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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본질 (갈2:20)

본문

하나님께서는 성도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여러분과 친밀한 관계를 더욱 깊게 하고 싶으셔서 오늘도 부르셔서 이 말씀을 듣게하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그 큰사랑을 받아들여 삶을 풍요하게 하고 살찌우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인간이 한 없이 약하고 연약한 존재인 것을 알고서 절대자와 만나서 삶의 확신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하여서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고 신뢰하는 느낌을 갖기를 원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많이 알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우리의 실천적인 삶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신앙에 대한 생각은 출발이 나에게서 시작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 작용이 온전히 하나님께 향해질 때 이것을 좋은 신앙이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신앙의 한 국면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틀임이 없으나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과는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정신적으로 알고 느끼고, 실천하는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전혀 느끼지 못하는 무의식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울적하고 기분이 깔아질 이유가 없는데도 침체된 삶을 경험한다면 이는 무의식의 작용 때문이라고 보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앙과 삶이 모범적인 사람이 꿈을 꾸기만 하면 죄를 짖고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인간이 된다면 이는 내 삶의 전폭이 하나님께 붙들림바 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내 의식과 무의식이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신앙은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에게로 찾아오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예를 보자.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모범이다. 아브라함은 최초의 진정한 신앙인으로 부름을 받은 자요. 선택받은 이스라엘의 첫번 째 족장이다. 아브라함을 통하여서 우리는 신앙인의 삶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자하시는지 보여주고 계신다.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은 사건은 갑자기 나타난다. 아브라함이 어떠한 준비를 하였는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갈망하였는지 그의 삶이 얼마나 거룩하였는지 아무런 기록이 없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창12:1)로 시작이 된다. 아브라함이 먼저 요구하고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의 응답을 촉구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왔으며 아브라함이 자기와 관계를 맺고 살아 주기를 열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삶이요 그 관계는 하나님이 갈망하시는 관계요, 그 관계의 성립은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 은혜의 구원을 베풀 때 시작이 되며 하나님의 구원에 응답하여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신앙인 것이다.
1. 신앙이라는 말의 뜻 내가 믿는다라는 라틴어는 credo 인데 이는 심장을 드린다 또는 고정시킨다는 의미이다. 곧, 나의 모든 것의 중심인 심장을 어떤 특정한 대상에게 드리고 그 대상에게 고정시켜 그를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의미를 갖는다. Credo는 사도신경의 처음 단어로서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심장을 성삼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고 그분만 의지하고 살아가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본문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자기의 심장을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슴이니라”(골3:3)고 담대히 주장할 수가 있었다. “무릇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롬6:3-4)하고 바울이 기록한 진정한 의미는 우리 믿음의 사람은 이미 심장을 하나님께 드린바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는 생명과 삶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심장을 주님께 드린 바울은 이 날을 중히 여기거나 저 날을 중히 여기거나 음식을 먹으며 헌신하거나 금식하며 기도하거나 그 이유는 오직 주님을 위한 것이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면 이것도 가하고 저것도 가하나 주님께 합당치 않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이요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짓는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롬14:7-8) 또한 우리의 심장을 드린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그 심장을 받을만한 유일한 대상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예) 천만원을 우리가 누구에게 준다면 아무에게나 줄 수는 없다. 특별한 관계가 있는 사람에게 줄 것이다. 하물며 우리의 단 하나밖에 없는 심장을 주는 것이라면 그 관계란 정말로 특별한 관계가 아닐 수가 없다. 내가 나의 심장을 주님께 드린다면 주님과 나 사이에 특별한 교제와 사귐을 통하여서 주님께 나의 심장을 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섰을 때 나의 심장을 그 분께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2. 신앙은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우리의 심장을 그 분께 드린다는 것은 동시에 그 분을 나의 심장의 중심에 모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하고 말씀하신 다음에 곧이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미 그의 심장을 예수님께 드렸고 그의 생명은 예수님께 감추인바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심장에는 예수님이 오셔서 그 안에 거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분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사실 이 말씀을 받은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더웁지도 않는”(계3:15)교회요 자기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계3:17) 교회요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9)고 책망 받은 교회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문제 있는 그 교회에 들어가기를 원하여 그 교회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이 그처럼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영접하는 자는 누구든지”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예수님과 더불어 먹는“참된 교제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분을 영접한 모든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영접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능을 가지게 하실 것이다. 