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자는 소망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창37:5-11)
본문
소망을 품고 살면 고난을 이깁니다. 인생은 꿈을 먹고사는 소망을 가진 존재입니다. 꿈은 창조주가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꿈의 사람은 미래를 보고 살므로 현실에 묶이지 않을 뿐 아니라 과거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인생에게 꿈을 파는 백화점이요, 목사는 꿈을 파는 설교자입니다. 모든 인생이 소유할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고린도후서4:7)라고 했습니다. 질그릇 인생이 값진 보배를 소유함으로 그 신분이 완전히 바꾸어진 것입니다. 밀알교회는 꿈을 파는 제단입니다. 저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수종들면서 밀알제단을 통해 이 시대를 향해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닫았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주님은 밀알교회를 세우셨고, 저와 여러분을 이 교회에 사명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일에 사명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일을 위하여 존재하며, 이 일 외에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삶을 요셉을 통해서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요셉의 신앙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형통의 신앙입니다.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사는 삶이 요셉의 생활철학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전의식의 삶으로 환경을 초월한 기쁨과 감사와 감격을 누렸던 것입니다. 꿈을 가진 그는 가는 곳마다 승리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요셉이 승리한 비결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삶을 가능하게 하셨는가 그는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았습니다.
첫째:요셉은 불의를 행하는 형들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십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창세기37:2)고 했습니다. 요셉은 배다른 혈육의 형제들과 들에서 아비의 양을 칠 때에 형들이 불의한 방법으로 아비의 양들을 취할 때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으며, 그 불의함을 아버지께 고했던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죄를 멀리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비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비 야곱이 다른 아들들 보다 요셉을 특별히 사랑하여 채색옷을 지어 입힌 것은 혈육의 정 이상인 요셉의 정직함을 보았던 것입니다(창세기37:2-3). 그래서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창세기37:4). 형들은 자기들의 과오는 생각지 않고, 정직한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것을 아버지의 편애인줄로 생각하여 시기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요셉을 이방의 상인에게 팔았던 것입니다. 인간을 넘어지게 한 최초의 죄악이 무엇인가 탐심의 죄요, 탐욕의 죄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2:17)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사단은 찾아와서 유혹합니다(창세기3:4). 아비가 금하신 것을 형들은 불의한 방법으로 취하려고 했으나 요셉은 함께 하지도 않았고 그 불의함을 아버지께 고발한 것입니다.
둘째: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습니다. “그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창세기39:7-10)고 했습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가서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갔습니다(창세기37:28, 36).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이방으로 팔려가지만 그들 배후에는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요셉과 함께 하셨으며, 이 사실을 요셉의 주변 사람들이 볼 수 있었으며, 요셉은 범사에 형통을 누렸던 것입니다(창세기39:2,
3,
5). 이러한 요셉에게 사단은 교묘한 방법으로 그를 미혹해 왔습니다. 배부른 인생에게 찾아오는 시험이 이성적인 정욕입니다. 이때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세기39:9) 하며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이 내속에 거하시는데 감히 어찌 불의한 악을 품을 수 있습니까 죄를 품고 마귀와 함께 궁궐같은 집에 있기보다는 중상과 모략을 당해도 옥중에서 의를 사모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있음이 나음을 알고 불의한 시위대장의 집보다는 죄수들의 처소인 감옥을 택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혼란케 하는 사단의 미혹이 육신의 정욕을 통한 이성적인 유혹입니다. 세속적인 정욕을 쫓아 행하는 육체의 쾌락은 심령의 황폐케 합니다. 이러한 시험을 이기는 비결은 요셉과 같이 거절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말세의 현상이 이성적인 유혹입니다. 노아의 시대가 그러했고, 소돔 고모라가 그러했으며, 오늘날 우리 시대가 그러합니다.
