‘새로운 삶’의 시작점이 되는 것입니다. 곧, 부활의 삶이 시작되는 곳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자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2.말할 것도 없이, 땅이 아닌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길은 멸망이요,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길은 부활과 영생입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야, 이 세상에서 주의 뜻에 따라 바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물론, 선택은 우리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우리 자신이 져야 합니다. 생명의 길을 택하면 생명을 누릴 것이며, 죽음의 길을 택하면 죽음을 얻게 됩니다. 신30:15에 보아라,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너희 앞에 내놓았다고 하시면서, ‘죽음과 파멸’이 아닌 ‘생명과 번영’을 택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미 벌써, 우리는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돌아섰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고, 인생의 허무나 불행함도 어느 정도 극복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부활의 삶은 아직 온전하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삶을 살려면, 그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과 염려로 채워져 있는 것을, 이제는 하늘에 있는 참 기쁨과 참생명에 대한 관심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1부활에 대한 성경 말씀을 잘 깨닫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2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그 부활의 기쁜 소식을 널리 전해야 합니다.
3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누리면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의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부활의 삶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부활절 행사는 그럴듯하게 치르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부활의 의미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늘 다시 한 번 부활절을 맞이하여, ‘나’라는 존재가 과연 이 땅에서 얼마나 필요로 하는 사람인지, 자기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삶을 살면, 이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됩니다. 아름답고 귀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와 직장에서 사람들로부터 마음속으로 존경을 받습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천국에서도 대환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세상에 대한 관심보다 하늘에 더 깊은 관심을 두고 살아감으로써, 교회와 세상에서 꼭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어, 진정한 부활의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 꽃의 모양이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아마 보신 분들은 그 아름답고 신기한 모습에 절로 감탄했을 것입니다. 그 꽃은 풍란의 일종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약 7년 전쯤, 김포로 간 최 권사가 시장 상인에게서 얻어다가 심은 것입니다. 그 난초는, 모양도 볼품없고 꽃도 피지 않아서, 교회 꽃밭에서 별로 그 존재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여름, 그처럼 아름답고 신기한 꽃을 피웠던 것입니다. 꽃이 오래가지 않아서 좀 아쉽기는 했지만, 난초는 오랜만에 그 존재 의미를 한껏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예상치 못했던 신기한 꽃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손길에 다시 한 번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생명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죽어 없어진 줄 알았던 난초가 7년만에 그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우다니, 생명이란 진정신기하고 놀라운 것입니다. 무익한 것인 줄 알았는데, 그토록 아름다운 꽃을 피워 보임으로써, 생명의 존귀함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세상 사람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언젠가는 그 인생을 끝마치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이 가는 길에는 두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누구나 가게 되는 ‘죽음의 길’이 아닌, 또 다른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께서 열어놓으신 ‘생명의 길’입니다. 누구나 갈 수밖에 없는 ‘죽음의 길’을,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께서는 거부하셨습니다. 요 1:4에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말하기를여러분의 참생명은 예수와 하나님 안에 있다(골3:3)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 참생명이 있어서, 인류 최대의 적인 죽음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 떨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봤을 때, 사람들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던 예수님도, 별 수 없이 우리네 보통 사람들처럼, 그렇게 죽어가는구나!’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무덤에서 사흘 동안이나 계시다가, 그 죽음의 문을 열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죽음 때문에 두려워하던 사람들에게 새 소망과 기쁨을 안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죽으면 아무 것도 소용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허무와 좌절에 빠져있던 사람들에게, 사람이 살아야 할 충분한 가치와 이유를 제공해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 꽃밭의 풍란이, 지난해 여름에 꽃을 피우기 전까지는, 그 존재 가치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7년만에 아름다운 꽃을 피움으로써, 그 풍란이 얼마나 귀한 난초인지 알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인생의 존재 가치를 회복해주었습니다. 죽으면 그뿐이라는 생각을 하면,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 염려가 많습니다. 불교계서 살아있는 부처라 소문날 정도로 유명했던 성철 스님이, 마지막 죽을 때에는 ‘이제까지 인생을 헛살았노라’고 후회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생토록 성불(成佛)하기 위해 도(道)를 닦았던 스님이 그런 말을 할 정도이니, 부활을 알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런고로, 부활의 참된 의미를 알고, 그 부활의 삶을 살아가게 될 때,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고, 또한 바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즉, 살아있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참 아름답고 보기 좋은 삶’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요컨대, 부활의 소망을 갖고 살아가게 될 때에, 이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1.부활에 대한 소망을 갖지 못한 채, 슬프고 괴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께서 비극적으로 돌아가시자, 그만 인생의 살맛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쓰레기만도 못한 아주 천한 창녀였던 그녀가, 예수를 알면서부터 180도로 바뀐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에게 있어서, 예수는 그 인생의 전부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허무하게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도,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에다가 향료를 바르기 위하여, 주께서 묻히신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무덤 문이 열린 채,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훔쳐갔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슬픈 마음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 누군가가 “왜 울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누가 우리 주님을 모셔갔습니다”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주께서 다시금 “마리아야!”