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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각성 (롬13:11-14)

본문

이제 일어납시다. 어거스틴도 변화받았습니다. 그는 옛 아프리카 북왕국 누미디아(Numidia)의 타가스테(Tagaste)에서 AD 354년 11월 13일에 태어났습니다. 부친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로서 로마제국의 관리였고, 모친 모니카는 철저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는 호탕한 기질이 있어 17세의 나이로 여인과 동거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는 키케르(Cicero)의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를 읽고 철학에 흥미를 느껴 바벨론 종교와 헬라 철학과 인도 사상이 종합된 이단 마니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회의를 느끼고 어머니와 동거했던 여인과 아들의 만류도 뿌리친 채 로마로 갔습니다. 밀라노에서 당시 감독이었던 암부로시우스 주교를 만나 그 인생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주교의 따뜻한 사랑에 감화를 받아 세상의 명예와 육신의 정욕에 얽매인 삶을 청산하고 새롭게 살아야 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애굽의 수도사 인토니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집 정원 무화과나무 밑에 주저앉아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주여 당신은 영원히 나에게 진노하십니까 나의 이전의 죄를 기억치 마옵시고, 이 시간에 내 불결이 끝나게 해 주소서! 하고 번민과 고뇌 속에서 갈등하고 있을 때 하늘로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집어 들고 읽으라”(tolle lege)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방으로 들어가서 성경책을 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읽었던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 이후로 그는 어두움의 일을 청산하고 빛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가 바로 386년 32세가 되는 해였습니다. 그 이후 430년 8월 28일 76세로 하나님께 부름받기까지의 삶은 한마디로 은총의 삶이었습니다. 당시 어거스틴에게 들려진 음성은 이웃집 어린 아이가 부르는 노래 소리였습니다. 비록 어린아이의 노래 소리였으나 성령님이 감동하시니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이 당신에게 하늘의 음성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당신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은 나도 변화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변해야 가정이 삽니다. 내가 변하면 교회가 부흥됩니다. 나부터 먼저 변합시다. 사수가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탄알이 공중을 비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표적을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방랑자나 관광자로 보낸 것이 아니라 사명자로 보내었습니다. 우리는 달려가야 할 표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24)고 했습니다. 이 시대 우리 밀알의 가족들이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
첫째:지금은 깰 때입니다. 읽을말씀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11) 크로노스를 카이로스로 바꿉시다. 희랍인들은 시간에 사용되는 두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크로노스(Χρνο)와 카이로스(καιρ)입니다. 크로노스가 수평적인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수직적인 시간입니다. 크로노스는 자연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의미가 부여된 시간입니다. 크로노스는 창세 이후로 만인에게 주어진 시간입니다. 하루는 24시간이며, 한달은 30일이며, 일년은 365일이라는 자연질서 속에서 수평적으로 흐르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수직적으로 나의 삶에 의미를 주는 시간으로 내가 체험한 나의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쉼없이 흘러가는 크로노스를 나의 카이로스로 바꾸어야 합니다. 위대한 사람은 창조주가 주신 크로노스를 자신의 카이로스로 바꾸어 생에 아름다움을 창조해 갑니다. 바울은 지금 이 크로노스를 카이로스로 바꾸라고 합니다. 인생에게는 두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자는 인생은 크로노스 인생입니다. 그러나 깨어 있는 인생은 카이로스 인생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카이로스 인생이 만들어 갑니다. 하나님은 크로노스적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다스리고 지배하고 정복하는 문화적 사명인 카이로스를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명을 망각하고 세속적인 물결에 빠져 가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ξαγοραζμενοι τον καιρν = Redeeming the time NIV)고 했습니다. 거져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구원의 시간인 카이로스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자는 등에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자입니다(마태복음 25:4). 이제 슬럼프에서 일어납시다. 여기 “자다가 깰 때”란 말은 “슬럼프에서 일어나라”(You to wake up from your slumber NIV)는 말입니다. 슬럼프 상태는 의욕을 상실해서 완전히 자포자기한 상태를 두고 말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매사에 모든 것이 크로노스로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일어나야 합니다. 내 심령의 가려진 커튼을 제쳐 봅시다. 순식간에 어두운 그림자가 다 물러갈 것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납시다(잠언 24:33-3
4).
