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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으로 따질 수 없는 엄청난 선물 (행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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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마을의 당산나무에 얽힌 이야기가 MBC-TV의 ‘화제집중 6시’ 프로그램에서 방영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5백년이 넘은 당산나무가 트럭에 받혀서 한쪽 줄기가 부러져나갔는데, 그후부터 그 마을에 우환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유 없이 경운기가 뒤집히고, 길 가던 노인네가 넘어져 팔이 부러지는 등, 안 좋은 일이 겹치기로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마을사람들은 당산나무가 분노해서 그런 일이 계속 발생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에서는 사고 트럭의 보험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3천만 원의 보험금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당산나무를 위무하는 큰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랬더니, 마을에서는 더 이상 궂은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마을에서는 당산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그 앞에 큰절을 올리면서, 마을의 안녕과 개인의 소원을 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무를 만들어내신 여호와 하나님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 마을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고목 나무가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런 일 입니다. 이왕 믿을 바에야, 천지를 주재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일이지, 어째서 썩어가고 있는 고목을 의지하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 주변에는, 고목 나무를 숭배하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기복 신앙’을 가진 이가 적지 않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 기독교 신앙인데, 이 고귀한 기독교 신앙을 미신처럼 믿는 사람들이 있으니, 정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첫째 편지에서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엄청난 선물인 ‘영원한 생명’을 준비해 두셨다(1:4)고 했습니다. 이 선물은순수하고 때가 묻지 않았으며, 절대로 변질되거나 부패하는 일이 없다(1:4)는 것입니다. 이 값진 선물은, 예수를 통해서만 얻을 수가 있습니다. 주께서 가르치신 복음과 그 행적이, 자신이 믿고 따르기에 옳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하늘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변질되지 않은 기독교 신앙을 우리가 소유할 수 있으려면, 주께서 죽음의 고통을 이겨내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 신앙’을 확고히 가져야 합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거듭나는 특권’과 ‘영원한 희망’을 주셨다(1:3)고 했습니다. 결국, 부활신앙이란, 썩어질 육체가 썩지 아니할 영체로 변화하는 것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땅엣 것을 귀하게 여기던 생활에서 하늘의 것을 알고 소중히 여기는 삶으로 변화되는 ‘거듭남’과, ‘영생’을 소유하여 죽음의 절망에서 벗어나 ‘영원한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고로, 잠깐동안 이 세상에서 우환 질고를 덜 당하기 위하여 고목 나무를 섬기는, 그런 미신과는 결단코 비교할 수 없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우리는 잠깐 편안하게 잘 살자고 믿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동행하여 참 기쁨과 평화를 누리기 위해 믿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믿음을 가진 우리의 인생 길은,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멸망의 길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생명의 길입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인은, 잠깐 동안의 즐거움과 쾌락을 위해서 살지 않고, 영원한 영광을 얻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잖은 사람들이 바른 기독교 신앙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 명예와 즐거움을 더욱 열심히 추구함으로써, 부활 생명의 길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1.여전히 죽음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의 부활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의 절망에서 벗어나 영원한 소망을 갖게 하려고, 하나님은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깊은 뜻을 잘 모르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베드로는 다윗의 말을 인용하여,주께서 내게 생명의 길을 알려 주셨으니, 나는 당신을 모시고 언제나 기쁨에 넘칠 것(2:28)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활 신앙을 갖게 되면,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생명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건만,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좋은 생명의 길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1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께서 제자들 앞에 처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가 도마에게 “우리가 주님을 뵈었다”고 말하자, “내가 주님을 직접 뵙기 전에는 믿을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후,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때에는 ‘도마’도 함께 있었습니다. 주님은 도마에게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직접 손을 넣어보고, 더 이상 의심하지 말고 믿어라!”하셨습니다. 그제야,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하고 외쳤습니다. 주는 도마에게 “너는 나를 봤기 때문에 믿는구나! 진정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대개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만을 믿으려 하기 때문에, 주께서 일러주신 생명의 길을 가지 못하고
2죽음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길은 일부러 선택할 필요 없습니다. 생명 길을 가지 않는 한, 인간은 누구나 저절로 죽음의 길을 가게 됩니다. ‘죽음의 길’은 결코 육신의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죽음의 길인 것입니다. 부활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은 죽음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 신앙이 갖다주는 ‘거듭남의 특권’과 ‘영생의 선물’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 자신의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최고인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3그런 사람들은 서로가 상대방을 의심하고 미워하면서 다투게 마련입니다. 육신이 원하는 바는 한이 없고, 그 육신의 욕심을 채워줄 자원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먼저 더 많이 차지하려고 다투며 미워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을 포기해야 용서가 가능한데, 부활과 영생을 알지 못하는 자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이들에게 무슨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항상 더 많이 얻지 못해서 불만이고, 더 높이 오르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결국 그렇게 살다가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다툼이 계속되면, 멸망은 필연입니다.
