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당신을 부르십니다 (마11:28-30)
본문
예수님은 당신을 부르십니다. 참된 자유자는 누구인가 톨스토이의 “돌과 두 여자”란 작품에 이러한 애기가 있습니다. 두 여인이 한 노파를 찼아왔습니다. 그중 한 여인은 죄가 많다고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다른 여인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노파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일을 시켰습니다. 죄가 많다는 여인에게는 “크고 무거운 돌을 하나 가져오라”고 했으며, 죄가 없다는 여인에게는 “작은 돌을 한 움큼 주워 오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돌을 가져왔을 때 노파는 “이제 다시 그 돌을 제자리에 갔다 놓으라”고 했습니다. 큰 돌을 가져온 여인은 정확하게 돌을 제자리에 갖다 놓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작은 돌을 주워온 여인은 그 돌을 어디서 주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서성거리다가 되돌아 왔습니다. 그때 노파는 말씀하기를 “죄가 있다고 한 자는 자기 양심의 위치를 알고 있으니 자유로운 자”라고 했습니다. 세리의 기도가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낫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습니다(사무엘상16:7). 주님은 심중에 의(義=예수)를 사모하는 중심이 바른 창기가 속에는 시기와 쟁투로 가득차 있으면서 겉은 선행과 금식과 십일조로 위장한 외식하는 바리새인보다 낫다고 했습니다(누가복음18:9-14).
첫째:모든 인생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인생은 다 죄인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법(헌법)에 자유 하면 죄인이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혹은 도덕이나 윤리적으로 살면 선한 사람인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를 향해 이미 살인했다(마태복음 5:22)고 하며, 탐심만 가져도 도적질한 것이라(디모데전서 6:10)고 했으며,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마태복음 5:28)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10)라고 했으며,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편 51:5)고 했으며,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한일서 1:8-10)고 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계약을 맺었습니다(창세기 2:16-17) 그러나 아담은 그 계약을 파괴하고 말았습니다.(창세기 3:6-7)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임하였습니다(창세기 3:16-19) 범죄한 인간에게 나타난 결과는 바로 이러했습니다.
1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사명을 망각하고 포기해 버렸습니다.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피조세계가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수고하지 않고는 땅이 소산을 내지 않았으며, 에덴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2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 났습니다. 에덴에서 버림받은 인간은 돋아난 가시와 엉겅퀴에 찔리고 피흘림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고통의 인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가시는 인생을 찌르고, 엉겅퀴는 우리를 얽어매어 세상 염려로 하나님을 등지게 하여 에덴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3 땀흘리는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이마에 땀이 흐리지 않고는 식물을 먹을 수 없게 했습니다. 학생은 땀흘려 공부해야 하고, 사업하는 자는 땀흘려 수고해야 하며, 정치인은 땀흘려 경쟁해야 만이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실락원이 아니라 복락원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순간 즉시 죽지 않고 죽음에 이르는 병이 들어 고통 중에서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국은 이러했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세기 3:23-24) 실낙원의 인생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이러합니다. 만약 범죄한 아담이 에덴에 거하면서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멸망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에서 좇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에덴을 천사들로 하여금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지키게 하셨습니다. 아담이 에덴으로 복귀하는 데는 칼에 찔리는 피흘림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누구의 대속의 죽음이 없이는 에덴 진입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 대속의 죽음을 주님은 갈보리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5),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마가복음 15:37-38),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브리서 10:20),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 6:23)고 했습니다.
둘째:예수님의 마음을 배웁시다. 주님의 마음은 온유합니다. 여기 온유(파라우스-Πρα)란 말은
1 환자의 열이 내려진 상태입니다. 환자가 열이 나서 정신을 잃고 있을 때 환자에게 해열제를 써서 정상 체온을 유지하게 할 때가 파라우스한 상태입니다. 마치 세속의 감정으로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자가 말씀으로 세속적인 열기가 잡혀졌을 때 온유한 사람입니다.
2 이마에 흐르는 땀이 식혀 졌을 때입니다. 농부가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구슬 같은 땀을 흘리다가 갑자기 불어오는 구름이 태양을 가리워 흐르는 땀이 식고 바람으로 열기가 잡혀졌을 때가 온유한 상태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구름 기둥 아래서 안식을 찾음과 같습니다.
3 교육과 훈련으로 길들여진 상태입니다. 조련사에 의해 야생 짐승이 훈련을 받아 길이 들어져 주인의 뜻을 헤아릴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집에 기르는 가축은 주인의 뜻을 잘 아나 야생 짐승이 주인의 뜻을 알리가 없습니다. 사단의 권세 아래서 야수와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길이 잘 드려져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 온유한 상태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겸손합니다.