둘째:어두움의 일을 벗읍시다. 읽을말씀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12-13) 먼저 어두움의 일을 벗어야 합니다. 루마니아의 작가 게오르규가 쓴 25시라는 소설 첫 머리에 이러한 글이 있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지 못할 것이다. 예수가 세상에 와서 심판하려 해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이젠 땅 위에 사람이 없어졌다. 사람이 없는 곳에 무엇 때문에 예수가 오는가 라고 말합니다. 그는 오늘날 인간성을 상실한 야수같은 존재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속의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인생은 어두움 가운데 거하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가 벗어야 할 세속적인 옷이 무엇인가 탐욕의 옷입니다. 방탕과 술취함입니다. 방탕과 술취함은 타락으로 나아가는 수레바퀴와 같습니다. 방탕한 자들을 보면 다 술취하게 되며, 술 취하는 자들은 방탕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방탕은 식욕과 몸의 쾌락을 필요 이상으로 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육욕의 무절제한 추구입니다. 술 취함의 상태가 바로 그러합니다. 술을 마실 때 처음에는 점잖게 사람이 술을 먹다가 나중에는 술이 술을 부르게 됩니다. 그러다가 취하면 술이 사람을 마셔 버립니다.
그러므로 술 취하면 자연히 방탕하게 됩니다. 정욕의 옷입니다. 음란과 호색입니다. 술 취한 다음에 오는 것이 무엇인가 음란과 호색입니다. 여기 음란(κοτη)이란 말은 침상, 성교, 임신이란 말입니다. 무절제한 정욕이 낳은 부도덕한 성행위를 말합니다. 호색이란 분별없는 성욕을 말합니다. 타락한 소돔성에 천사들과 상관하려 했던 무리들이 호색군들입니다(창세기 19:5). 다툼의 옷입니다. 쟁투와 시기입니다. 호색군들이 나중에 서로 다투게 됩니다. 어두움의 결과가 다툼으로 끝을 맺습니다. 쟁투와 시기의 처음은 작은 미움에서 시작됩니다. 미움이 극에 달할 때 시기가 생기며, 시기하다 보면 분쟁하게 되고 서로 쟁투하게 됩니다. 이는 그릇된 편견과 아집과 독선에서 나옵니다. 마치 고요한 호수가에서 정답게 놀던 붕어가 그릇된 아집과 독선에 집착하여 분쟁하다가 나중에는 함께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셋째: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읍시다. 읽을말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4) 옷을 입는데는 몇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부끄러운 수치를 가리우기 위해서입니다. 외부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이러한 옷이 없습니다. 주님이 입혀 준 옷만이 우리가 입을 영원한 옷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입혀 준 옷은 어떤 옷인가 속죄의 옷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세기 3:21)고 했습니다. 범죄한 아담이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가리우기 위하여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 옷으로 의로우신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피 묻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바로 이 옷은 주님이 우리의 부끄러운 수치를 가리우기 위하여 자신이 부끄러움을 당하시고 그 옷을 벗겨 우리에게 속죄의 옷을 갈보리에서 입혀 주신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추한 죄인이라도 주님이 주신 피묻은 옷을 입기만 하면 허물과 죄에서 가리움을 받게 됩니다. 온유와 겸손의 옷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태복음 11:29)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실 때도 종의 형체를 입고 구유에 누우신 몸으로 오셨습니다. 일생동안 머리 둘 곳이 없는 몸으로 구원사역을 행하셨으며, 최후에는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겸손의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구원사역에서 이러한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영화의 옷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누가복음 15:22)고 했습니다. 탕자는 아비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가서 허랑하고 방탕하여 굶어서 주려 죽는 돼지 인생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갈라 입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이웃을 불러 잔치한 것입니다. 우리가 후일에 천국에 가서 이러한 영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 입을 옷은 형언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옷입니다. 이제 육신적인 일을 도모하지 맙시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육신적인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빌립보서 3:7-9). 그리고 종말의 때를 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을 입게 하셨습니다(에베소서 6:10-20). 칼빈은 “매일 매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 것 같은 엄숙한 태도로 살아라”고 했습니다. 아메리카 시인 칼 샌더백은 “매일 매일의 작은 죽음들을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순간 순간 작은 죽음들을 죽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 쌓은 선이 내일의 면류관이요, 오늘 하루 쌓은 적은 악이 내일의 무서운 저주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필립왕의 지혜를 배웁시다.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왕은 항상 자기 곁에 몸종을 두어서 매일 아침 왕이 기침을 할 때 와서 다음과 같은 아침 인사를 하게 했습니다. “폐하여 폐하는 죽을 몸임을 기억하소서”라는 경고를 일러주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흥겨운 잔치상 한 모퉁이에도 항상 해골을 놓아서 향락과 즐거움 중에서도 죽음을 생각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 시대는 어떤 때인가 자다가 깰 때입니다. 크로노스를 카이로스로 바꿀 때입니다. 어두움의 일을 벗어야 할 때입니다. 탐욕과 정욕과 분쟁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복음의 새옷을 입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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