셋째:요셉은 옥중에서 사람의 도움을 포기했습니다. “당신이 득의 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않고 있었더라, 만 이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창세기 40:14, 23, 41: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옥에서도 요셉에게 형통함을 주셨던 것입니다. 요셉은 전옥에게 은혜를 입었습니다(창세기39:21) 인간의 위대함은 삶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내용에 있습니다. 그가 술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었을 때 그 마음 한 구석에는 사람을 의지하는 연약함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잊게 하셨습니다(창세기40:28). 그 후에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을 때는 그는 인간적인 도움을 완전히 포기했으며,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옥중에서 하나님의 주권신앙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를 옥으로 인도하신 것이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후일에 바로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 하시리이다”(창세기41:16)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연약한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닥치고 고통의 날이 길어지면 자연히 연약해져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는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광야에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후에 40일을 참지 못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입니다(출애굽기32:1). 하나님은 옥중에서 요셉에게 이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넷째:요셉은 형들을 미워하는 증오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의 아비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세기45:5, 8, 50:19-21)고 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기에게 와서 절할 때 이미 옛날에 꾼 꿈을 기억했습니다(창세기42:6, 9) 그 꿈이 하나님이 주신 꿈이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들 앞서 나를 먼저 이곳으로 보내었던 것입니다(창세기45:5).
그러므로 그가 인간적인 복수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아비가 죽었을 때 불안해하는 형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했던 것입니다(창세기50:21) 후일에 그 자신이 죽을 때도 하나님은 그들을 바로의 손에서 권고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50:25). 인간의 내면세계에 자리잡고 있는 가장 무거운 돌이 무엇인가 사람을 미워하는 증오의 돌입니다. 이 돌이 한번 박히면 쉽게 뽑히지 않습니다. 인생의 불행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행복하려면 사람을 사랑하면 행복합니다. 사람은 사람을 떠나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사랑으로 복을 비는 것을 허락해서나 증오하고 저주하는 것은 허용치 않고 하나님 자신의 주권에 제한시켜 두신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로마서12:19)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의 신학과 신앙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그의 신학은 형통의 신학이요, 그의 신앙은 감사생활입니다. 그는 범사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환경을 초월한 형통함을 누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주권 앞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긴 것입니다. 그에게 꿈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그를 애굽에 팔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그를 감옥에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그를 총리로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김용기 장로와 장기려 박사입니다. 이들은 혼탁한 사회에 작은 등불이 되어 어두운 사회를 비추어 주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혈육의 정에 묶이지 않으면 사회와 인류를 보는 안목이 열릴 것이며, 소유한 제물에 집착하지 않으면 천지에 충만한 하나님의 자원을 누릴 것이며, 보이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으면 영원히 빛나는 이름을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10:31) 이것이 인간의 존재목적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16:31)
여러분도 이 일에 사명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일을 위하여 존재하며, 이 일 외에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삶을 요셉을 통해서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요셉의 신앙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형통의 신앙입니다.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사는 삶이 요셉의 생활철학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전의식의 삶으로 환경을 초월한 기쁨과 감사와 감격을 누렸던 것입니다. 꿈을 가진 그는 가는 곳마다 승리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요셉이 승리한 비결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삶을 가능하게 하셨는가 그는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았습니다.
첫째:요셉은 불의를 행하는 형들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십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창세기37:2)고 했습니다. 요셉은 배다른 혈육의 형제들과 들에서 아비의 양을 칠 때에 형들이 불의한 방법으로 아비의 양들을 취할 때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으며, 그 불의함을 아버지께 고했던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죄를 멀리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비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비 야곱이 다른 아들들 보다 요셉을 특별히 사랑하여 채색옷을 지어 입힌 것은 혈육의 정 이상인 요셉의 정직함을 보았던 것입니다(창세기37:2-3). 그래서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창세기37:4). 형들은 자기들의 과오는 생각지 않고, 정직한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것을 아버지의 편애인줄로 생각하여 시기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요셉을 이방의 상인에게 팔았던 것입니다. 인간을 넘어지게 한 최초의 죄악이 무엇인가 탐심의 죄요, 탐욕의 죄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2:17)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사단은 찾아와서 유혹합니다(창세기3:4). 아비가 금하신 것을 형들은 불의한 방법으로 취하려고 했으나 요셉은 함께 하지도 않았고 그 불의함을 아버지께 고발한 것입니다.
