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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원리는 이러합니다 (레1:1-17)

본문

하나님께 상달되는 예배를 드립시다. 예배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수 있는 유일한 특권이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아니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잘못 드려진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례가 많습니다. 바른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이 단절됩니다. 먼저 예배에 대하여 성경적인 가르침을 간단히 시대별로 찾아보고자 합니다. 구약에 나타난 대표적인 모델은 아벨의 제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최초로 공개한 예배 계시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리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창세기 4:3-5)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거부하시고 아벨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는가 중요한 것은 언약과 믿음과 경건입니다. 예배에는 언약에 기초한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곧 신약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음은 믿음으로 드리는 영적인 교통입니다. 영적인 교통이 없는 예배는 우상숭배행위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다음은 경건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모시는 경건함이 없는 무례한 행위는 예배일 수가 없습니다. 신약에서 제시한 예배는 어떠한가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에게 참된 예배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3-24)고 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 앞에 제물될 나 메시야가 왔으니 나를 통하여 아버지께로 나아 오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교회시대에 바울은 이렇게 증거 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1-1)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 안에서 변화 받은 성도는 그 삶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벨이 드린 양의 첫 새끼나, 주님이 말씀하신 참된 예배나, 바울이 강조한 몸으로 드릴 산 제사가 시대적인 관점이 다를 뿐이지 그 내용은 다 동일한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예배 원리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한 계시가 구약과 신약을 통해서 다 계시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찾기에 너무도 좋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하여 성령님으로 충만하면 어디서나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참된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첫째:회막중심으로 모입시다. 회막은 언약의 처소입니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1)라고 했습니다. 회막이 세워짐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회막중심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회막에 언약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공간적인 의미인 장소입니다. 지정한 장소를 중심으로 모이는 예배의 시작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적 경건입니다. 언약을 중심해서 경건한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가는 영적예배입니다. 예배에 이 두 가지 요소를 무시하면 안됩니다. 회막의 비밀이 바로 이것입니다. 보이는 처소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입니다. 우리가 범하기 쉬운 함정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사무엘상 16:7)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은 중심을 모르고 외모에만 치우치기 쉬우나 하나님은 외모에 가리워져 있는 중심까지 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양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에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태복음 23:23)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보이는 외식에만 눈이 어두워서 신령한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고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보이는 헌신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경건도 중요함으로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서, 정한 제물을 가지고, 정성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보이는 헌신도 중요할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경건함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둘째:제물을 가지고 모입시다. 제사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제물입니다. 제사 없이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으므로 제사는 반드시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제사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제물입니다. 제물이 없는 제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번제물에 필요한 제사는 소나 양이나 염소 혹은 비둘기로 드리게 했습니다. 번제물은 반드시 피의 제물로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제물이 곧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제물을 드리는 각인의 형편에 따라 제물을 달리 했습니다. 부요한 자는 소를 드리게 했고, 중산층의 자들은 양이나 염소를 드리게 했으며, 가난한 자들은 비둘기로 드리게 했습니다. 한가지 기억할 것은 예배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제물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 자체가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가난한 우리와 동창생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예수님을 낳고 결례를 좇아 예루살렘에 갔을 때 비둘기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누가복음 2:24)고 했습니다. 주님은 구원사역을 행하시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연보를 절대로 폐지하거나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하다고 연보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연보하는 액수를 보면서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보궤 곁에 앉아서 연보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가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누가복음 12:41-44)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계시된 것은 이러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태복음 25:21, 23)고 했습니다. 이는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열을 가져왔을 때와 두 달란트 받은 자가 넷을 가져 왔을 때 둘다 작은 일이라고 했으며, 그 칭찬이 다 동일했습니다.
셋째:거룩함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레위기는 거룩한 책입니다. 그래서 거룩이라는 말이 본서에 120회 이상 사용되었습니다. 본서의 중심성구도 그러합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위기 19:2)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것은 거룩해야 합니다. 사람도 거룩하게 구별함을 받은 제사장이 드렸으며, 시간도 거룩하게 구별된 안식일을 성일로 지켰으며, 장소도 거룩하게 구별된 성막이었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제물을 통해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 제물은 바로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1-12)고 했습니다. 그래서 소나 양으로 드릴 때는 외적으로는 “흠없는 수컷으로”(3, 10)으로 드려야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는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9, 13)으라고 했습니다. “멱통과 그 더러운 것은 제하여 단 동편 재 버리는 곳에 던지고”(16)라고 했습니다. 더러운 것은 성막 안으로 가져갈 수 없을 뿐 아니라 단에 올려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므로 더럽고 속된 것은 받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앞에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셋째:경건한 삶으로 드려야 합니다. 제물속에 나타난 계시는 이러합니다. 아무 짐승이나 드리지 않게 하시고 지정해 주심에는 그 속에 감추어진 뜻이 있습니다. 꼭 풍유적 의미인 알레고리적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주어진 제물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것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구별된 신실함과 성결한 삶입니다. 소는 부지런한 짐승입니다. 초식동물은 스스로 노력해서 먹이를 찾습니다. 이것은 천지창조시 인간에게 주신 근로의 사명을 가르쳐 주십니다. 바울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데살로니가후서 3:10)고 했으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로마서 12:11)고 했습니다. 소는 성결한 짐승입니다. 되새김질을 하므로 섭취한 것을 한번 걸러서 불결한 것은 다시 걸러 냅니다. 마치 성도들의 회개하는 삶과도 같습니다. 레위기에 나타난 성민의 성결함은 소의 제물에서 나타납니다. 순종의 삶입니다. 양은 목자에게 절대의존적이므로 목자 없는 양은 하루도 살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에는 풀과 물이 흔치 않습니다. 양은 목자 인도를 받지 않으면 죽습니다. 주님은 온유와 겸손의 성품을 가지고 순종의 삶을 살았던 분입니다. 믿음의 종들은 진리 앞에 순종하나 세인들은 권력 앞에 맹종합니다. 순결과 평화의 삶입니다. 노아 홍수 심판이 물러간 후에 하나님은 까마귀와 비둘기를 보내었는데 비둘기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주님은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했습니다. 일본 히로시마 평화공원 비둘기를 기릅니다.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참된 평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예배는 이러합니다. 회막 중심으로 모여야 합니다. 제물을 가지고 드려야 합니다. 거룩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경건함 삶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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