하고 부르시니, 그제서야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신실하게 예수님을 따랐던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여러 차례 주님께로부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부활은 신비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부활에 관한 말씀을 하셨을 때에도, 그녀를 비롯한 제자들은 귀담아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행하신 기적과 치유의 현장을 직접 목도했던 제자들조차 부활을 믿지 못했으니, 그런 경험이 없는 오늘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1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듯 싶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성경을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라(사26:19)고 한 구약 성경 말씀을 믿지 못했고, 오늘날의 사람들은 부활한 예수님을 뵌 제자들의 직접적인 증언을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믿는다면, 7년만에 꽃이 핀 난초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생명은 신비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활도 신비스러운 사건입니다. 이 신비를 믿는 사람들만이 부활의 신비로운 사건을 직접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기쁘고 소망스러운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은,
2그 생각과 마음이 세상에 치우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관심이 갖고,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어서 좋은 곳에 가기를 소망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땅의 일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하늘에 있는 풍부한 보화와 기쁨에다가 눈을 돌려야 한다(골3:1-4)고 하면서, 마치 죽은 자가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것처럼, 부활을 믿는 사람도 이 세상에 조금도 미련을 두지 말라(골3:3)고 했습니다. 만일 세상에 미련을 두고 살면, 이 세상일을 염려하느라고,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게 된다(골3:2)고 했습니다. 즉, 인생을 허송세월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세상에 대한 미련과 애착이 대단히 강합니다. 언젠가는 두 손에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빈손으로 떠나게 될 인생인데도,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못하고, 세상일에만 관심을 갖게 될 경우,
3어쩔 수 없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인생을 어둡게 합니다. 허무한 생각을 갖게 하고, 인생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 생각을 하늘나라의 것으로 바꿔야 한다
(2)고 했던 것입니다. 땅을 흙이라고 말합니다. 흙은 흑(黑)입니다. 곧, ‘검다’는 뜻입니다. 검은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죄악을 뜻하기도 합니다. 결국, 이 세상 검은 대지는 잠시 우리가 머물다가 갈 곳은 되지만,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이 있는 하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뭔가 소원하면서 빌 때에는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막상 살아갈 때에는 땅만 보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는어느 나라 사람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다 받아주신다(35)고 했습니다. 부활의 삶이란, 땅만 보고 살던 사람이 하늘을 바라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일로 걱정하고 염려하며 살던 사람이, 천국에 갈 소망을 갖고서 주의 뜻대로 살고자 애쓰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는 ‘인생의 전환점(轉換點)’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땅만 보고 죽음의 길로 달려가던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의 보화를 바라보고 그 가던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반환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는 세상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죽음’을 뜻하지만, 하늘에 대해서는 ‘새로운 삶’의 시작점이 되는 것입니다. 곧, 부활의 삶이 시작되는 곳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자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2.말할 것도 없이, 땅이 아닌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길은 멸망이요,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길은 부활과 영생입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야, 이 세상에서 주의 뜻에 따라 바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물론, 선택은 우리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우리 자신이 져야 합니다. 생명의 길을 택하면 생명을 누릴 것이며, 죽음의 길을 택하면 죽음을 얻게 됩니다. 신30:15에 보아라,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너희 앞에 내놓았다고 하시면서, ‘죽음과 파멸’이 아닌 ‘생명과 번영’을 택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미 벌써, 우리는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돌아섰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고, 인생의 허무나 불행함도 어느 정도 극복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부활의 삶은 아직 온전하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삶을 살려면, 그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과 염려로 채워져 있는 것을, 이제는 하늘에 있는 참 기쁨과 참생명에 대한 관심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1부활에 대한 성경 말씀을 잘 깨닫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2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그 부활의 기쁜 소식을 널리 전해야 합니다.
3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누리면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의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부활의 삶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부활절 행사는 그럴듯하게 치르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부활의 의미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늘 다시 한 번 부활절을 맞이하여, ‘나’라는 존재가 과연 이 땅에서 얼마나 필요로 하는 사람인지, 자기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삶을 살면, 이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됩니다. 아름답고 귀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와 직장에서 사람들로부터 마음속으로 존경을 받습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천국에서도 대환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세상에 대한 관심보다 하늘에 더 깊은 관심을 두고 살아감으로써, 교회와 세상에서 꼭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어, 진정한 부활의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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