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겨자씨 운동을 일으킵시다 (마13:31-32)

본문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할 때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그 비유들을 살펴보면 서로 대칭해서 짝을 이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인 겨자씨 비유는 누룩의 비유와 한 쌍을 이루는 것으로서 쌍둥이 비유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이 두 비유에서 복음전파의 양면성을 볼 수 있습니다. 누룩은 말안 가루 속에서 보이지 않게 내면적으로 역사 합니다. 이 운동은 특히 불신가정에서 나오는 성도들이 해야할 전도방법입니다. 전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편의 마음과 시댁의 가족과 사회의 이웃을 부풀게 하여 나중에 말안의 가루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오늘은 겨자씨 비유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겨자씨는 누룩과 정반대로 보이게 역사하는 나타난 운동입니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후일에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이는 보금자리가 되는 것을 우리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심성과 언어와 행위가 변화되어 영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우리의 주변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겨자씨운동이란 어떠한 운동인가
첫째/ 겨자씨 운동은 지극히 작은 한알운동입니다.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알 같으니”(마태복음13:31)라고 했습니다. 겨자씨 운동은 한알의 운동입니다. 이 운동이 곧 독생자운동이며(요한복음3:16). 구원운동이며(사도행전4:12), 밀알운동입니다(요한복음12:24). 겨자씨는 보잘것없는 작은 씨입니다. 유대나 갈릴리 지역에서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씨가 겨자씨입니다. 그래서 겨자씨란 말은 지극히 작고 하찮은 것의 대명사로 불러지게 되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을 말할 때 우리는 “바늘 구멍”만하다고 하나 유대인들은 “겨자씨 구멍”만하다고 합니다. 아주 까다로운 사람을 말할 때 “손톱도 안들어가는 사람”이라고 부르나 유대인들은 “겨자씨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독하고 모진 사람을 “피 한 방울”도 나지 않는다고 하나 유대인들은 “겨자씨만큼”도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본문은 겨자씨 한 움큼도 아닌 한알이라고 했습니다. 흔히 유교의 공자나, 불교의 석가나, 회교의 마호메트 같은 자가 생명을 가진 알 인줄로 착각하고 따르는 무리가 많으나 그들은 다 죄 가운데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신 참된 생명의 복음인 것입니다. 구원의 복음은 예수 외에 다른 알이 없습니다. 예수만이 구원의 겨자씨입니다. 구약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오실 메시야에 대하여 겨자씨로 예언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이사야53:2)같다고 했습니다. 신약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복음의 사역자들을 세상에서 별로 알아주지 않는 하찮은 겨자씨라고 했습니다. “미련한 것들, 약한 것들,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없는 것들”(고린도전서1:26-29)이라고 헀습니다. 우리는 밀알교회의 겨자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부르셔서 이 지역을 살리게 하셨습니다. 한국교회는 반드시 변화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직분론에 있어서 개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제 복음의 왕국이요, 선짓국이요, 제사장 국가로서 땅끝까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좀 가진 것 같고, 아는 것 같고, 많은 명성을 얻은 것 같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볼품없는 겨자씨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겨자씨 인생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백세에 이삭을 얻은 아브라함이나, 팔십에 미디안에서 사명을 받은 모세나, 갈릴리 어부 출신 베드로나, 가시에 찔림을 받는 바울은 다 겨자씨 인생이었습니다.
둘째/ 겨자씨 운동은 성장하는 생명운동입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마태복음13:32)라고 했습니다. 겨자씨는 작은 것이지만 그 속에는 생명이 있습니다(요한복음1:4) .이 생명은 자라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3:7). 우리의 믿음은 날마다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13:11). 겨자씨의 신비는 생명입니다. 겨자씨의 존귀함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생명에 있습니다. 생명의 신비는 자라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특징은 가만이 있지를 못합니다. 생명의 역사는 항상 움직이는 것입니다(히브리서4:12).
