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찬전진 (수1:1-4)
본문
여호와 하나님은 발로 밟는 땅을 주십니다. 하나님 고인식(高寅埴) 성도가 갔습니다. 밀알의 제1번 주자입니다. 주변의 영적인 풍토가 좋지 못해서 늘 마음 한 구석에 염려가 되어 왔는데 마지막 가는 것을 보지 못해서 애석합니다. 더구나 중환자 실에서 전송자 없이 손을 저어 흔들면서 혼자서 떠났다 고 하니 마음이 더욱 아픕니다. 부족하나마 저에게 맡겨준 어리고 불쌍한 양이라서 잘 보살펴 주었어야 했는데 설마 가시기야 하겠나 생각했는데 설마가 현실로 다가오니 빚진 마음입니다. 1996년 6월 26일날 등록했는데 그때 이미 세상의 의원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주님의 교회를 찾게 되었고, 그때 복음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동안에 고통을 통해 파란과 곡절이 많았으나 돌이켜 보니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간섭이었던 것입니다. 그녀를 위해 헌신적으로 수고하신 잊을 수 없는 종들이 많습니다. 특히 장원미용실에 권춘임 집사는 하루종일 근무하고 피곤한 육신이지만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그녀를 때로는 업고 기도소로 주의 제단으로 인도한 눈물겹도록 고마운 신실한 종이었습니다. 또한분의 잊을 수 없는 종이 있습니다.
구역장 김정례 집사는 교회가 맡긴 직분을 사명으로 알고 궂은 일까지 언제나 곁에서 수종들어 주었던 밀알 제단의 실신한 사명자입니다. 그리고 말씀드리기는 송구하지만 제 아내 김종자 사모의 호스피스 사역입니다. 아들 시온이를 잃고 임종환자를 돌아보는 것이 자신에게 준 사명임을 깨닫고 밤이면 허리의 아픈 통증을 앎아 가면서 환자를 돌아보는 즐거움은 목회자인 나의 자리를 대신해 주었습니다. 홍수로 물이 범람하나 먹을 생수는 귀합니다. 실업자는 많으나 정작 일군을 찾으면 사람이 없습니다. 사명을 알고 목숨을 받쳐 일하는 일군이 귀한 시대입니다. 자원고갈이나 실력부족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물부재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지도자의 지도력입니다. 사회 일각에서도 지도자 부재를 개탄하지만 오늘날 교계에서도 지도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때를 맞이했습니다. 지도자의 지도력은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인물을 위해 인제를 키워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인물은 인물 밑에서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에 투자를 하고 있습니까 19세기에 영적인 거인으로서 양대 산맥을 이룬 분이 있다면 미국의 디엘 무디와 영국의 스펄죤입니다. 이들은 다 위대한 전도자요 설교자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다른 투자를 했습니다. 스폴죤 목사는 그 당시 오천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세계에서 제일 큰 예배당 메트로폴리탄 터버너클(Metropolitan Tabernacle)을 지었으나 지금은 교회당 일부에 칸막이를 치고 백여명 남짓한 교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무디는 조그마한 무디성경학교(Moody Bible Institute)를 세웠습니다. 당시는 보잘 것 없는 같았으나 오늘날 미국을 변화시킨 복음주의자들의 대부분이 무디성경학교 출신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투자를 하고 있습니까 인물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난주간에 서울 동안교회를 담임한 김동호 목사 쓴 미래를 꿈꾸는 사람 이라는 책을 읽고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지금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앞으로 소유할 꿈이 훨씬 좋은 분이었습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좋으면 그 인생은 성공적입니다. 오늘 좋은 교회를 택하기보다는 내일 더 좋은 교회로 자라 가는 교회를 택하는 자가 슬기로운 성도입니다.
