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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복종 (요2:1-11)

본문

우리 모두 순종의 사람이 됩시다. 모든 역사는 순종의 결과입니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그리스도에게 초점을”(Focus on Church)이라는 저서에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고백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 간의 차이는 놀라울 정도로 명백해야만 한다. 그럴 때 불신자들이 그리스도께 매혹된다”고 했습니다. 인도인을 교육하는 어느 힌두교 강사가 불순종하는 크리스천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러분 중 다수가 그리스도인임을 알고 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산다면 인도가 내일 여러분 발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고 했습니다.
미국의 선셋 장로교회(Sunset Presbyterian Church)의 론 킨케이드(Ron Kincaid)목사는 성도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불신자들을 실망시키지만 성도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불신자들을 매혹시킨다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순종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으니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사무엘상 15:22)고 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순종을 거저 말씀 듣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순종이란 자신의 삶에 대한 변화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란 내 자신의 삶에 대한 개혁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절대 복종합시다. 갈릴리 가나 동네에 혼인 잔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그 어머니 마리아가 청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그 잔치에 손님을 접대하는 중요한 일손을 맡아서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잔치가 한창 무러 익어 갈 무릎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예수님께 달려 와서 간청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거절했다가 그 간청에 들어 주셨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고 했습니다. 하인들은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 하인들과 같은 믿음과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이치에 맞지 않아도 순종합시다. 하인들은 이치에 맞지 않아서도 순종했습니다. 그 시대의 결혼 풍습을 오늘날 우리 시대의 결혼식과 같이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즉시로 준비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시대는 사전에 준비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일차산업의 구조속에 살았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사람들은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특별히 결혼은 일생에 한 번 있는 일륜지 대사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 사건을 구원 역사인 성경에 기록한 것은 영적인 의미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 잔치의 풍요로움을 책임진 연회장을 율법에 비유한다면 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줄 복음입니다. 문제는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물을 길러 와서 채우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포도주이지 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포도주를 달라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인들은 그대로 순종하신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그는 아람 나라 군대 장관입니다. 그는 왕에게 총애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과 같이 그 인생에 아름다움이 시들어 떨어졌습니다. 그 당시 불치의 병인 문둥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의 계집종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에게로 왔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각대로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전혀 이치에 맞지도 않은 소리를 합니다.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열왕기하 5:10)고 했습니다. 분노한 나아만 장군은 당장에 돌아가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처들어올려고 했습니다. 사람을 인간적인 대접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윤리와 도덕도 저버릴 뿐 아니라 이치에도 맞지 않는 소리를 합니다. 그가 돌아갈려고 하는데 그 종들이 만류를 했습니다.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열왕기하 5:13)고 했습니다. 그는 이치에 맞지도 않은 말이지만 종들 덕분에 그대로 순종하여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아도 믿고 순종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머리로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천지창조 사건이나 동정녀 탄생이나 예수 십자가 부활사건이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알아야 할 사실은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은 이해하는 책이 압니다. 믿으라고 주신 책입니다. 믿고 보니 깨닫아 알게 됩니다. 이것이 계시의 비밀입니다.
둘째:힘이 들어도 순종합시다. 하인들은 힘들게 수고하여 순종했습니다. 주님은 지금 당장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당시는 오늘날 우리 시대와 전혀 다릅니다. 요즈음 우리의 집에는 부엌이나 뜰에나 어디서에나 수도꼭지가 있습니다. 물을 받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한 마을에 우물 하나 정도 있었습니다(요한복음 4:6). 물 길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물이 깊고 작은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 올리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두 세통 들어가는 돌 항아리 여섯에 물을 아구까지 채운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종들은 말없이 물을 길러서 아구까지 가득 채웠던 것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순종입니다. 사르밧 과부가 그러합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폭악한 정치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저주하여 하늘의 우로를 끊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종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 피신해 있으면서 까마귀를 통해서 먹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릿 시냇가가 마을 때에 그를 시돈 지역에 있는 사르밧 동네의 어느 신실한 한 과부에게로 인도했습니다. 엘리야가 갔을 때 그 여인이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한끼의 빵을 먹고 아들과 함께 죽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처럼 이 여인의 가정에 생명의 젖줄인 빵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집에 주님의 종 엘이야가 찾아갔습니다. 그가 가서 그 여인에게 정말 하기 어려운 부탁을 합니다. 사실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을 합니다. 마지막 남은 한끼의 빵을 자신에게로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열왕기상 17:13)고 했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남의 고통을 생각지 않는 지극히 이기적인 행위인 것 같습니다. 참으로 순종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순종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과 같이 통에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열왕기하 17:16)고 했습니다. 힘이 들어도 믿고 순종합시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가 지키기 어려운 힘든 사명을 주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로 가는 삼일 길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그가 평생에 걸어온 길보다 더 길었을 것이며, 평생에 졌던 짐보다 더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힘이 들어도 끝까지 지시한 말씀을 쫒아 나아가서 여호와 이레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영락교회를 개척한 한경직 목사의 간증입니다. 그가 교회당 건축을 위하여 기공 예배를 드릴 때입니다. 그때 출석 교인이 150여명 되었습니다. 한목사님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헌신을 요구했습니다. 그때 그는 성도들에게 당시 집에 10일 먹을 것만 남기고 다 가지고 오시요 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 말씀에 순종하여 참여한 자가 53명이었습니다. 그후에 30년이 지나서 53명이 한국의 300대 기업안에 다 들어가는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헌신과 순종 뒤에는 하나님의 권고하심이 있습니다.
셋째:자존심이 상해도 순종합시다. 하인들은 자존심이 상해도 순종했습니다. 하인들은 주인과 연회장의 분부를 쫒아 행하면 됩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그들을 불러서 말합니다. 예수가 당신들을 불러서 무엇을 시키면 그대로 순종하시요 라고 했습니다. 연회장과 주인이 있는데 예수의 말을 듣는 것이 그리 마음 편한 일이 아닙니다. 두 세통 더는 여섯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제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갔다 드리라고 합니다. 정상적인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입니다. 종의 심정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요나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합니다(요나 1:2). 요나의 감정은 도무지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 우리 민족들에게도 전할 자가 많은데 니느웨까지 가야 하는가 또 하필이면 이방 중에서도 선량한 민족들이 많은데 유대 민족을 괴롭힌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복을 전해야 하는가 만약 내가 늬느웨에 가면 나는 민족의 반역자요 매국노입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이 편치를 못한 것입니다.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처럼 요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다시스로 향하여 가기로 작정하고 비를 탓습니다. 얼마를 가지 못하여 대풍을 만났습니다.
요나는 상한 감정을 풀고 하나님께 항복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니느웨로 달려갔습니다. 그의 외침을 들었던 니느웨 사람들은 어떠했는가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요나 2:1)고 했습니다. 우리의 자존심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여 나가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자존심이 상해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귀신들린 딸을 고침받기 위하여 자신을 개같이 취급하는 주님 앞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자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사역을 시작할 때 자기부인을 할 수 있는 자라야 주님의 제자로서 적합하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순종의 모델입니다.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신 주님은 자신이 친히 순종의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5-8)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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