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암 (요9:1-7)
본문
영안이 밝아야 합니다. 탐욕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합니다. 옛날 중국 열자 라는 분이 쓴 글에 이러한 애기가 있습니다. 제나라에 어떤 사람이 금이 탐이나서 시장 한 복판에서 남의 금을 훔쳐서 달아나다가 잡혔습니다. 경관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이 시장 한 복판에서 남의 금을 훔쳐 도망치면 잡히지 않을 줄로 생각했느냐”라고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내가 금을 보는 순간 사람은 보이지 않고 금만 보였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탐욕에 눈이 멀어서 죄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 자들이 많습니다. 영안이 열여야 합니다. 모세는 팔십 노년에 미디안 광야에서 가시 떨기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가 그 광경을 보려고 달려갔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애굽기 3:5)고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고 순종하여 신을 벗어 던졌을 때 그에게 신령한 영안이 열였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민족의 고통을 보는 신령한 세계가 열였습니다. 그 가시 떨기에 붙은 불은 바로 모세 자신과 자기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출애굽의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신령한 안목을 가집시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전도하시다가 수전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수전절이란 주전 960년에 건축한 솔로몬 성전이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졌다가 주전 516년경에 재건되었습니다.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했습니다. 왜 주님이 이렇게 하셨는가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안이 밝아야 합니다.
첫째:어떤 사건을 보는 안목이 열립니다. 읽을말씀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1-3) 세인들의 안목은 이러합니다. 만약 우리의 주변에 출생시부터 불구의 몸으로 태어난 자가 있다면 세상사람들은 어떻게 보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명이나 팔자의 소관으로 봅니다. 이 땅 위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운명이나 팔자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건의 저변에는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섭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뜻을 깨닫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하게 하신 것입니다(빌립보서 4:6-7). 고통의 사람 야베스는 기도로서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운명적인 고통을 축복으로 바꾸었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역대상 4:10)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사고는 이러합니다. 모든 인생의 고통은 죄값이라고 보았습니다. 자신이 범죄해서 당한 것이거나 아니면 그 부모와 조상이 범한 죄값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었으니 그 부모나 조상이 범한 죄값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틀린 것이 아니지만 문제의 해답은 아닙니다. 만약에 어떤 분이 이 주변에서 밀알교회를 찾기 위해 물으실 때 창원시내에 있습니다 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맞는 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을 보는 제자들의 안목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우리 주변에 이러한 것을 가르치는 종교적인 집단이 있습니다. 지극히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안목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긍정적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일까
1 인간의 존엄성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죄의 고통 이전에 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 주기 위해서 입니다.
2 미래의 행복을 주기 위함입니다. 세인들과 제자들은 현재의 고통은 과거적인 것으로 보았으나 주님은 현재의 고통에서 미래의 기쁨과 감격을 보여 주었습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이 땅 위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밀알로 살았습니다. 주님을 통해서 어두운 영혼에게 새로운 광명의 빛이 비치게 되었습니다.
둘째:때와 시를 분별하는 지각이 생깁니다. 읽을말씀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 세상에 빛이라”(4-5)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눈은 몸의 들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태복음 6:22-23)고 했습니다. 우리 몸의 지체 중에서 눈의 역할은 참으로 귀합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가치관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것은 정신적으로나 영적인으로 대 변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삶의 의식구조와 가치관의 변화가 없으면 안목이 바뀔 수 없습니다. 지금은 때가 낮입니다. 본문 4-5절에서 키워드(key word)를 찾으면 동일한 의미의 반복적인 단어 몇 가지가 나옵니다. 때, 낮, 일, 빛 이라는 말입니다. 때가 낮이라는 것은 빛이 비취는 시간을 말합니다. 빛이 있는 동안은 일할 시간입니다. 이것은 창조질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인하여 이러한 창조질서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창조질서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빛이 등장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한복음 1:9)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어두움에 처한 각인에게 참빛 되신 주님이 비쳐졌습니다. 그 주님을 영접하여 빛의 세계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신의 때는 언제인가 사단의 지배 아래서 세상술에 취하여 세월을 허송하고 있지는 않은가 바울은 지금 당신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로마서 13:12-14)고 했습니다. 예수를 모셨으면 지금 일할 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좇아 실로암으로 나아갑시다. 역사는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셋째:말씀에 순종함으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읽을말씀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6-7) 성경은 계시(revelation)의 책입니다.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은 성경을 통해서 펼쳐 보입니다. 주님은 왜 이 소경에게 치유역사를 이렇게 행하셨는가 평범한 인간의 지각으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은 부분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주님의 숨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보기 위함입니다.