그러므로 움직이지 않고 정체해 있으면 썩게 됩니다. 당신이 소유한 재물을 한곳에 묻어 두면 좀이나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습니다(마태복음6:19). 그것을 신령하고 영적인 재가치를 창출하는 곳에 투자해야 합니다. 당신의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운 만큼 재능으로 사용해야 새로운 가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12:4-11). 당신이 쌓은 명성도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쓰임을 받아야 귀한 것입니다(마태복음8:9). 당신이 소유한 그 어떤 것도 묻어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소유한 것을 재투자해서 새가치를 창출해 내어야 합니다. 예수운동은 곧 생명운동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무리들은 큰 돌로 무덤 문을 막고, 가이사 황제의 명령이 없이는 손 될 수 없는 인을 치고, 군대를 동원하여 지키게 했습니다(마태복음27:6
6). 그러나 생명은 가만히 있을 수 없으며, 가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고린도전서15:4).
부활의 새생명은 12사도를 불러 모아서 새소망을 주시고, 120여명의 무리들과 합심하여 기도해서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고, 나아가 전도하여 3천명 5천명을 회개시켜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굴복케 하는 놀라운 생명운동을 일어킨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운동을 방해하는 사단운동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의 사명은 예수생명을 증거하는 복음운동이요, 이 일을 방해하는 사단권세를 결박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에 역사하는 사단의 역사를 완전히 결박하고 복음의 씨가 자라도록 성령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심령상태는 어떠합니까 길 바닥과 같이 굳어진 강팍한 심령이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의 심령에 찾아와서는 복음의 겨자씨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씨를 빼앗아 가버립니다. 애굽의 바로와 같이 강팍한 자가 바로 그러합니다. 돌짝밭 같아서 말씀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심령입니다. 우리의 심령에 세속적인 탐욕과 정욕과 교만의 돌맹이 때문에 복음의 겨자씨가 도무지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중심에 도사리고 있는 세속적인 돌맹이를 골라내어야 합니다. 가시떨기에 얽켜 있는 심령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서 뿌리를 내리고 자랐으나 세상에 온갖 염려와 근심과 걱정에 영적인 모든 기운을 빼앗겨 결실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옥토와 같은 심령입니다. 말씀을 받아 즉시로 뿌리를 내리고 잎이 피고 열매를 맺는 순종하고 헌신하는 충성된 사명자입니다. 이러한 자는 축복의 열매를 삽십배, 육십배, 백배로 결실합니다.
셋째/ 겨자씨 운동은 쉼을 주는 안식운동입니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태복음·13:32)고 했습니다. 공중의 새들이 겨자씨에 보금자리를 마련할 것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사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이성과 상상과 지각을 초월하여 역사하십니다. 겨자씨는 후일에 새들이 거처할 보금자리입니다. 씨뿌리는 비유에서는 새들이 마귀로 나타납니다(마태복음13:4).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새들은 마귀가 아닙니다. 복음의 장막 속에서 안식하는 성도의 피난처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다윗시대 성소에서 찬양하던 고라 자손들은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시편84:3)고 했습니다. 주님의 성소는 미물과 같은 참새와 재비나 순례자 같이 지친 인생에게 영원한 피난처요, 보금자리인 것입니다. 예수는 인생에게 쉼과 안식을 주는 영원한 피난처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11:28)고 했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주님 앞에서 살길을 얻었습니다(요한복음8:1-11). 일생을 창기와 같이 세월을 허송한 수가성 여인도 주님을 만나고는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요한복음4:28-30). 십자가 우편 강도는 마지막 운명 직전에 주님을 영접하므로 낙원에 부름을 받았습니다(누가복음23:43).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발견한 이후에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던 것입니다(빌립보서3:7-9). 그래서 그는 디모데를 향하여 권면하기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디모데후서4:2)고 했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급하고 더 중요하고 더 가치있는 일은 없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사도행전20:24). 그는 인생 말년에 참으로 귀한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디모데후서4:7)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은 다 겨자씨 운동을 일어킨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가난안에 이식해 온 겨자씨였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바로의 궁에 묻힌 겨자씨 였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궁에 심겨진 겨자씨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의 임금들을 위한 겨자씨였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겨자씨였습니다. 주기철 손양원 목사는 한국교회사에 겨자씨였습니다. 밀알제단은 창원시민과 한국교회의 직분론 개혁과 땅끝까지 복음전하는 겨자씨입니다. 한 주간 동안도 겨자씨 운동을 일어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949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