첫째:모세는 갔으나 모세의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읽을말씀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1) 모세의 죽음은 사명적인 죽음입니다. 그는 복된 죽음을 죽었습니다. 사명을 다하고 죽은 인생은 복된 인간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디모데후서4:7)라고 한 바울의 여생은 값진 생애였습니다. 모세 자신이 쓴 시편에 보면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편 90:10)고 했습니다. 그가 호렙산에서 사명을 받을 때 이미 강건한 인생의 몫을 다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때 사명을 받아서 사십년을 더 살았습니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명기 34:7)고 했습니다. 사명을 감당한 이후의 삶은 더욱 강건했습니다. 사명자의 길을 하나님이 지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대행자의 역사입니다. 모세는 갔으나 모세의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역사 하셨습니다. 다윗과 함께 하신 하나님은 그 아들 솔로몬과 함께 하셨고, 엘리야를 부르신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해서 그 남은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고, 사도들은 갔으나 사도들의 하나님은 살아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구원사역을 이루시고 승천하셨으나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한복음 14:18)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성경을 기록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당신은 이 비밀을 깨닫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역사는 그리스도를 중심한 대행자 역사입니다. 인간은 유한하나 인간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리에 집착하여 교만하고 자만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충직한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고린도전서 4:2, 요한계시록 2:10). 개척자는 길을 만드신 이후에 그 자리를 다음 세대에 기쁨으로 물러 주는 사역의 창조자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지도자 모세를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여호수아에게 그 자리를 물러 주게 하신 것입니다.
둘째:모세는 갔으나 여호수아는 일어나야 합니다. 읽을말씀 “내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2) 모세의 죽음은 너무도 뜻밖입니다. 이 일은 모세 자신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죽음을 앞에 놓고 건강에 적신호가 온적도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광야에서 모세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목자 잃은 양처럼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세가 느보산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탄식했습니다. 가나안을 목전에 둔 모세 자신으로서도 너무도 예석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곁에서 보필하면서 수종들었던 여호수아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백성들과 더불어 탄식하면서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너는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라 이젠 그들에게는 출애굽의 세대는 다 가고 광야세대만 남았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출애굽 세대의 마지막 주자입니다. 유일하게 남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불안과 고민은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당장 눈에 닥친 문제는 요단을 건너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십년전에 홍해를 건너는 체험은 했으나 지금 자기들 앞에 흐르는 요단을 볼 때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그 음성은 슬픔과 좌절과 절망에서 일어나라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언약의 땅으로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새해에는 힘차게 전진합시다. 이제 당신은 일어나야 합니다. 이전에 모세를 전적으로 의지하였던 연약성에서 완전한 독립을 하여야 합니다. 모세는 갔어도 모세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 합니다. 모세를 잃고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향해 일어나라고 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일어나라고 합니다. 불황과 어려운 여건과 상황 앞에서도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힘차게 앞으로 전진합시다. 위대한 지도자는 위기를 극복하는 슬기로운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위기관리 능력이야말로 위대한 지도자의 지도력입니다.
셋째:모세는 갔으나 여호수아는 전진해야 합니다. 읽을말씀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3-4절) 발바닥으로 밟아야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일반은총을 다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홍해 앞에 선 모세에게 홍해를 갈라 주지 않고 모세에게 지팡이로 홍해를 치게 하신 것입니다. 치고 안치는 것은 그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광야에서도 매일의 만나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거져 먹이시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건강으로 매일 거두는 수고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아말렉 전투에서도 모세의 기도로만 승리하게 하지 않고 여호수아가 적진을 향해 나가서 전투하게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삶은 발로 밟아서 정복하는 수고하고 노동하는 개척자의 삶입니다. 당신이 밟아야 할 땅은 이러합니다. 성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유월절 어린양을 먹고 그 피를 바르고 진리에 허리띠를 띠고 복음의 신을 신고 애굽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기분대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언약궤가 이동하는 곳으로만 밟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위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호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약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당신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원하십니까 약속의 말씀을 붙들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따라서 역사합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매일 매일 지시할 땅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언약의 궤를 매고 행진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음 16:15)고 했습니다. 주님은 발로 밟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을 주신다(사도행전 1:8)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밟는 역사입니다. 다스리고 지배하고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창조역사는 발로 밟는 역사입니다. 기도의 발로 밟고, 찬양의 발로 밟고, 전도의 발로 밟아야 합니다. 금년에는 이 도성을 밟읍시다. 교회의 일차적인 사명은 지역을 복음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밀알의 강단을 가지고 이 도성의 구석구석을 밟아야 합니다. 언약의 말씀을 가지고 밟는 땅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했습니다. 밟는 곳마다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시대 시대마다 믿음의 사람들을 세워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히브리서 11장). 당신의 주변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하는 믿음의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인생의 불행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사명을 떠남에서 비롯됩니다(누가복음 15:11-32). 당신도 예수 안에서 새생명을 소유하여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요한일서 5:12, 요한복음 5:24).