1 주님의 탄생을 봅시다. 하늘보좌에서 가장 작은 나라 유대에, 가장 작은 동네 베들레헴에, 가장 추한 마구간에 오셨던 것입니다(마태복음 2:1, 누가복음 2:7).
2 주님의 사역을 봅시다. 주님은 선생된 그가 친히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섬기는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왕으로서 천하가 다 주님의 것이나 여우도 굴이 있고 나는 새도 둥지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 없이 일하셨던 것입니다(누가복음9:58).
3 주님의 죽음을 봅시다. 최후에 죽으실 때는 좌우편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으며, 자신이 누울 굴(무덤)도 없어서 남의 무덤에 누우셨던 것입니다(마태복음 27:38, 마가복음 15:46).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온유와 겸손을 하나로 묶은 단어가 순종입니다. 바울은 주님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5-8)고 했습니다.
셋째:쉼과 참 안식을 얻습니다. 벗어야 할 짐과 져야할 멍에가 있습니다.
1 율법의 짐을 벗어야 합니다. 예수를 알기 이전에 졌던 율법의 짐을 벗어버리기 전에는 우리에게 참 자유가 없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안겨 준 것은 들으면 들을수록 부담이 되고, 알면 알수록 무거운 짐이 되었으며, 행하면 행할 수록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시 지혜자들인 율법주의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와 같은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던 것입니다(마태복음 11:25) 복음의 멍에를 매어야 합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안겨준 멍에는 사랑의 멍에입니다. 이 멍에는 가벼운 것이며, 질수록 기쁨이 넘치며, 맬수록 평안과 안식이 넘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루신 것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시고(소명), 직분을 맡기시고(사명)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성취). 우리는 주님의 도구로서 순종할 따름입니다. 이것이 사명자가 걸어가는 십자가의 도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인생이 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원리란 복음을 위하여 죽으면 살고, 잃으면 얻고, 나누어 주면은 풍성히 누리게 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누가복음 9:24)고 했습니다.
1 수가성 여인을 봅시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요한복음 4:28)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만나면 세속적인 가치관이 완전히 변합니다.
2 세리장 삭개오를 봅시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누가복음 9:8)고 했습니다. 탐욕의 종이 되어 가난한 부자였던 그가 심령의 부요함으로 누리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3 사울의 변화를 봅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립보서 3:7-9)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이 시간 당신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지고 있는 수고하고 무거운 자녀의 문제, 아내와 남편의 문제, 사업의 문제로 오는 모든 짐을 예수님께 맡기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나의 이전에 강퍅한 모습이 온유와 겸손함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소유하여 한 주간을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습니다(사무엘상16:7). 주님은 심중에 의(義=예수)를 사모하는 중심이 바른 창기가 속에는 시기와 쟁투로 가득차 있으면서 겉은 선행과 금식과 십일조로 위장한 외식하는 바리새인보다 낫다고 했습니다(누가복음18:9-14).
첫째:모든 인생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인생은 다 죄인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법(헌법)에 자유 하면 죄인이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혹은 도덕이나 윤리적으로 살면 선한 사람인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를 향해 이미 살인했다(마태복음 5:22)고 하며, 탐심만 가져도 도적질한 것이라(디모데전서 6:10)고 했으며,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마태복음 5:28)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10)라고 했으며,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편 51:5)고 했으며,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한일서 1:8-10)고 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계약을 맺었습니다(창세기 2:16-17) 그러나 아담은 그 계약을 파괴하고 말았습니다.(창세기 3:6-7)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임하였습니다(창세기 3:16-19) 범죄한 인간에게 나타난 결과는 바로 이러했습니다.
1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사명을 망각하고 포기해 버렸습니다.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피조세계가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수고하지 않고는 땅이 소산을 내지 않았으며, 에덴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2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 났습니다. 에덴에서 버림받은 인간은 돋아난 가시와 엉겅퀴에 찔리고 피흘림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고통의 인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가시는 인생을 찌르고, 엉겅퀴는 우리를 얽어매어 세상 염려로 하나님을 등지게 하여 에덴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3 땀흘리는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이마에 땀이 흐리지 않고는 식물을 먹을 수 없게 했습니다. 학생은 땀흘려 공부해야 하고, 사업하는 자는 땀흘려 수고해야 하며, 정치인은 땀흘려 경쟁해야 만이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실락원이 아니라 복락원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순간 즉시 죽지 않고 죽음에 이르는 병이 들어 고통 중에서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국은 이러했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세기 3:23-24) 실낙원의 인생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이러합니다. 만약 범죄한 아담이 에덴에 거하면서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멸망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에서 좇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에덴을 천사들로 하여금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지키게 하셨습니다. 아담이 에덴으로 복귀하는 데는 칼에 찔리는 피흘림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누구의 대속의 죽음이 없이는 에덴 진입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 대속의 죽음을 주님은 갈보리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5),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마가복음 15:37-38),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브리서 10:20),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 6:23)고 했습니다.