둘째: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습니다. “그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창세기39:7-10)고 했습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가서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갔습니다(창세기37:28, 36).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이방으로 팔려가지만 그들 배후에는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요셉과 함께 하셨으며, 이 사실을 요셉의 주변 사람들이 볼 수 있었으며, 요셉은 범사에 형통을 누렸던 것입니다(창세기39:2,
3,
5). 이러한 요셉에게 사단은 교묘한 방법으로 그를 미혹해 왔습니다. 배부른 인생에게 찾아오는 시험이 이성적인 정욕입니다. 이때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세기39:9) 하며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이 내속에 거하시는데 감히 어찌 불의한 악을 품을 수 있습니까 죄를 품고 마귀와 함께 궁궐같은 집에 있기보다는 중상과 모략을 당해도 옥중에서 의를 사모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있음이 나음을 알고 불의한 시위대장의 집보다는 죄수들의 처소인 감옥을 택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혼란케 하는 사단의 미혹이 육신의 정욕을 통한 이성적인 유혹입니다. 세속적인 정욕을 쫓아 행하는 육체의 쾌락은 심령의 황폐케 합니다. 이러한 시험을 이기는 비결은 요셉과 같이 거절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말세의 현상이 이성적인 유혹입니다. 노아의 시대가 그러했고, 소돔 고모라가 그러했으며, 오늘날 우리 시대가 그러합니다.
셋째:요셉은 옥중에서 사람의 도움을 포기했습니다. “당신이 득의 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않고 있었더라, 만 이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창세기 40:14, 23, 41: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옥에서도 요셉에게 형통함을 주셨던 것입니다. 요셉은 전옥에게 은혜를 입었습니다(창세기39:21) 인간의 위대함은 삶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내용에 있습니다. 그가 술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었을 때 그 마음 한 구석에는 사람을 의지하는 연약함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잊게 하셨습니다(창세기40:28). 그 후에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을 때는 그는 인간적인 도움을 완전히 포기했으며,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옥중에서 하나님의 주권신앙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를 옥으로 인도하신 것이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후일에 바로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 하시리이다”(창세기41:16)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연약한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닥치고 고통의 날이 길어지면 자연히 연약해져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는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광야에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후에 40일을 참지 못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입니다(출애굽기32:1). 하나님은 옥중에서 요셉에게 이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넷째:요셉은 형들을 미워하는 증오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의 아비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세기45:5, 8, 50:19-21)고 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기에게 와서 절할 때 이미 옛날에 꾼 꿈을 기억했습니다(창세기42:6, 9) 그 꿈이 하나님이 주신 꿈이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들 앞서 나를 먼저 이곳으로 보내었던 것입니다(창세기45:5).
그러므로 그가 인간적인 복수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아비가 죽었을 때 불안해하는 형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했던 것입니다(창세기50:21) 후일에 그 자신이 죽을 때도 하나님은 그들을 바로의 손에서 권고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50:25). 인간의 내면세계에 자리잡고 있는 가장 무거운 돌이 무엇인가 사람을 미워하는 증오의 돌입니다. 이 돌이 한번 박히면 쉽게 뽑히지 않습니다. 인생의 불행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행복하려면 사람을 사랑하면 행복합니다. 사람은 사람을 떠나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사랑으로 복을 비는 것을 허락해서나 증오하고 저주하는 것은 허용치 않고 하나님 자신의 주권에 제한시켜 두신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로마서12:19)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의 신학과 신앙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그의 신학은 형통의 신학이요, 그의 신앙은 감사생활입니다. 그는 범사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환경을 초월한 형통함을 누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주권 앞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긴 것입니다. 그에게 꿈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그를 애굽에 팔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그를 감옥에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그를 총리로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김용기 장로와 장기려 박사입니다. 이들은 혼탁한 사회에 작은 등불이 되어 어두운 사회를 비추어 주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혈육의 정에 묶이지 않으면 사회와 인류를 보는 안목이 열릴 것이며, 소유한 제물에 집착하지 않으면 천지에 충만한 하나님의 자원을 누릴 것이며, 보이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으면 영원히 빛나는 이름을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10:31) 이것이 인간의 존재목적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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