2.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알려주시고, 또한 그 길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이 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대로 살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려고, 그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던져서, 죄와 죽음의 바다에 빠져 죽어 가고 있는 우리 인생을 건져내어 구원하셨습니다. 죄에서 건져내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는 그 죄의 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죽음의 길로 가는 것보다, 생명의 길로 가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영생의 길이, ‘우리에게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엄청난 선물’이라고,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잘 알게 된다면, 결코 멸망의 길을 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진리를 알고, 그 은혜 안에서 살면, 이 세상 그 무엇을 얻는 것보다 훨씬 더 유익하고 복된 일이 될 것입니다. 아니, 이 세상 것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가 가고 있는 이 생명의 길은 참으로 귀하고 복된 길입니다. 그런고로,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흔히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고 하는데, 이 말처럼 사람의 목숨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목숨을 다시 살리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생명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부활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부활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엄청난 선물인 영생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3.우리 모두 영생의 길을 감으로써, 하늘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도록 합시다. 주께서는 당신을 배반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어라!하는 말씀을 거듭하셨습니다. 결국 부활하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교훈은 ‘평화’입니다. 그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서로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용서는 우리 힘만으로는 어렵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어야 가능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용서의 교훈을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를 배반했던 제자들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뵙기 전에는 주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던 ‘도마’도 너그럽게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부활의 삶이란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면서 사는 것이고, 그 용서가 진정으로 이루어질 때 영생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이 세상에 대한 욕심 때문에, 서로 갈등과 다툼을 일으키던 우리가, 하늘의 귀한 보화를 발견하고서 세상의 더러운 욕심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서로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부활의 기쁨도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1부활하신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엄청난 선물인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것으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복은 세상 욕심을 포기한 우리 기독교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제가 어릴 적의 일입니다. 냇가를 거닐다가 예쁜 돌들을 골라서 호주머니에 넣기 시작했습니다. 돌을 줍다 보니, 양쪽 호주머니가 가득했습니다. 그때, 장에서 돌아오시던 이웃 아주머니가 저의 양손에 사탕을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저는 사탕을 넣어둘 곳이 없어서, 호주머니에 있던 돌들을 끄집어내고, 대신 사탕을 집어넣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귀중하게 여겨야 할 것은, 언젠가 썩어 없어질 이 세상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아니할 하늘의 복입니다. 곧, 삶의 가치를 높여주고 영원한 희망을 갖게 하는 ‘부활과 영생’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2죽음의 길을 멀리하고, 생명의 길을 가야 합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고자 스승을 배반하고 도망갔습니다. 살고자 한 짓이지만, 그 행위는 죽음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천 년을 살다 할지라도, 그 삶은 영광이 아니라 치욕입니다. 그처럼,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챙기며, 목숨 유지만을 위하여 사는 것은, 죽음의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모진 고난을 겪으시면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고, 이제는 그를 배반했던 제자들을 용서하며 평화를 빌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바로 생명의 길입니다. 모든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가 간절히 추구해야 할 생명의 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는 우리 믿는 자가 가장 귀중하게 여겨야 할 보물이 무엇인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이후로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엄청난 선물인 영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주님의 뒤를 따라서 부활의 삶을 열심히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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