실로암으로 가서 라고 했습니다. 왜 실로암까지 가라고 했는가 실로암 샘물이 효능이 있어서 그러한가 아닙니다. 주님이 능력이 모자라서 그러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 예루살렘 성 동문밖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샘 실로암으로 가서 씻으라고 했는가 그것은 주님이 보내심에 대한 순종을 시험한 것입니다(창세기 22:2). 그가 실로암으로 가는 순종의 행위는 세상의 모든 불신앙을 거부하는 행동이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 눈에 흙을 발라서 실로암까지 가는 동안에 그를 보는 사람들에게 비소와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경된 몸으로 갈 때 넘어지고 자빠지는 고통도 감수해야 합니다. 이러한 환경적인 어려움을 감수하고 순종하는 행위를 시험해 본 것입니다. 가서 씻으라 고 했습니다. 씻는 것은 믿음입니다. 대부분의 세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거기 가서 씻는다고 낫겠는가 나도 가서 씻어 보고 목욕도 해 보았다 고 말할 것입니다. 또한 아람 나라 군대장관 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열왕기하 5:12). 그러나 소경된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었습니다. 가족이나 친족이나 이웃이나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그는 가기로 작정했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씻을 때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었습니다. 베드로가 소명을 받았을 때 가졌던 믿음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누가복음 5:5)고 했습니다. 밝은 눈 은 순종에 대한 응답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순종하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왜 실로암으로 보내었는가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실로암에는 주님의 약속이 있는 곳입니다. 모리아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곳입니다(창세기 22:14). 니느웨는 요나에게 약속한 곳입니다(요나 3:5).
그러므로 당신에게 세상에 모든 길은 막혀 있어도 실로암으로 가는 길만은 열여 있어야 합니다.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가 보내심에 대한 순종하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왔더라 고 함은 감사의 표시입니다. 그가 먼저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받은 바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하기 위한 표시입니다. 성전 미문에서 고침을 받은 앉은뱅이는 고침을 받고 제일 먼저 성전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사도행전 3:8). 받은 바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합시다. 주님은 감사를 잃어버린 자를 향해 말하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마태복음 17:17)고 책망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에게 영적인 안목이 열여야 합니다. 사건을 보는 안목이 열립니다. 때와 시를 분별하는 지혜가 생깁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믿음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오늘 우리 앞에 닥친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 이 무엇인지를 깨닫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감사가 나오게 되며, 당신은 범사에 형통함을 누리게 됩니다. 할렐루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탐욕에 눈이 멀어서 죄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 자들이 많습니다. 영안이 열여야 합니다. 모세는 팔십 노년에 미디안 광야에서 가시 떨기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가 그 광경을 보려고 달려갔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애굽기 3:5)고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고 순종하여 신을 벗어 던졌을 때 그에게 신령한 영안이 열였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민족의 고통을 보는 신령한 세계가 열였습니다. 그 가시 떨기에 붙은 불은 바로 모세 자신과 자기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출애굽의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신령한 안목을 가집시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전도하시다가 수전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수전절이란 주전 960년에 건축한 솔로몬 성전이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졌다가 주전 516년경에 재건되었습니다.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했습니다. 왜 주님이 이렇게 하셨는가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안이 밝아야 합니다.
첫째:어떤 사건을 보는 안목이 열립니다. 읽을말씀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1-3) 세인들의 안목은 이러합니다. 만약 우리의 주변에 출생시부터 불구의 몸으로 태어난 자가 있다면 세상사람들은 어떻게 보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명이나 팔자의 소관으로 봅니다. 이 땅 위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운명이나 팔자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건의 저변에는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섭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뜻을 깨닫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하게 하신 것입니다(빌립보서 4:6-7). 고통의 사람 야베스는 기도로서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운명적인 고통을 축복으로 바꾸었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역대상 4:10)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사고는 이러합니다. 모든 인생의 고통은 죄값이라고 보았습니다. 자신이 범죄해서 당한 것이거나 아니면 그 부모와 조상이 범한 죄값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었으니 그 부모나 조상이 범한 죄값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틀린 것이 아니지만 문제의 해답은 아닙니다. 만약에 어떤 분이 이 주변에서 밀알교회를 찾기 위해 물으실 때 창원시내에 있습니다 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맞는 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을 보는 제자들의 안목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우리 주변에 이러한 것을 가르치는 종교적인 집단이 있습니다. 지극히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안목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긍정적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일까
1 인간의 존엄성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죄의 고통 이전에 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 주기 위해서 입니다.