둘째:예수님의 마음을 배웁시다. 주님의 마음은 온유합니다. 여기 온유(파라우스-Πρα)란 말은
1 환자의 열이 내려진 상태입니다. 환자가 열이 나서 정신을 잃고 있을 때 환자에게 해열제를 써서 정상 체온을 유지하게 할 때가 파라우스한 상태입니다. 마치 세속의 감정으로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자가 말씀으로 세속적인 열기가 잡혀졌을 때 온유한 사람입니다.
2 이마에 흐르는 땀이 식혀 졌을 때입니다. 농부가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구슬 같은 땀을 흘리다가 갑자기 불어오는 구름이 태양을 가리워 흐르는 땀이 식고 바람으로 열기가 잡혀졌을 때가 온유한 상태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구름 기둥 아래서 안식을 찾음과 같습니다.
3 교육과 훈련으로 길들여진 상태입니다. 조련사에 의해 야생 짐승이 훈련을 받아 길이 들어져 주인의 뜻을 헤아릴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집에 기르는 가축은 주인의 뜻을 잘 아나 야생 짐승이 주인의 뜻을 알리가 없습니다. 사단의 권세 아래서 야수와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길이 잘 드려져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 온유한 상태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겸손합니다.
1 주님의 탄생을 봅시다. 하늘보좌에서 가장 작은 나라 유대에, 가장 작은 동네 베들레헴에, 가장 추한 마구간에 오셨던 것입니다(마태복음 2:1, 누가복음 2:7).
2 주님의 사역을 봅시다. 주님은 선생된 그가 친히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섬기는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왕으로서 천하가 다 주님의 것이나 여우도 굴이 있고 나는 새도 둥지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 없이 일하셨던 것입니다(누가복음9:58).
3 주님의 죽음을 봅시다. 최후에 죽으실 때는 좌우편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으며, 자신이 누울 굴(무덤)도 없어서 남의 무덤에 누우셨던 것입니다(마태복음 27:38, 마가복음 15:46).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온유와 겸손을 하나로 묶은 단어가 순종입니다. 바울은 주님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5-8)고 했습니다.
셋째:쉼과 참 안식을 얻습니다. 벗어야 할 짐과 져야할 멍에가 있습니다.
1 율법의 짐을 벗어야 합니다. 예수를 알기 이전에 졌던 율법의 짐을 벗어버리기 전에는 우리에게 참 자유가 없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안겨 준 것은 들으면 들을수록 부담이 되고, 알면 알수록 무거운 짐이 되었으며, 행하면 행할 수록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시 지혜자들인 율법주의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와 같은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던 것입니다(마태복음 11:25) 복음의 멍에를 매어야 합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안겨준 멍에는 사랑의 멍에입니다. 이 멍에는 가벼운 것이며, 질수록 기쁨이 넘치며, 맬수록 평안과 안식이 넘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루신 것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시고(소명), 직분을 맡기시고(사명)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성취). 우리는 주님의 도구로서 순종할 따름입니다. 이것이 사명자가 걸어가는 십자가의 도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인생이 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원리란 복음을 위하여 죽으면 살고, 잃으면 얻고, 나누어 주면은 풍성히 누리게 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누가복음 9:24)고 했습니다.
1 수가성 여인을 봅시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요한복음 4:28)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만나면 세속적인 가치관이 완전히 변합니다.
2 세리장 삭개오를 봅시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누가복음 9:8)고 했습니다. 탐욕의 종이 되어 가난한 부자였던 그가 심령의 부요함으로 누리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3 사울의 변화를 봅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립보서 3:7-9)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이 시간 당신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지고 있는 수고하고 무거운 자녀의 문제, 아내와 남편의 문제, 사업의 문제로 오는 모든 짐을 예수님께 맡기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나의 이전에 강퍅한 모습이 온유와 겸손함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소유하여 한 주간을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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