구역장 김정례 집사는 교회가 맡긴 직분을 사명으로 알고 궂은 일까지 언제나 곁에서 수종들어 주었던 밀알 제단의 실신한 사명자입니다. 그리고 말씀드리기는 송구하지만 제 아내 김종자 사모의 호스피스 사역입니다. 아들 시온이를 잃고 임종환자를 돌아보는 것이 자신에게 준 사명임을 깨닫고 밤이면 허리의 아픈 통증을 앎아 가면서 환자를 돌아보는 즐거움은 목회자인 나의 자리를 대신해 주었습니다. 홍수로 물이 범람하나 먹을 생수는 귀합니다. 실업자는 많으나 정작 일군을 찾으면 사람이 없습니다. 사명을 알고 목숨을 받쳐 일하는 일군이 귀한 시대입니다. 자원고갈이나 실력부족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물부재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지도자의 지도력입니다. 사회 일각에서도 지도자 부재를 개탄하지만 오늘날 교계에서도 지도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때를 맞이했습니다. 지도자의 지도력은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인물을 위해 인제를 키워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인물은 인물 밑에서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에 투자를 하고 있습니까 19세기에 영적인 거인으로서 양대 산맥을 이룬 분이 있다면 미국의 디엘 무디와 영국의 스펄죤입니다. 이들은 다 위대한 전도자요 설교자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다른 투자를 했습니다. 스폴죤 목사는 그 당시 오천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세계에서 제일 큰 예배당 메트로폴리탄 터버너클(Metropolitan Tabernacle)을 지었으나 지금은 교회당 일부에 칸막이를 치고 백여명 남짓한 교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무디는 조그마한 무디성경학교(Moody Bible Institute)를 세웠습니다. 당시는 보잘 것 없는 같았으나 오늘날 미국을 변화시킨 복음주의자들의 대부분이 무디성경학교 출신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투자를 하고 있습니까 인물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난주간에 서울 동안교회를 담임한 김동호 목사 쓴 미래를 꿈꾸는 사람 이라는 책을 읽고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지금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앞으로 소유할 꿈이 훨씬 좋은 분이었습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좋으면 그 인생은 성공적입니다. 오늘 좋은 교회를 택하기보다는 내일 더 좋은 교회로 자라 가는 교회를 택하는 자가 슬기로운 성도입니다.
첫째:모세는 갔으나 모세의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읽을말씀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1) 모세의 죽음은 사명적인 죽음입니다. 그는 복된 죽음을 죽었습니다. 사명을 다하고 죽은 인생은 복된 인간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디모데후서4:7)라고 한 바울의 여생은 값진 생애였습니다. 모세 자신이 쓴 시편에 보면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편 90:10)고 했습니다. 그가 호렙산에서 사명을 받을 때 이미 강건한 인생의 몫을 다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때 사명을 받아서 사십년을 더 살았습니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명기 34:7)고 했습니다. 사명을 감당한 이후의 삶은 더욱 강건했습니다. 사명자의 길을 하나님이 지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대행자의 역사입니다. 모세는 갔으나 모세의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역사 하셨습니다. 다윗과 함께 하신 하나님은 그 아들 솔로몬과 함께 하셨고, 엘리야를 부르신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해서 그 남은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고, 사도들은 갔으나 사도들의 하나님은 살아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구원사역을 이루시고 승천하셨으나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한복음 14:18)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성경을 기록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당신은 이 비밀을 깨닫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역사는 그리스도를 중심한 대행자 역사입니다. 인간은 유한하나 인간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리에 집착하여 교만하고 자만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충직한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고린도전서 4:2, 요한계시록 2:10). 개척자는 길을 만드신 이후에 그 자리를 다음 세대에 기쁨으로 물러 주는 사역의 창조자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지도자 모세를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여호수아에게 그 자리를 물러 주게 하신 것입니다.