2 미래의 행복을 주기 위함입니다. 세인들과 제자들은 현재의 고통은 과거적인 것으로 보았으나 주님은 현재의 고통에서 미래의 기쁨과 감격을 보여 주었습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이 땅 위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밀알로 살았습니다. 주님을 통해서 어두운 영혼에게 새로운 광명의 빛이 비치게 되었습니다.
둘째:때와 시를 분별하는 지각이 생깁니다. 읽을말씀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 세상에 빛이라”(4-5)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눈은 몸의 들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태복음 6:22-23)고 했습니다. 우리 몸의 지체 중에서 눈의 역할은 참으로 귀합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가치관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것은 정신적으로나 영적인으로 대 변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삶의 의식구조와 가치관의 변화가 없으면 안목이 바뀔 수 없습니다. 지금은 때가 낮입니다. 본문 4-5절에서 키워드(key word)를 찾으면 동일한 의미의 반복적인 단어 몇 가지가 나옵니다. 때, 낮, 일, 빛 이라는 말입니다. 때가 낮이라는 것은 빛이 비취는 시간을 말합니다. 빛이 있는 동안은 일할 시간입니다. 이것은 창조질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인하여 이러한 창조질서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창조질서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빛이 등장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한복음 1:9)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어두움에 처한 각인에게 참빛 되신 주님이 비쳐졌습니다. 그 주님을 영접하여 빛의 세계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신의 때는 언제인가 사단의 지배 아래서 세상술에 취하여 세월을 허송하고 있지는 않은가 바울은 지금 당신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로마서 13:12-14)고 했습니다. 예수를 모셨으면 지금 일할 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좇아 실로암으로 나아갑시다. 역사는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셋째:말씀에 순종함으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읽을말씀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6-7) 성경은 계시(revelation)의 책입니다.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은 성경을 통해서 펼쳐 보입니다. 주님은 왜 이 소경에게 치유역사를 이렇게 행하셨는가 평범한 인간의 지각으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은 부분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주님의 숨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보기 위함입니다.
실로암으로 가서 라고 했습니다. 왜 실로암까지 가라고 했는가 실로암 샘물이 효능이 있어서 그러한가 아닙니다. 주님이 능력이 모자라서 그러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 예루살렘 성 동문밖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샘 실로암으로 가서 씻으라고 했는가 그것은 주님이 보내심에 대한 순종을 시험한 것입니다(창세기 22:2). 그가 실로암으로 가는 순종의 행위는 세상의 모든 불신앙을 거부하는 행동이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 눈에 흙을 발라서 실로암까지 가는 동안에 그를 보는 사람들에게 비소와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경된 몸으로 갈 때 넘어지고 자빠지는 고통도 감수해야 합니다. 이러한 환경적인 어려움을 감수하고 순종하는 행위를 시험해 본 것입니다. 가서 씻으라 고 했습니다. 씻는 것은 믿음입니다. 대부분의 세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거기 가서 씻는다고 낫겠는가 나도 가서 씻어 보고 목욕도 해 보았다 고 말할 것입니다. 또한 아람 나라 군대장관 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열왕기하 5:12). 그러나 소경된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었습니다. 가족이나 친족이나 이웃이나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그는 가기로 작정했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씻을 때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었습니다. 베드로가 소명을 받았을 때 가졌던 믿음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누가복음 5:5)고 했습니다. 밝은 눈 은 순종에 대한 응답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순종하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왜 실로암으로 보내었는가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실로암에는 주님의 약속이 있는 곳입니다. 모리아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곳입니다(창세기 22:14). 니느웨는 요나에게 약속한 곳입니다(요나 3:5).
그러므로 당신에게 세상에 모든 길은 막혀 있어도 실로암으로 가는 길만은 열여 있어야 합니다.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가 보내심에 대한 순종하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왔더라 고 함은 감사의 표시입니다. 그가 먼저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받은 바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하기 위한 표시입니다. 성전 미문에서 고침을 받은 앉은뱅이는 고침을 받고 제일 먼저 성전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사도행전 3:8). 받은 바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합시다. 주님은 감사를 잃어버린 자를 향해 말하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마태복음 17:17)고 책망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에게 영적인 안목이 열여야 합니다. 사건을 보는 안목이 열립니다. 때와 시를 분별하는 지혜가 생깁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믿음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오늘 우리 앞에 닥친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 이 무엇인지를 깨닫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감사가 나오게 되며, 당신은 범사에 형통함을 누리게 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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