개의 새끼는 개의 능력을 가지고 토끼의 새끼는 토끼와 같은 것처럼 사람의 자녀는 사람의 능력을 가질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과 영광과 진리를 가질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들어오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에게 영접 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 분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을 것이요 하늘의 광명과 빛을 얻어 빛의 사람이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3. 믿음은 주님께 철저히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라는 말은 예수님을 우리의 심장에 모셔들이는 일이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모셔들이고 주님 되신 예수님께 종으로서 철저히 순종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충성된 종으로 순종하며 사는 것은 자기의 뜻과 생각과 욕망을 완전히 배제하고 주님의 뜻과 생각과 욕망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삶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종들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까지 광야에서, 성전에서, 굴 속에서, 산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다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구약 성경의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의 뜻을 따라 예언하고 실천하는 자들이었다. 세례 요한도 모세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까지 묵묵히 기다리고 그 말씀이 임했을 때에 그대로 순종하여 그 말씀을 순종함으로 실천한 하나님의 종들이 되었다. 예수님을 영접하였다는 말과 예수님께 순종한다는 말은 한 신앙의 다른 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중요한 신앙의 내용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것이다.
4. 신앙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권능의 역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그 분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셔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오, 우리 인간의 생명이시요, 어두움을 밝히시는 빛이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 안에 오신 분이 바로 이 예수님이시다. 캄캄한 방에 아무리 조그마한 빛이라도 들어오면 그 방이 아무리 어두웠을 지라도 그 방은 그 빛만큼 밝아질 것이다.이것이 빛의 원리이다. 예수님을 빛으로 비유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들어오시는 곳에는 예수님의 빛으로 말미암아 밝아질 수밖에 없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병든 자를 만났을 때 병든 자들은 고침을 받았으며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서 귀신이 나갔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 가운데 가룟 유다와 바리새인과 근심하며 돌아간 부자 청년과 같이 예수님을 거절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들이 병자든지 귀신들린 자든지 불구자이든지, 죄인이든지, 세리나 창기들이라고 할지라도 모두가 치유 받고 건강을 회복하며, 성결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와 세리 삭개오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려 부모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 동네와 가문의 수치가 된 여인이요, 완전히 미쳐 버려 제정신을 잃어버린 인간 이하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고서 그녀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었다. 예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를 찾아갔을 때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빛이 비취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서 귀신들이 떠나가고 이제는 예수님을 섬기는 여인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예수님을 따라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며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무덤 앞에 까지 따라가며 안식후 첫날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째로 만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예수님은 천한 여인 인간 이하로 전락한 마리아를 가장 고상하고 성스러운 막달라 마리아로 만들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의 역사가 곧 믿음인 것이다. 삭개오도 믿음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는 교제를 금지 당한 민족의 배신자였지만 예수님은 그를 만나주시고 그를 초청하여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교제를 나누셨다. 그리하여 삭개오의 집에 빛이 비추이게 되었고 변화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다. 삭개오가 돈에 끌려 세리장이 되었지만 이제 예수님을 만남으로 돈보다 가난한 자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눈을 얻었으며, 자기의 순결의 대가로 토색한 재산을 모았으나 그것을 사배로 갚아 자기의 순결을 회복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에게 새로운 삶, 새로운 인생,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만드셨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은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속에 진실한 인간성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구원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우리 주 예수님의 권능의 역사이다. 믿음은 우리의 심장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 믿음은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믿음은 주님께 철저히 순종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능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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