둘째:모세는 갔으나 여호수아는 일어나야 합니다. 읽을말씀 “내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2) 모세의 죽음은 너무도 뜻밖입니다. 이 일은 모세 자신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죽음을 앞에 놓고 건강에 적신호가 온적도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광야에서 모세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목자 잃은 양처럼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세가 느보산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탄식했습니다. 가나안을 목전에 둔 모세 자신으로서도 너무도 예석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곁에서 보필하면서 수종들었던 여호수아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백성들과 더불어 탄식하면서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너는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라 이젠 그들에게는 출애굽의 세대는 다 가고 광야세대만 남았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출애굽 세대의 마지막 주자입니다. 유일하게 남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불안과 고민은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당장 눈에 닥친 문제는 요단을 건너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십년전에 홍해를 건너는 체험은 했으나 지금 자기들 앞에 흐르는 요단을 볼 때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그 음성은 슬픔과 좌절과 절망에서 일어나라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언약의 땅으로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새해에는 힘차게 전진합시다. 이제 당신은 일어나야 합니다. 이전에 모세를 전적으로 의지하였던 연약성에서 완전한 독립을 하여야 합니다. 모세는 갔어도 모세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 합니다. 모세를 잃고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향해 일어나라고 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일어나라고 합니다. 불황과 어려운 여건과 상황 앞에서도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힘차게 앞으로 전진합시다. 위대한 지도자는 위기를 극복하는 슬기로운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위기관리 능력이야말로 위대한 지도자의 지도력입니다.
셋째:모세는 갔으나 여호수아는 전진해야 합니다. 읽을말씀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3-4절) 발바닥으로 밟아야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일반은총을 다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홍해 앞에 선 모세에게 홍해를 갈라 주지 않고 모세에게 지팡이로 홍해를 치게 하신 것입니다. 치고 안치는 것은 그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광야에서도 매일의 만나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거져 먹이시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건강으로 매일 거두는 수고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아말렉 전투에서도 모세의 기도로만 승리하게 하지 않고 여호수아가 적진을 향해 나가서 전투하게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삶은 발로 밟아서 정복하는 수고하고 노동하는 개척자의 삶입니다. 당신이 밟아야 할 땅은 이러합니다. 성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유월절 어린양을 먹고 그 피를 바르고 진리에 허리띠를 띠고 복음의 신을 신고 애굽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기분대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언약궤가 이동하는 곳으로만 밟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위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호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약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당신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원하십니까 약속의 말씀을 붙들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따라서 역사합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매일 매일 지시할 땅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언약의 궤를 매고 행진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음 16:15)고 했습니다. 주님은 발로 밟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을 주신다(사도행전 1:8)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밟는 역사입니다. 다스리고 지배하고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창조역사는 발로 밟는 역사입니다. 기도의 발로 밟고, 찬양의 발로 밟고, 전도의 발로 밟아야 합니다. 금년에는 이 도성을 밟읍시다. 교회의 일차적인 사명은 지역을 복음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밀알의 강단을 가지고 이 도성의 구석구석을 밟아야 합니다. 언약의 말씀을 가지고 밟는 땅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했습니다. 밟는 곳마다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시대 시대마다 믿음의 사람들을 세워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히브리서 11장). 당신의 주변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하는 믿음의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인생의 불행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사명을 떠남에서 비롯됩니다(누가복음 15:11-32). 당신도 예수 안에서 새생명을 소유하여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요한일서 5:12, 요한복음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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